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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 들어 궁정동 안가
덮으려는 무궁화동산 프로젝트
수주한 조경회사 이승률 회장이
김상헌 시비 뒤편 피격 장소 몰래 표시
경성전기 사장 집 해방 뒤
이시영 부통령 관사로 쓰이다
요정정치의 산실인 청운각 변신
이곳서 한일협정 기본 윤곽 탄생
임진왜란 때 임천 조씨의 희정, 희철이란 쌍효자를 낸 마을이라 해서 지어진 종로구 효자동 175-1번지는 우리 근대문학의 선구자였던 춘원 이광수가 살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해방을 맞이했고, 1949년 2월7일 반민특위에 체포된 곳이기도 했다.
이광수는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그 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등 조선의 독립을 꿈꿨던 청년이었지만 3·1운동의 좌절과 1921년 허영숙과 결혼 후 사이토 총독을 만나고 이듬해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며 자신의 변절을 세상에 알렸다.
이에 소설가 박종화는 허영숙이 총독부의 밀정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가 밀정이든 아니든 이광수의 변절은 이미 을사늑약 직후 조선 침략의 선동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신의 이상형임을 밝혔을 때부터 내포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런 그의 성향은 결국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선동하며 일제강점기를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해방이 되자 그는 자신의 친일 활동을 세탁하려 했다.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를 찾아가 <도산 안창호>의 집필을 맡았으며, 경교장으로 찾아가 백범에게 일기와 자료를 받아 <백범일지>의 집필을 책임진 것이다. 그 후 이승만 단독정부가 들어서고 친일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자 지금도 친일 청산에 대한 반대 논리로 이용되는 <나의 고백>(1948년 12월)을 집필함으로써 ‘그때 친일 안 한 놈이 어디 있냐’는 식으로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비난을 변명한다.
따라서 이미 무력해진 반민특위에 의해 문학인 제1호로 체포되었지만 한 달도 못 돼 석방되고 만다. 그 후 6·25동란이 터지면서 인공 치하에 있던 1950년 7월12일 북의 시인 리찬이 이곳 효자동으로 그를 찾아와 그와 함께 북으로 떠났으니 효자동 이 집이야말로 이광수의 모든 것을 느끼고 상상하기에 충분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광수 집 바로 뒤편은 해공 신익희의 집이다. 그는 1956년 대선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단순명쾌한 구호였던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내걸고 한강 백사장에서 유권자 수십만 명을 모아놓고 연설한 후 호남선 기차를 타고 다음 유세지로 떠나던 중 사망했다. 그리고 이곳을 지나 그 위로는 우리에게 ‘궁정동 안가’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궁정동이 있다.
춘원 이광수의 효자동 집터.
10·26사건의 현장인 이곳 ‘안가’의 공식 명칭은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이었지만 박정희에게는 전혀 안전하지 않았던, 역설적인 이름의 공간이다. 이곳은 중앙정보부장 집무실을 포함해 5채의 건물이 있었지만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취임 넉 달 만에 철거하고 이곳에 현재의 무궁화동산을 꾸며놓았다.
10·26은 우리 현대사에서 역사적 사건이기에 그 장소를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못내 아쉽다. 그런데 이곳 무궁화동산 프로젝트를 수주받은 조경회사 이승률 회장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피격 장소를 표시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박정희가 피격된 곳에 표지석이라도 세워놓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관계자가 펄쩍 뛰기에 자기 나름으로 표시해둔 것이며, 위치는 ‘김상헌 시비’ 뒤편 우측에 성벽이 끊기는 지점 굽은 소나무가 심겨 있는 자리이다.
궁정동은 또 우리 역사 속에서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북한군의 청와대 습격 사건, 소위 ‘1·21사태’가 일어난 곳이다. 무궁화공원 북쪽으로 칠궁(육상궁) 끝부분의 청운실버센터 앞 삼거리가 그 현장이다. 비록 청와대 습격은 막았지만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낳았다. 바로 이듬해 김현옥 서울시장은 ‘서울시 요새화 계획’을 발표였고, 그해의 구호로 “싸우며 건설하는 해”로 정했다. 이에 따라 칠궁이란 문화재가 잘려나가며 도로가 확장되었고, 인왕산과 북악산은 민간인 접근 금지 지역이 되었다.
반면에 주변의 민간인 활동을 확대해 간첩 침투를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도록 차량 통행을 확대하기 위해 북악스카이웨이를 개통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숲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종로구 평창동도 지금의 주택단지로 개발했다. 또 전쟁을 대비해 남산 1, 2호 터널도 개통된 것이다.
한편 전국적으로도 주민등록번호, 향토예비군 등이 새롭게 생겼으며, 극단적으로 이 사건에 대한 보복을 위해 684부대(실미도 부대)가 창설되었다. 이런 끔찍했던 사건을 생각하며 창의문로를 따라 오르면 고개 위에 당시 전투로 사망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의 동상이 서 있으며, 그 아래에는 바로 이곳으로부터 북악산 정상으로 약 150m 위에 청계천 발원지가 있음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이 청계천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자하문터널 우측에 동농 김가진의 본래 집인 백운장이 있었던 곳에 지금은 백운동천이란 각자 바위만 남아 있으며, 여기서 자하문로를 따라 내려오면 청운동 53-26에 있던 일제강점기 경성전기 사장의 집이 해방 후 이시영 부통령 관사로 쓰이다 그 뒤 요정정치의 산실로 군림한 ‘청운각’으로 변했고, 이곳에서 한일협정의 기본 윤곽이 마련되었다. 이곳에서 한밤 회담을 했던 일본 시나 외상의 유명한 말 “역사는 밤에 이뤄졌다”는 말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이 아래로도 현대 그룹의 본가라 할 수 있는 청운동 자택, 우당 이회영기념관 등 여러 역사적인 공간이 곳곳에 있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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