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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북촌이란 말 조선 시대도 있어
강점기에 일본인 본거지로 청계천 이남
개발되며 조선·일본의 대립
일상생활에 널리 쓰이기 시작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안 벽돌 건물
1932년 경성의전 외래진료소로 지어
국군병원이자 보안사 건물로 겸용
10·26 때 외부에 있던 전두환
보안사 1처장 등 통해 사태 파악
보안사 1처장 등 통해 사태 파악
서울의 지명으로 쓰는 ‘남촌과 북촌’이란 말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던 말이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본거지였던 청계천 이남이 개발되면서 ‘개발과 낙후’ 또는 ‘일본과 조선’의 대립 개념으로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화 <장군의 아들>도 북촌 종로 깡패 김두한과 남촌 충무로 깡패 하야시의 대결로 그려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북촌’이라고 하면 지하철 3호선 안국역 북쪽의 가회동 일대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관광산업의 논리 앞에 북촌이 좁아지고 만 셈이다.
어쨌든 이제부터 북촌 관광지를 둘러보자. 먼저 1965년에 복개된 삼청동천(또는 중학천)의 물길을 따라 걸어보기로 하고, 그 첫자리로 종로구 중학동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택했다. 제작 당시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소녀상을 설치하지 말라고 계속 압력을 가하는 과정이었기에 작가가 이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 소녀가 주먹을 쥐게 했다고 한다.
또한 소녀의 뜯긴 단발은 강제와 아픔을 상징하며, 그런 고통 속에서 간신히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 때문에 불안했던 소녀의 마음을 발을 완전히 땅에 딛지 못하고 살짝 뒤꿈치를 드는 것으로 형상화했다. 그리고 소녀의 찢긴 상처가 파편화된 채 그림자에 남아 있으며, 부디 행복한 영혼으로 환생하기를 바라며 나비를 그림자의 가슴에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생사를 달리한 할머니들과도 연결해주는 영매로서의 새가 어깨 위에 앉아 있고, 소녀상 옆의 빈 의자는 일본의 사과를 끝내 받아내지 못한 채 쓸쓸히 눈감은 할머니들의 빈자리를 상징한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위안부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며 발길을 옮겼다.
삼청로가 시작되는 부분에는 도로 한복판에 동십자각이 높이 서 있는데, 이것은 본래 경복궁의 동궐대로 붙어 있었지만 1929년 도로 확장으로 떨어져나가 고아가 되어 버렸다. 반면 서십자각은 이에 앞서 1923년 경복궁 서쪽으로 전차선로가 놓이면서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길을 건너면 바로 종로구 사간동이다. 조선 시대 3사의 하나인 사간원이 있던 곳이라 붙은 지명이다. 이곳에 ‘매우 아름다운 집’이란 뜻의 ‘두가헌’이 있다. 1910년대 지은 집으로,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가 살던 곳이다.
이곳을 관통하여 골목길로 걷다 보면 조선 시대 국왕의 친가 쪽 종친을 관리했던 종친부가 나온다. 이 일대의 현대식 건물은 모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그런데 이런 현대식 건물과 달리 일제 강점기의 벽돌 건물이 있으니 그야말로 조선 시대부터 21세기 현재까지의 건물이 함께 어울려 있는 곳이다.
경성의전, 보안사를 거쳐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사용한다.
이 벽돌 건물은 본래 1932년 경성의학전문대학의 외래진료소로 지었으나, 해방 후 전쟁을 겪으며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쓰였다. 1971년 보안사(현 기무사)도 이곳을 함께 썼다. 따라서 우리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던 1979년 ‘10·26사건’ 때 궁정동 안가에서 피살된 박정희의 시신이 옮겨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당시 외부에 있던 보안사 사령관 전두환은 청와대 경호실에 있던 동생 전경환으로부터 급변 사태에 대한 전화와 이곳 보안사1처장 정도영의 급보를 듣고 10·26를 제일 먼저 파악했다. 이런 빠른 정보 입수가 그의 12·12 쿠데타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제 발걸음을 옮겨 북쪽으로 걸으면 한 마을에서 판서를 8명이나 배출했다고 붙인 지명, 종로구 팔판동부터 본격적인 삼청동 도심 관광지가 나타난다. 삼청파출소에서 약 100m쯤 가면 오른쪽 골목에 요즘 도심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목욕탕 굴뚝이 높이 솟아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이곳에 궁중에서 썼다는 ‘복정’이란 우물이 아직도 있으며, 이 골목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 걸으면 경복궁과 총리공관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멋진 삼청동 일대를 관망할 수 있다.
물론 가까이 볼 수는 없지만 총리공관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등나무와 300년 된 측백나무까지 자리하고 있다. 또 그 뒤로는 해방 정국 속에서 우사 김규식이 머물렀던 삼청장이 있지만, 현재는 청와대 부속 건물로 쓰이므로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고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다시 삼청동길로 내려가는 곳은 커다란 바위 하나를 깎아 층층 계단을 만든 돌계단이 있어 이곳이 개발되기 전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여기서 삼청동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한국금융연수원이 있는데, 이곳에는 1884년 조선 최초의 근대식 무기 공장인 번사창이 있어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또 칠보사 인근에는 조선 시대 정조의 수라상에 진상됐다는 우물물을 떠오던 ‘성제정’이 여전히 있으며, 오늘 산책의 끝자락에는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한양도성 최고의 명승지라 했던 삼청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과히 물이 맑고(水淸) 숲이 맑으며(山淸) 사람의 마음까지도 맑은 곳(人淸)인 ‘삼청’(三淸)이며, 그 들머리에는 우리에게 충신의 표상인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를 새긴 시비가 놓여 있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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