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 어린 셰프의 호통, 나이 버리고 요리에 빠지게 해

권은중의 나이 쉰에 떠난 이탈리아 요리 유학기⑪ 한국의 나이와 이탈리아의 나이는 다르다

등록 : 2019-07-25 14:47

크게 작게

100㎏ 넘는 거구의 긴 수염 셰프

‘민증’ 까보니 나보다 한참 어려

부주방장은 27살 적은 조카뻘

그들 앞에서 난 그저 요리 풋내기

한국에선 나이 많다 번번이 퇴짜

어쩌다 인턴 자리 얻었다 해도

어린 셰프 호통 내가 못 참았을 것

나이 접으니 요리 실력 쑥쑥 늘어


내가 ‘라 베툴라’에 인턴을 온 것은 이곳의 셰프인 프랑코가 58년 개띠라고 알았기 때문이다. 프랑코 셰프가 필자 동기들과 돌체(디저트) 수업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 ICIF 페이스북)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어떤 일을 하는 데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나이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탓에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나이는 거부할 수 없는 중력과 같다. 20대의 선택이 나비처럼 가볍다면 40대 이상의 선택은 멍에를 짊어진 황소처럼 무겁다. 40살을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혹(不惑)이라 한 것도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날마다 짐수레를 끌던 황소에게 유턴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불혹을 넘어 쉰이라는 나이에 이탈리아에 온 것은 나이와 맞설 용기로 충만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용기가 없어 늘 차선을 선택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돌아 돌아서 쉰에 이탈리아까지 오게 됐다.

내가 요리에 눈뜬 건 2006년이다. 요리는 술과 사람과 일에 치이던 기자 생활에서 우연히 발견한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요리하기 전에는 쉬는 날에도 혼자서 폭탄주(그때는 소주가 아니라 양주로 폭탄주를 만들었다)를 만들어 마셨다. 한마디로 자신을 망치고 있었다. 요리는 나를 바꾸었다. 주말마다 제철 재료를 구해 요리했고 혼자 먹기 아까워 사람들을 초대했다. 생활이 달라지니 생각이 달라졌고 당연히 직업을 바꿔야 할까 고민하게 됐다.

그러나 용기가 없었다. 2012년 내가 첫 요리책을 내자 이곳저곳 불러주는 곳이 생겼고, 지상파 방송 출연 요청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요리하는 남자가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하지 않았는데, 바쁜 일상 탓에 대부분 거절했다.

고교 동창이 만든 천연 발효종 빵. 이 멋진 빵에 반해 잠깐 제빵의 길을 고민하기도 했다.

거기다 나는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처럼 외국 유학을 접게 했던 ‘해골 물’을 한국에서는 마시지 못했다. 아는 사람 가운데 음식점 하는 이들이 있어 문을 두드려보았다. 아무리 지인이라도 나이 많고 경험 없는 나를 받아주기 꺼렸다. 미국에 제빵 유학을 다녀온 고교 동창의 빵집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내가 생각했던 또 하나의 대안은 사찰 요리였다. 고기를 즐기지 않는 나는 사찰 음식에 매력을 느꼈다. 유명 스님을 찾아다녔고 그들의 강좌를 주말마다 들었다. 하지만 그런 스님 옆에는 외국 유학을 다녀온 셰프들이 있었다. 나처럼 눈만 높고 손은 낮은 책상물림이 낄 자리는 없었다. 어영부영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갔다.

그랬던 내가 이탈리아에 요리 유학을 올 수 있었던 것은 옆에서 나를 지켜봤던 아내 덕분이다. 머릿속에 온통 요리 생각뿐인 인간이 국가와 사회의 안녕을 걱정하는 근엄한 기사를 쓰고 있으니 답답해 보였던 모양이다. 어느 날 아내가 회사를 그만둘 것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드라마에서 흔히 봤던, 아내가 남편을 떠보려고 던지는 말쯤으로 생각해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남자가장’이라는 구시대적인 통념에서 벗어나지 않은 ‘아재’인 탓도 있었다.

사찰 요리는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진 한국 요리였다. 정관 스님 상차림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내는 그 뒤로도 더 나이 들기 전에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제야 그 말이 아내의 진심임을 깨달았다. 아내의 성원에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올해 3월 초 이탈리아로 요리 유학을 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등 떠밀려 온 이탈리아에서도 나이는 내 발목을 잡았다.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를 졸업했지만 나이 탓에 인턴으로 갈 곳을 쉽게 찾지 못했다. 미슐랭 원스타 해산물 전문 레스토랑에서는 인턴을 거절당하기도 했다.

꼭 남만 탓할 일이 아니었다. 6월 초부터 ‘라 베툴라’에서 내가 인턴을 하는 이유는 이곳의 음식도 음식이지만 셰프의 나이에도 있다. 난 이 레스토랑 셰프인 프랑코가 58년 개띠라고 알고 있었다. ‘셰프가 그 정도 나이면 내가 거기서 빡빡 굴러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민증을 까보니’ 셰프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다. 100㎏이 넘는 거구에 산타클로스처럼 수염을 기른 그를 나보다 어리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에 주방 서열 2위의 수셰프(부주방장) 누만은 조카뻘인 27살이었다. 한국에서처럼 나이만 따지다 나이의 덫에 걸린 것이다.

새우는 많으면 하루에 1천여 마리 껍질을 까보았고 소고기 튀김은 300개까지 말아봤다. 이렇게 많은 양을 하지만 조금이라도 늦어질 것 같으면 “수비토!”(‘빨리’의 이탈리아말)라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러나 두 달의 인턴 생활은 나를 괴롭히던 나이를 잊게 하기 충분했다. 존댓말이 거의 없는 이탈리아말을 쓰는 주방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셰프는 나에게 이것저것 시킬 뿐 아니라 수시로 호통을 친다. 나는 그에게 5살 위 형님이 아니라 그저 요리를 막 시작한 풋내기에 불과했다. 수셰프는 셰프보다 더 일중독이다. 두 사람은 날마다 끊임없이 나에게 숨 돌릴 틈 주지 않고 지시했다. 나는 팥쥐와 계모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콩쥐처럼 일해야 했다. 하루 종일 레스토랑에만 있는데도 하루에 1만 보 이상을 걷는다.

요리에 쓰이는 소스와 속 채움 재료들. 30여 종이 넘는 소스 등은 대부분 내가 기초 작업을 한다. 덕분에 하루 종일 레스토랑에만 있는데도 하루 1만 보 이상을 걷는다.

몸은 고되지만 이렇게 정신없는 주방이 즐겁다. 이탈리아에서 먹어본 본토 음식은 한국에서 먹었던 것과 아주 달랐다. 셰프의 레시피를 보면 ‘정말 이게 전부야’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단순했다. 레시피는 간단하지만 풍미는 강렬하다. 거의 날마다 소스를 만들다보니 한국에서는 알 수 없었던 서양 요리의 핵심인 소스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어졌다. 고질적 문제였던 칼질도 1㎜ 정사각 썰기가 될 만큼 늘었다. 아직은 서툴지만 전채요리를 만들어 손님상에 올리기도 한다.

프랑코 셰프가 직원용 식사로 만든 생면 파스타.

두 달 만의 변화는 나 자신조차 놀랄 정도다. 만약 한국에서 지금 여기 이탈리아 레스토랑과 비슷하게 나보다 어린 셰프와 수셰프에게 일을 배웠다면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결과적으로 나이 때문에 한국에서 레스토랑 주방에 서지 못했던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6·17살의 고등학생도 유명 레스토랑 인턴을 한 달씩 하곤 한다. 쉰에 인턴을 하는 나는 그들에 견주면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다. 그러나 나는 조바심 내지 않는다. 어차피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용기라는 밑천이 부족해 돌고 도는 완행열차를 타야 했다. 늦깎이 요리 유학이 불안했지만, 막상 이탈리아에 와보니 느릿느릿 가는 열차가 오히려 내 인생에 묘미를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풋내기 인턴인 내가 나이를 숫자쯤으로 생각하게 된 까닭이다.

<독학 파스타>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