빡빡한 수업에 지친 나, 구내식당 메뉴에 홀리다

권은중의 나이 쉰에 떠난 이탈리아 요리 유학기 ④안식처이자 또 하나의 교실, 구내식당

등록 : 2019-05-02 15:34 수정 : 2019-05-0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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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과 상관없었던 학창 시절 구내식당

코스 요리 나오는 이탈리아 요리학교

식전 빵, 곡물·고기류 메인 요리 이어

젤라토·과일 디저트, 커피까지

타이트한 수업에 지친 학생들

수준급 메뉴 나오는 구내식당에 열광

젤라토와 젤라토케이크는 예술

설탕 적잖은 젤라토에서 설탕 맛 안 나


조개 모양의 ‘콘킬리에 파스타’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구내식당 경험은 그리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중·고교 때 구내식당의 좋고 나쁨을 전혀 몰랐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수업이 끝나면 야간 자율학습을 앞두고 날마다 라면과 우동을 먹었고, 그것도 모자라면 빵을 사서 먹었다. 구내식당의 맛을 따지기에는 너무 어렸고 늘 배가 고팠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며 ‘맛있는 구내식당’이란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형용모순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대학 시절 우리 학교 식당의 간판 메뉴는 장국밥이었다. 그러나 무늬만 장국밥이었고 ‘소가 강을 건너간’ 수준의 맛이었다. 구내식당 대신 학교 근처 라면과 김밥 파는 집으로 주로 갔다.

기자가 된 뒤 여러 출입처를 다닌 덕분에 구내식당도 다양하게 다녀봤다. 정부종합청사는 물론이고 법원·검찰청·경찰서·한국은행·국세청 등 각종 기관의 구내식당이나 여러 기업의 구내식당도 다녀봤다. 하지만 한국에서 구내식당이란 뭘 먹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거 말고는 큰 장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향수병도 달래주는 구내식당

나폴리 스타일의 피자도 구내식당 단골 메뉴다.

이런 나에게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요리학교’(ICIF)의 구내식당은 구내식당의 이데아가 뭔지 보여줬다. 이곳 구내식당은 레스토랑처럼 코스로 구성돼 있다는 게 장점이다. 식전 빵을 주고 나서 파스타나 곡물로 만든 첫 번째 메인 요리에 이어 고기나 생선으로 구성되는 두 번째 메인 요리가 나온다. 디저트로 젤라토(이탈리아 아이스크림)가 나오고 다양한 과일을 골라서 먹을 수 있다. 커피와 차도 무제한이다. 저녁도 똑같이 제공된다. 모두 별도의 비용 부담이 없다. 등록금에 모두 포함돼 있다.

코스별로 살펴보면 식전 빵이 무엇보다 훌륭하다. 유명 제빵사들의 레시피로 만드는 난생처음 보는 피자와 빵이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시칠리안 스핀초네(피자)가 정말 압권이었다. 무청을 얹은 포카치아(납작한 빵)인데, 고향의 맛이 났다. 이 빵은 피자 코스 셰프인 니콜라의 작품이다. 나폴리 출신인 그는 각종 피자 관련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인물이다. 이런 빵을 먹다보면 이탈리아 현지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식전 빵마저 우습게 보인다.

무청을 얹은 시칠리아 ‘포카치아 스핀초네’, 한국의 맛이 느껴진다.

첫 번째 메인 요리인 면이나 리소토 역시 내용과 형식이 훌륭하다. 형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파스타의 형태가 매번 바뀐다는 점이다. 스파게티(국수 모양)는 물론이고 푸실리(나사 모양), 펜네(짧은 원통 모양), 라비올리(둥글거나 네모형의 작은 만두 모양) 등 난생처음 본 파스타도 많았다. 파스타와 리소토를 맨 처음에는 그냥 먹었지만 이탈리아 체류 기간이 한 달을 넘으면서 이탈리아 고추인 페페론치니를 넣어서 먹고 있다. 매콤한 맛이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준다.

브로콜리를 넣은 ‘푸실리’에 페페론치니 한 숟갈을 넣으면 향수병이 사라진다

메인으로 주로 고기 요리가 나오는데 나는 고기를 즐기지 않는다. 다만 평가를 한다면 레스토랑이 아닌만큼 특별한 소스 없이 나올 때가 많다. 그러나 일단 고기를 한 번 삶거나 데친 뒤에 구웠기 때문에 매우 부드러웠다. 돼지갈비와 감자와 콩을 넣어서 졸인 요리는 고기 요리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맛이 있었다.

구내식당이 나를 비롯한 학생들에게 특별했던 것은 꼭 맛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요리학교는 수업이 매우 타이트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아침 8시에 시작한다. 이탈리아 국경일에도 쉬지 않으며 토요일에도 수업하는 날이 많다. 게다가 하루 종일 요리 실습을 하는 날도 적지 않다. 꽉 짜인 일상에서 비상구는 칼로리와 술일 수밖에 없다(술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런 상황이라면 뭘 줘도 맛이 있을 텐데 수준급의 요리가 나오니 구내식당에 열광하는 것이다.

구내식당에 가끔 나오는 송아지 고기 와인 조림 폴렌타.

여기에 구내식당 셰프인 마리오의 캐릭터가 독특하다. 60대 중반인 그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학교의 코미디언으로 통한다. 한국 학생뿐 아니라 모든 나라 학생이 그를 좋아하고 따른다. 마리오의 인스타그램을 보면,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과 찍은 사진이 빼곡하다. 물론 사진 주인공은 남성보다 여성이 확실하게 많다.

그는 자신의 요리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미슐랭 셰프 뺨친다. 그는 자기가 하는 채소 수프를 ‘마리오스트로네’라고 한다. 이탈리아식 채소 수프인 ‘미네스트로네’를 자기 이름처럼 살짝 바꾼 것이다.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 참 쉽게 쓱쓱 만드는데, 맛이 있다.

구내식당 셰프인 마리오의 전매특허인 채소 수프 ‘마리오스트로네'

그런데 그는 테러리스트란 별명도 있었다. 음식을 남기거나 메인 요리를 건너뛰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동기 중 한 명이 한번은 배가 불러서 음식을 남겼는데, “굶고 있는 아프리카를 생각하라”며 남긴 음식을 포장해주기도 했다. 또 젤라토 코스를 듣던 스위스 출신의 여학생이 메인 요리를 먹지 않으려고 하자 웃으면서 그를 설득해서 먹게 하기도 했다.

음식을 많이 남기거나 나처럼 고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은 마리오가 배식대에서 잠깐 자리를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른 식기를 반납해야 했다. 그러다가 마리오에게 걸리면 이탈리아어로 “왜 음식을 남기느냐”는 지청구를 들었고, 더듬더듬 해명을 해야 했다. 이 희극적 상황은 식사 시간을 유쾌하게 했다.

마지막 과정인 디저트는 어떤 이에게는 식사보다 중요하다. 때마다는 아니지만 자주 젤라토가 나온다. 교과과정 가운데 젤라토 실습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실습 때 헤이즐넛 젤라토를 만들었다. 3주 과정의 젤라토 코스가 시작되면 끼니마다 젤라토를 먹을 수 있다.

이곳의 젤라토와 젤라토 케이크는 정말 예술이다. 이탈리아의 유명하다는 젤라토 가게를 많이 다녀봐도 우리 학교 젤라토처럼 맛있는 걸 먹어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도 이곳 젤라토는 달지 않다. 젤라토 셰프인 마시모는 “설탕은 단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구조감을 주기 위해서 사용한다”고 한다.

그래서 초콜릿 젤라토나 딸기 젤라토는 단맛보다 초콜릿 맛이나 딸기 맛이 더 강하다. 레몬 젤라토는 단맛보다 신맛이 난다. 하지만 배합 비율을 보면 설탕이 절대 적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레몬즙과 설탕의 질량 차이는 220g에 불과하다. 정말 오묘한 경계선을 잘 지키는 셈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 젤라토와 레몬 젤라토. 구내식당 디저트로 자주 나온다.

담장을 걷는 듯한 이런 오묘한 균형감은 이 학교의 모든 셰프가 수업 중에 가장 강조하는 가치 가운데 하나다. 치즈·올리브오일·와인 같은 식재료 강사들도 비슷한 말을 많이 한다. 이런 균형감은 변화무쌍한 음식 트렌드에서 이탈리아 요리가 특유의 전통을 잘 지켜나가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한식에서 이런 균형감은 어떤 것일까라는 화두를 갖게 한다.

6월 초 마스터 과정을 끝내고 학교를 떠나 현장 실습을 나가면 아마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수업을 받던 교실이 아니라 구내식당이 될지도 모르겠다.

글·사진 권은중 <독학 파스타>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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