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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에서 발원한 흥덕동천
경성제대 들어선 뒤 ‘대학천’으로 불려
신군부 세력 1985년 ‘대학로’라 명명
주말마다 차 없는 축제의 마당
여운형 암살된 혜화동로터리에서
“역사의 공소시효는 없다” 다짐
오늘은 조선 시대 학문의 전당인 성균관을 설치하고, ‘가르침을 높이 여긴다’는 뜻으로 ‘숭교방’(崇敎坊)이라 일렀던 명륜동과 혜화동 일대를 돌아보고자 한다.
숭교방의 자취는 ‘동숭동’이라는 지명에 살아 있다.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동숭동은 숭교방의 동쪽이란 의미다. 그 옆에 옛 숭교방 자리였던 명륜동은 성균관 유학생들의 강학당(오늘날 강의실)인 ‘명륜당’에서 유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 아래 종로 일대 역시 광장시장이 있는 예지동을 비롯해 인의동, 효제동, 충신동 등 유학의 큰가르침인 ‘인의예지효제충신’에서 따온 것이다. 그야말로 조선의 법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나라의 떠오르는 별들이 더 많은 학문을 배우도록 지명을 꾸린 것이다. 조선의 통치 철학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새 세대를 귀중히 여기는 조선을 상상해보며 혜화역을 출발점 삼아 걸어보자. 먼저 현 대학로는 북악산에서 흘러내려와 청계천까지 흘러들어갔던 흥덕동천이란 물길이었지만 1926년 이곳에 경성제대가 들어서면서 대학천이 되었다. 그 뒤 19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고, 1977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전히 복개되었다. 1979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집권 후 3S 정책의 하나로 통행금지 해제, 교복 자율화, 두발 자유화, 국풍 행사, 외국여행 자유화, 프로야구 출범 등과 함께 1985년 이곳을 ‘대학로’라 했다. 그리고 대학로는 한동안 주말이면 ‘차 없는 거리’로 축제의 마당이 되었다. 이곳을 지나는 지하철 4호선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역사가 있다. 당고개역에서 우측통행으로 달리다가 남태령역과 선바위역 사이에서 좌측통행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왜 이런 불편을 만든 것일까? 씁쓸하지만 이 역시 외세와 관련된 것이다. 본래 일제강점기 철도, 차도, 보도 등 모든 것은 좌측통행이었다. 그런데 해방 후 우측통행을 원칙으로 한 미군이 들어오면서 이승만 정권은 일단 급한 대로 차도만 미군의 편의에 따라 우측통행으로 바꾸었다. 그 후 지하철 2호선부터는 우측통행의 철로로 건설했는데, 철도청 관할의 국철은 좌측통행이었던 탓에 이 둘을 연결한 서울교통공사 관할의 지하철에서는 이런 문제가 생겼다. 이 일대가 겪어온 이런 시대 변화를 상상하며 이제 길을 떠나도록 하자. 1975년 서울대가 이전한 후 마로니에 나무 3그루가 있던 이 일대는 마로니에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이곳엔 건축가 김수근의 벽돌 건축물들이 대학로 건축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아르코미술관(1979년), 아르코예술극장(1981년), 샘터 사옥(1979년), 한국국제협력단(1979년, 철거)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혜화역 3번 출구 인근의 학림다방(1956년)은 우리나라 학생운동사에 남은 오래된 공간이다. 본격적인 노선 대결이라 할 수 있는 1980년의 학림-무림 논쟁에서 학림을 대표하는 조직인 전민학련이 첫 모임을 가졌던 곳이라 전해진다. 학생운동은 이후 1980년대 백가쟁명의 노선 대립이 있었고, 그 과정에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냈다. 학림다방은 그런 논쟁과 대립이 시작된 곳인 셈이다.
숭교방의 자취는 ‘동숭동’이라는 지명에 살아 있다.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동숭동은 숭교방의 동쪽이란 의미다. 그 옆에 옛 숭교방 자리였던 명륜동은 성균관 유학생들의 강학당(오늘날 강의실)인 ‘명륜당’에서 유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 아래 종로 일대 역시 광장시장이 있는 예지동을 비롯해 인의동, 효제동, 충신동 등 유학의 큰가르침인 ‘인의예지효제충신’에서 따온 것이다. 그야말로 조선의 법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나라의 떠오르는 별들이 더 많은 학문을 배우도록 지명을 꾸린 것이다. 조선의 통치 철학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새 세대를 귀중히 여기는 조선을 상상해보며 혜화역을 출발점 삼아 걸어보자. 먼저 현 대학로는 북악산에서 흘러내려와 청계천까지 흘러들어갔던 흥덕동천이란 물길이었지만 1926년 이곳에 경성제대가 들어서면서 대학천이 되었다. 그 뒤 19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고, 1977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전히 복개되었다. 1979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집권 후 3S 정책의 하나로 통행금지 해제, 교복 자율화, 두발 자유화, 국풍 행사, 외국여행 자유화, 프로야구 출범 등과 함께 1985년 이곳을 ‘대학로’라 했다. 그리고 대학로는 한동안 주말이면 ‘차 없는 거리’로 축제의 마당이 되었다. 이곳을 지나는 지하철 4호선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역사가 있다. 당고개역에서 우측통행으로 달리다가 남태령역과 선바위역 사이에서 좌측통행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왜 이런 불편을 만든 것일까? 씁쓸하지만 이 역시 외세와 관련된 것이다. 본래 일제강점기 철도, 차도, 보도 등 모든 것은 좌측통행이었다. 그런데 해방 후 우측통행을 원칙으로 한 미군이 들어오면서 이승만 정권은 일단 급한 대로 차도만 미군의 편의에 따라 우측통행으로 바꾸었다. 그 후 지하철 2호선부터는 우측통행의 철로로 건설했는데, 철도청 관할의 국철은 좌측통행이었던 탓에 이 둘을 연결한 서울교통공사 관할의 지하철에서는 이런 문제가 생겼다. 이 일대가 겪어온 이런 시대 변화를 상상하며 이제 길을 떠나도록 하자. 1975년 서울대가 이전한 후 마로니에 나무 3그루가 있던 이 일대는 마로니에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이곳엔 건축가 김수근의 벽돌 건축물들이 대학로 건축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아르코미술관(1979년), 아르코예술극장(1981년), 샘터 사옥(1979년), 한국국제협력단(1979년, 철거)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혜화역 3번 출구 인근의 학림다방(1956년)은 우리나라 학생운동사에 남은 오래된 공간이다. 본격적인 노선 대결이라 할 수 있는 1980년의 학림-무림 논쟁에서 학림을 대표하는 조직인 전민학련이 첫 모임을 가졌던 곳이라 전해진다. 학생운동은 이후 1980년대 백가쟁명의 노선 대립이 있었고, 그 과정에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냈다. 학림다방은 그런 논쟁과 대립이 시작된 곳인 셈이다.
80년대 학생운동 학림-무림 논쟁의 이름을 제공해준 학림다방.
이제 혜화역을 떠나 옛 물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보자. 옛 물길은 조선의 문묘인 성균관 앞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각각 동반수와 서반수라 했다. 성균관에 들어서면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있고, 그 뒤로는 교육을 담당한 명륜당이 있다. 여기서 조선 건축물의 위계질서를 상상해본다.
각 건물의 당호에는 끝에 각각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전당합각 제헌루정’(殿堂闔閣 齋軒樓亭)을 갖게 되는데, 이중 ‘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교태전이나 절의 대웅전처럼 왕과 왕비, 부처 등과 관련된 건물이거나 대성전처럼 공자를 모시는 건물에만 붙는 당호다. 이어 위계에 따라 명륜당의 ‘당’과 이후 ‘합각 제헌루정’이 뒤를 잇는다.
성균관을 나와 서울과학고 쪽으로 가면 송시열이 썼다는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희처럼 자신의 소신을 지키겠다는 뜻)이라 쓰인 각자바위가 있다. 바위는 지금도 이 일대가 조선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집터임을 알린다.
이제 혜화동길로 내려오면 1910년 설립된 오랜 역사의 혜화초등학교 동쪽으로는 1930년쯤 지은 김상협 전 국무총리의 집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1937년에 지은 장면 부총리의 집이 있다. 두 집 중 장면 가옥은 일반에게 공개된다. 또 장면 가옥 서쪽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96년부터 대통령으로 당선된 2002년까지 살던 집이 있다.
한편 혜화동로터리 쪽 명륜아남아파트 자리는 1920년부터 현 서울대 상대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가 1938년까지 있었다. 그 후로는 현 고려대 의대의 뿌리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1966년 우석대학교로 개명)가 있다가 1971년 고려대와 통합했다. 그 후 1991년 현재의 안암동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오늘 산책의 마지막 코스는 혜화동로터리다. 이곳은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인 여운형이 암살된 곳이다. 세월이 흘러 도로는 확장되었지만 기본 모습은 여전히 그대로다. 암살범 한지근의 트럭이 서 있던 파출소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여운형의 암살 배후는 밝혀지지 못한 채 단독범행으로 끝났다. 하지만 45년이 흐른 1992년 5월 월간 <말>이 “여운형 암살 배후에 노덕술이 있었다”는 당시 암살범 4인의 최초 고백을 실었다. 이들의 증언대로라면 암살범 한지근 외에 제2의 저격수가 있었던 셈이다. 단독범이 아니라 조직적인 집단테러였다. 역사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진리를 생각하며 오늘의 산책길을 정리한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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