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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단골 삼계탕집 뒤
한옥 독립운동가 김가진 집
수성동계곡 올라가는 곳에는
노천명·이상범·천경자가 살던 곳
해방 뒤 미 헌병대 사령관과 김수임이
이완용의 집에서 동거해
이강국은 초대 외무상까지 했으나
후일 북한서 ‘미제 스파이’ 혐의로 처형
종로구 체부동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단골손님이었다는 죄로 정권교체 후 세무 조사까지 당하여 화제가 되었던 삼계탕집이 있다. 그 삼계탕집 뒤 오른쪽 주차장 쪽 한옥이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의 집이다. 그는 창덕궁 여러 전각의 편액을 직접 썼을 정도로 명필이었고 독립문 현판도 그의 글씨다. 이완용이 썼다고 많이 알려졌으나 그 근거는 <동아일보>(1924년 7월15일자) 독자 투고가 유일하다. 이완용은 자서전에 자기가 쓴 유명 글씨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독립문 현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오히려 최근 서체 분석 등을 통해 김가진의 작품으로 인정된다.
김가진은 3·1운동 실패 후 74살 노구로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졌다.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아들 내외는 해방 후 귀국했으나 아들 김의한은 전쟁 때 북으로 떠나 그 후 평양 재북 인사 묘에 안장되었다.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아 했던 며느리 정정화는 전쟁 때 부역죄로 구속되었다. 하지만 훗날 독립운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곳을 지날 때면 최소한 김가진의 후손들에게는 오직 통일만이 진정한 해방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올라가는 길은 옥류천 물길을 복개한 것으로 이내 이상의 집터다. 또 그 위로는 시인 노천명과 화가 구본웅, 이상범, 천경자가 살던 곳이며, 이상범의 집은 문화재로 등록되어 옛 모습이 남아 있다.
청전 이상범은 유홍준 교수가 “21세기 우리 미술의 대표선수로 한국화에서 청전, 양화에서 박수근”이라고 했던 사람이며,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 <동아일보> 학예부 미술기자로서 일장기를 지운 당사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사건 후 친일로 돌아섬으로써 안타까움을 준다.
황해도 출신의 노천명은 어린 나이에 이곳 종로구 체부동 이모네 집으로 와서 진명보통학교, 진명여고보 등을 다녔다. 그 후 1949년부터 이곳으로 이사와 살다가 전쟁 때 피난 가지 못하고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한 것이 문제가 되어 서울 수복 후 21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통령비서실에 있던 시인 김광섭의 도움으로 6개월 만에 출소하여 공보실 중앙방송국에서 이승만 정부를 위해 일했다.
이처럼 정정화, 노천명 등 전쟁 때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사람들 상당수가 부역죄로 걸렸다. 인공 시절 3개월간 부역자는 검거 약 15만 명, 자수 39만 7090명으로 총 55만 915명이다. 이것은 추정치가 아니라 정부가 발간한 <한국경찰사> 제2권에 기록된 것이다. 도망자들이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참으로 역설적인 역사다.
당시 서울 지역 부역자 처벌 책임자는 악질 친일파 노덕술이었고, 정정화는 감옥에서 일제강점기에 수감되었을 때의 친일파 간수가 여전히 교도소를 지키는 것을 보고 “혁명 위해 살아온 반평생 길인데 오늘날 이 굴욕이 과연 그 보답인가”라며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수성동계곡 쪽으로 걷다보면 그 주변에는 박노수 가옥, 윤동주 하숙집 터, 이중섭 작업실 등이 있고, 다시 오늘의 목적지인 이완용 집터를 향해 내려오면 월북학자 이여성 집터를 지난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친일파 윤덕영이 살던 유럽식 호텔 모양의 최고의 주택 ‘벽수산장’ 안채와 문설주가 남아 있으며, 또 월북학자 이여성의 집터도 그 일대이다.
한편 그 옆 치킨집은 전쟁 시기 미군 장교로 조국 땅을 밟았다가 박헌영의 도움으로 월북했지만, 결국 그곳에서 이중간첩으로 처형된 엘리스 현의 집터다.
이완용의 집터 위에 새로 지은 2층 석조 건물. 그 모양이 본래의 이완용 집과 상당히 비슷한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이완용은 이곳에 1913년 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살았다. 해방 후에는 김수임이 미군 헌병대사령관 존. E. 베어드와 이곳에서 동거했지만, 북한 초대 외무상 이강국의 월북을 도운 혐의로 1950년 4월 체포되어 2개월 만에 사형 선고를 받고 6·25 전쟁 직전에 바로 처형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이강국 역시 북에서 미군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 것이다.
한편 김수임과 베어드 사이에서 갓 태어난 아들 김원일은 입양되었는데, 훗날 자신의 뿌리를 찾던 중 기밀 해제된 1956년 미 육군정보국 자료를 보게 되었다. 이강국은 미국 CIA의 비밀조직인 JAC에 고용된 자였음이 2008년에 그 자료를 통해 밝혀졌다.
참고로, 현재 이곳에 있는 집은 2003년에 신축했지만 우진각 지붕(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의 2층 석조 건물에 입구에는 포치(건물의 입구나 현관에 지붕을 갖추어 잠시 차를 대거나 사람들이 비바람을 피하도록 만든 곳)가 설치되어 있는 등 일제강점기 이완용이 살던 집과 그 모양이 상당히 비슷해, 이완용과 김수임이 살았던 공간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또 바로 옆에는 최근 영화 <1987>로 널리 알려진 남영동 대공분실과 같은 옥인동 대공분실이 있었는데, 보안수사대 통합 청사를 신축하기 위해 철거했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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