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술이 아닌 음식의 씨줄과 날줄’ 깨달아

‘와인은 술이 아닌 음식의 씨줄과 날줄’ 깨달아 ⑫ 이탈리아 와인

등록 : 2019-08-2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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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식 나와도 ‘소폭’만 먹던 취향

이탈리아 와인 맛보며 확 바뀌어

400종 포도가 만들어낸 갖가지 맛

각각 다른 음식들과 ‘절친’ 사이

40시간 넘는 요리학교 와인 수업 때

이탈리아 각 지역 와인 시음 진행

‘와인-음식’ 궁합, 향과 맛으로 측정

음식 맞는 와인 선택 방법에 눈 떠


ICIF의 와인 강의는 이탈리아의 다양한 와인을 소개하고 음식과 조화까지 체계적으로 설명해 와인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됐다. 필자가 ICIF 와인 수업 시간에 시음하는 모습이다. 시음 와인은 리스 네리스 콘피니 (2009). ICIF 누리집

이탈리아 음식은 오감을 자극한다. 국토의 길이가 남북으로 1천㎞에 이르며 해안선이 7천㎞가 넘어 식재료가 다양하다. 그리고 오랫동안 20개의 도시국가로 독립돼 있어 지역마다 식재료와 조리법이 다르다. 여기에 고대 로마 시대부터 아시아·아프리카와 유럽의 다리 구실을 해 이국적인 식재료를 많이 쓴다. 아프리카 닭인 뿔닭을 즐겨 먹는가 하면 중국 향신료인 팔각을 사용해 돼지고기를 조리하는 셰프를 흔히 볼 수 있다.

수많은 이탈리아 음식 가운데 내 호기심을 가장 자극했던 것은 적포도주(레드와인)였다. 이탈리아에 오기 전까지 적포도주에 별 관심이 없었다. ‘저렴한’ 입맛 탓에 맛도 잘 모르겠고, 먹을 만한 적포도주는 값이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가격 대비 효과’를 뜻하는 가성비에 민감한 월급쟁이였던 나는 굳이 포도주를 마셔야 한다면 백포도주(화이트 와인)를 마셨다(내가 가장 즐겼던 술은 낮은 가격에 높은 효과를 보장하는 고량주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구대륙의 적포도주는 경계 대상이었다. 미국이나 호주의 포도주와 달리 바디감도 약하고 향기도 별로인데 비싼 탓이었다. 적포도주를 마셔야 한다면 묵직한 맛에 합리적인 가격인 미국의 ‘진판델’이나 호주의 ‘쉬라’를 선택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이런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는 이탈리아 포도주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피에몬테주에 자리잡고 있다. 학교가 있는 아스티와 옆 도시인 알바는 프랑스의 부르고뉴·보르도와 함께 세계 3대 적포도주 산지다. 이 지역은 ‘네비올로’ ‘바르베라’라는 포도 품종이 유명하다.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 뒷산에 있는 와이너리 카스텔에서 생산하는 바르베라 다스티 수페리오레파숨. 상큼한 맛이 일품이다.

네비올로는 ‘타닌의 채찍’이라고 할 만큼 떫은맛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를 10년 이상 장기보관하면 부드러워지면서 독특한 향기와 맛을 가진 포도주로 변신한다. 오래 숙성된 네비올로로 만든 바롤로(지역 이름인데, 포도주 이름이 됐다)는 이탈리아에서도 비싸다. 그래서 몇 번밖에 못 마셔봤지만 향기와 맛이 놀라웠다. 잘 익은 붉은 과일 맛이나 바닐라와 같은 향신료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적포도주에 왜 사람들이 지갑을 여는지 알 수 있었다.

바르베라는 과일 맛과 꽃향기가 특징인데, 숙성을 오래 하지 않아도 상큼한 맛이 난다. 값은 바롤로에 견줘 싸다. 퇴직금을 털어서 이탈리아에 유학 온 내 주머니 사정은 늘 빠듯했다. 그래서 비싼 바롤로 대신 바르베라를 많이 마셨다. 그러나 오래 숙성되면 바롤로만큼은 아니지만 풍부한 맛을 내는 저력도 있는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지난 5월 알바 시에 있는 와이너리 다밀라노에서 빈티지가 다른 3병의 바롤로를 시음했다. ‘타닌의 채찍’이란 말을 들을 만큼 날카로운 바롤로는 장기 숙성이 되면 깊고 부드러운 맛이 난다.

바르베라를 많이 마셨던 것은 연고주의 탓도 있다. 바르베라의 주요 산지가 학교가 있는 아스티다. 네비올로는 아스티 바로 옆 도시인 알바와 쿠네오 등에서 주로 생산한다. 그런데 알바와 아스티는 사이가 좋지 않다. 아스티에서 생산되는 송로버섯인 트러플이 알바 이름으로 팔리는 탓이다. 트러플은 독특한 향기 덕에 ‘땅속의 다이아몬드’란 별명이 있을 만큼 비싼 식재료다. 우리나라 봄철에 대게가 경북 울진에서도 많이 잡히는데 대부분 옆 동네인 ‘영덕대게’로 팔리는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나는 학교 다닐 때 매일 아침저녁으로 학교 뒷산에 있는 바르베라가 자라는 포도밭을 운동 삼아 올랐기 때문에 바르베라가 누이처럼 살갑다.

이탈리아에는 네비올로와 바르베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에는 포도 품종이 400종이 넘는다고 한다. 네비올로나 바르베라 같은 유명한 것 말고도 처음 먹어보는 품종도 많았다. ‘프리미티보’는 값이 싸지만 진한 맛이 일품이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한국에서 즐겨 먹던 미국의 진판델과 같은 품종이었다. 미국 진판델보다 바디감은 약하지만 더 부드럽다.

이탈리아 고추인 페페론치니의 고장으로 유명한 칼라브리아의 ‘치로’ 포도주 맛도 새로웠다. 시칠리아의 ‘네로 다볼라’도 맛과 향이 근사했다. ‘슈퍼토스카나’까지는 아니었지만 ‘산지오베제’로 유명한 토스카나 포도주도 10유로(1만3500원)면 충분히 괜찮을 걸 고를 수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포도 품종은 포도주에 대한 경험의 폭을 넓혀주었다.

이탈리아 고추인 페페론치니 생산지로 유명한 칼라브리아 주의 치로 와인. 매콤한 맛을 기대했는데 부드럽고 달콤했다.

시칠리아의 포도 품종인 네로 다볼라로 만들었다. 값도 싸고 진한 초콜릿 맛이 난다.

학교 수업도 포도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 수업은 오전과 오후로 나뉘는데 오전·오후 각각 3~4시간씩 연강을 한다. 포도주 수업은 오전·오후 모두 12번이나 있었다. 시간으로만 따지면 40시간 이상이다. 요리 수업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시간이었다. 그만큼 포도주가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수업의 내용도 알찼는데 이탈리아 각 지역의 포도주를 소개하면서 이를 시음할 수 있게 했다. 덕분에 여러 지역의 적·백 포도주는 물론 ‘스푸만테’(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나 주정 강화 포도주를 마셔볼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포도주와 음식의 궁합 수업이었다. 학교에서는 이탈리아소믈리아협회의 ‘아비나멘토’라는 방법론으로 이를 설명했다. 아비나멘토는 ‘연결하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인 ‘abbinare’(아비나레)에서 온 것으로 음식과 포도주를 대칭으로 놓고 향과 맛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이용해 음식과 포도주의 조화를 측정한다.

예를 들어 고기의 지방은 타닌에, 음식 고유의 단맛(설탕 맛을 제외한 과일이나 채소 자체의 단맛)은 포도주의 산도에 각각 대응한다. 또 음식의 매운맛 등 향신료 향은 포도주 향의 강도와 지속성에 대응한다. 이 표를 보면 양념이 강하고 기름기 많은 소고기나 양고기 요리에, 숙성이 잘돼 향이 강하고 타닌이 적당한 적포도주가 잘 어울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수업 시간 중에 소고기·생선·치즈 요리와 함께 각종 포도주를 시음하기도 했다. 수업 시간에 술을 먹는 해방감도 괜찮았지만 음식과 포도주의 미묘한 균형감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느낄 수 있어 더 좋았다. 치즈 가루를 음식에 뿌리느냐 마느냐에 따라 방금까지 마시던 포도주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한국 음식인 해물파전으로도 실험했는데 초간장을 찍어 먹느냐 마느냐에 따라 백포도주의 맛이 뚜렷하게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토리노에서 가장 큰 시장인 포르타 팔라조에 있는 와인숍 내부 모습. 10유로 미만의 와인이 대부분이다. 내 단골 와인 구입처다.

이탈리아에 오기 전까지 나는 포도주는 그저 많이 마셔보는 게 최고라고 여겼다. 고리타분한 다다익선의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편견 탓에 적포도주를 신 포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겪어보니 포도주는 이탈리아 음식과 씨줄·날줄이 되어 음식 문화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술과 음식이 동시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왔다. 한국에서 소주나 청주 그리고 중국에서 고량주도 분명 이런 역할을 해왔으리라.

하지만 나에게 술은 음식보다는 스트레스를 풀고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약물로 더 친숙하다. 어떤 음식이 나오더라도 ‘소폭’(소주를 섞어 만든 폭탄주)을 만들어 마셨던 내 오래된 취향을 이제는 고쳐볼 생각이다.

글·사진 권은중 <독학파스타>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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