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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도착한 날에
한국은 최악 미세먼지 기록
날마다 이탈리아 파란 하늘 감탄
비 온 다음 날은 눈이 시릴 정도
이탈리아가 예술 발달한 건
찬란한 햇빛 때문 아닐까?
알록달록 색깔을 중시한 요리도
평등하게 쏟아지는 햇살 영향?
날씨가 좋으면 기숙사 뒷산에서 멀리 눈 덮인 알프스가 보인다.
이탈리아는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이다. 이탈리아에서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음식도 문화재도 잘생긴 남녀도 아니다. 하늘이다. 북위 40도가 훨씬 넘는 위치인데도 이탈리아 하늘은 남태평양의 외딴섬에서 보는 하늘만큼이나 파랗다. 비도 잘 오지 않는데 멋진 흰 구름이 유유히 흐른다.
3월 초 이탈리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국의 미세먼지는 200㎍(마이크로그램)을 넘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떠나오기 전 서울에서 하루도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를 걱정하지 않았던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탈리아에 도착해보니 투명해 보일 정도로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안도감을 넘어선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하늘 볼 일이 없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날마다 하늘을 보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종교가 발달한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하늘을 자주 보다보니 하늘의 파란 정도가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마치 사하라 사막의 사람이 수십 가지 모래 색깔을 구분하듯 말이다.
비가 온 다음 날, 맑게 갠 하늘은 파랗다 못해 눈이 시릴 정도다. 이럴 때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 기숙사 뒷산에 올라가면 눈 덮인 알프스를 볼 수 있다. 매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가 온 다음 날에는 기대하며 꼭 기숙사 뒷산을 오른다.
비 온 다음 날은 하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햇빛도 장관이다. 햇빛이 닿는 모든 곳이 반짝거린다. 그게 건물이든 나무든 빨래든 말이다. 그 모든 풍경이 포토샵을 거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시광선은 이탈리아에서는 그 폭이 훨씬 더 확장된 느낌이다.
가시광선의 후광 덕분일까? 내 시선도 제법 감성적이 된다. 기숙사에서 학교에 가는 길에 미루나무들이 길게 서 있다. 그런데 가끔 이 나무들이 햇빛을 역광으로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무언가를 표현해서 이 장면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목사를 지망했던 고흐가 프랑스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풍경들을 보고 화가로 변신한 것처럼 말이다.
학교와 기숙사를 잇는 길에 서 있는 미루나무.
이탈리아가 미술·음악·패션 등 예술이 발달한 것은 햇빛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옷을 참 잘 입는다. 젊은 사람은 물론 나이 든 사람도 참 멋지게 입는다. 나이 든 남자가 청재킷이나 가죽옷을 입고 스니커즈를 신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근사하다. 나이 많은 사람이 쓰는 돋보기도 우리나라처럼 천편일률적인 색깔이 아니라 빨갛고 하얗고 초록색으로 다양하다. 안경테와 신발 또는 단추까지 색깔을 맞춘 노신사를 보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알록달록한 앵무새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음식만큼 색감이 중시되는 음식은 드물다. 악마의 과일이라 하는 토마토를 밥과 국수에 넣은 것도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시뻘건 피자도 그들이 처음 만들었다. 쌀로 만든 리소토에 금박을 처음 올린 것도 그들이다. 금을 얇게 펴 금박으로 만들어 식사 때마다 먹던 오스만 제국 술탄의 밥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도 이탈리아 요리사다. 이런 파격은 생선회에 금가루를 뿌리는 방식으로 한국에 소개됐다.
이탈리아가 서양 문명의 핵심인 권력분립과 법치주의의 토대를 만든 것은 동양처럼 전체보다는 개인 등 개체를 중시하는 전통 때문이다. 개별을 강조하는 전통은 모든 사물을 낱낱이 밝게 비춰주는 햇빛 영향은 아니었을까? 덕분에 이탈리아는 19세기까지 수많은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심지어 영국과 프랑스가 절대주의 왕정을 세워 식민지 침략에 나설 때도 이들은 지역주의를 고집했다. 지금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탈리아는 축구(특히 월드컵) 할 때만 존재하는 나라고, 우리는 20개의 지역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한 국가든 20개의 지역이든 이탈리아의 하늘은 하나다. 이 좋은 날씨에 산책을 안 다니려야 안 다닐 수가 없다. 내가 자주 산책하는 곳은 기숙사 뒤의 포도밭이다. 날마다 포도밭을 걷다보니 포도나무의 성장을 나도 모르게 사진으로 기록하게 됐다.
학교 뒤 포도밭에는 포도뿐 아니라 장미와 양귀비가 만발해 산책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3월 초 기숙사에 왔을 때 포도나무들은 가끔 서리를 뒤집어썼고 마른 가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5월 말인 지금은 무성하게 잘 자라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곧 풍성하게 포도가 맺힐 것이지만 나는 이를 보지 못한다. 다음 달이면 현장 실습을 위해 이탈리아 어딘가 있을 레스토랑으로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일이다.
포도밭은 그 자체로 볼만하다. 포도밭 고랑과 고랑 사이에는 콩 등 여러 풀을 심는다. 콩이 자라면 이걸 갈아엎는다. 콩의 뿌리혹박테리아가 가진 영양분을 포도에게 주려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의 ‘통제된 원산지 인증’(DOC)을 받기 위해서는 포도밭에 화학비료는 물론이고 인공적으로 물을 주어서도 안 된다. 오로지 자연 강수량과 자연 영양분에 의존해야 한다. 어떻게든 결과를 내야 하는 미국식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참 낯선 재배 방식이다. 그런데도 이 포도밭에서 자라는 바르베라와 모스카토는 달콤새콤한 포도주가 된다.
포도나무 고랑의 처음과 끝에는 키가 큰 장미를 심는다. 그래서 포도밭은 장미 화원처럼 아름답지만 이 장미는 장식용이 아니다. 장미는 병충해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포도에 미치는 악영향을 먼저 알려주는 파수꾼 노릇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수꾼인 셈이다. 장미 말고도 포도밭 주변으로 3~4월에는 민들레, 토끼풀, 제비꽃이 지천이었다가 5월에는 빨간 양귀비가 피었다. 모네·마네의 그림에서 보던 양귀비밭이 학교 뒷산에는 어디든 펼쳐져 있다.
황혼녘 하늘에 비행기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고 있다.
강렬한 햇빛은 강렬한 석양으로 마무리된다. 낮에 강렬한 햇빛은 밤에는 그만큼의 짙은 어둠을 만든다.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올 때, 짙은 어둠과 강렬한 석양의 보색대비는 저절로 한국에 있는 가족 생각이 나게 한다.
내가 있는 곳은 산이 많기 때문에 해가 떨어지면 금세 추워지고, 쌀쌀한 날씨는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게 한다. 밤마다 맥주잔이나 포도주잔을 기울이는 까닭이다. 빛과 어둠, 이탈리아 하늘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이다.
글·사진 권은중 <독학 파스타>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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