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본사, 해방 뒤 첫 대중 집회 열린 곳

유영호의 우리 동네 어슬렁 산책 북촌 일대 下 계동·원서동

등록 : 2019-07-04 14:31 수정 : 2019-07-0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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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여운형에 치안권 이양’ 소식에

옛 휘문중학교 운동장에 군중 몰려

헌법재판소 자리선 ‘인민공화국 선포’

최초 우익 정당 ‘고려민주당’ 터와

우익계 미술 주도 고희동 집도 이웃

계동 옛 이름은 제생동에서 변한 계생동

‘기생동’과 비슷하다며 ‘생’자 빼버려


오늘은 소위 북촌 관광지의 마지막 산책으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것을 주도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이곳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책임진 천도교 측에서 그 내용을 완성한 후 보성사에서 인쇄해서 전국 각지로 배부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손병희의 셋째 사위 방정환이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한(1921) 곳이고, 이듬해 어린이날을 선포함으로써 ‘어린이’라는 말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한편 이곳 담장 너머 있는 경인미술관은 갑신정변에 관여한 박영효의 집이다. 임오군란(1882년) 당시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던 일본공사관이 불타면서 일시 이곳을 공사관으로 사용하며 이 일대에 새로운 공사관을 지었다. 따라서 이곳은 일본에 기대어 저지른 갑신정변과 밀접한 곳이기도 하다.

안국역 근처 일본 공보문화원은 구한말 일본 헌병 초소가 있던 곳으로, 운현궁에 머물던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선 황실의 인사를 감시하던 곳이다.

공보문화원에서 길 건너 현대그룹 본사 옆을 따라 일직선으로 난 길이 제생동천을 복개한 길이다. 그 이름은 조선 시대에 이곳 현대그룹 본사 터에 있었던 제생원(서민 치료기관)에서 따온 이름이다. 따라서 이 일대를 제생동이라 했지만 세월이 흐르며 ‘계생동’으로 변했고, 이것이 1914년 동명을 지을 때 발음이 기생동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아예 ‘생’자를 떼어 ‘계동’이 된 것이다.

이런 계동 입구에는 을사늑약을 끝까지 반대한 한규설의 손자 한학수의 집이 그대로 남아 현재는 한정식집으로 이용된다. 해방 3일 뒤 이곳 사랑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우익 정당인 고려민주당(위원장 원세훈)이 창당되었다. 또 맞은편 현대그룹 본사 건물 옆에 조성된 소나무 정원이 바로 2002년 대북 송금 사건과 관련하여 정몽헌 회장이 건물 12층에서 뛰어내려 숨진 곳이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해방 직후 설립된 건국준비위원회 본부 건물(현 보헌빌딩)이 최근까지 존재했지만, 근대건축물로 주목받자 2003년 건물주가 문화재로 지정되면 받게 될 규제를 피해 급히 철거해버림으로써 해방정국 역사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다행히 건준을 창립한 몽양 여운형의 집이 인근에 있다. 비록 도로확장으로 잘려나가면서 마치 겉모양은 양옥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그대로 한옥 구조를 유지하며 칼국숫집으로 이용되고 있다.

해방되던 날 오전 8시 여운형은 총독부 정무총감으로부터 조선의 치안권 이양을 약속받고 돌아와 바로 그날 저녁 좀전에 지나친 임용상의 2층 양옥집에서 건준을 창립하며 그야말로 새 조국의 건설을 꿈꿨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음날 여운형의 집 뒤에 있던 휘문중학교(현 현대그룹 본사 터) 운동장에 군중이 몰려들었고, 여기서 해방 후 첫 대중 집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 후 9월8일 경기고등여학교(현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미 하루 전 맥아더가 포고문을 통해 미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the occupying forces)임을 밝힘으로써 여운형의 모든 정치 플랜은 무산되고 말았다.

여운형의 집 위로는 3·1운동을 실행하기 위해 당시 주요 인사들이 만났던 인촌 김성수의 집과 만해 한용운이 머물렀던 유심사가 있으며, 계동길 맨 끝에는 처음 3·1운동이 움튼 중앙고 숙직실이 있다. 그리고 계동길은 아니지만 인근에 3·1운동의 좌장 역할을 한 손병희와 실무 총책을 맡은 최린의 집도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100년 전 만세시위를 위해 33인이 모였던 태화관과 시위 군중이 모였던 탑골공원 역시 가까이 있다.

여운형집에 대한 표석과 뒤편 도로확작으로 잘려나가 일부만 남아 있는 여운형의 집.

한편, 계동에서 가회동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일제강점기 최대의 사업가로, 화신백화점을 창업한 박흥식의 집(가회동 177-1)이 있다. 그런데 그가 이곳을 떠나자 이 집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다. 현대그룹의 신화를 이루어낸 곳은 청운동 자택인데 그곳은 아들 정몽구 현대차 회장에게 넘겨주고 인생 말년에 굳이 왜 이리로 옮겼을까? 결국 이곳으로 옮겨 1년 정도밖에 못 살고 숨졌기에 많은 상상을 해본다.

계동길을 벗어나 중앙고에서 동쪽으로 종로구 원서동길을 따라 내려오면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고희동이 살았던 집이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그는 해방 후 우익계 미술을 주도하며, 초대 예술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또 고희동 가옥 바로 인근이 일제강점기 중앙고보 교장으로서 3·1운동과 밀접히 관련되었고, 해방 후 한민당 초대 당수를 역임한 송진우의 집터(원서동 74-1)다. 뿐만 아니라 이 원서동 길에는 ‘목마와 숙녀’로 우리나라 모더니즘 작가의 기수로 떠올랐다 요절한 박인환의 집(원서동 134-8)이 불과 몇 해 전까지도 있었다.

창덕궁 금호문 앞은 1926년 순종 승하의 슬픔과 일제에 대한 분노로 송학선이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고자 총독이 탔을 거라고 생각한 승용차에 올라 칼로 찔러 승객을 죽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사이토 총독이 아니어서 미수로 끝난 곳이다. 또 이곳에는 우리나라 건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또한 가장 많은 비판도 받는 김수근의 건축물 ‘공간’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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