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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주변은 적·백 포도주 생산지
날마다 산책하며 포도나무 성장 지켜봐
포도밭에 딸린 동네 와이너리에선
멀리 보이는 알프스가 와인 맛 높여
이웃 도시 크고 화려한 와이너리
나름 맛은 있지만 운치는 사라져
“분위기가 와인 맛을 결정한다”
작은 와이너리가 다시금 깨닫게 해
와이너리 ‘카슬렛’은 ICIF 기숙사 뒤 언덕 꼭대기에 있다. 이 언덕에서는 알프스를 볼 수 있다.(카슬렛 누리집 제공)
나는 어릴 때부터 아웃사이더(이른바 ‘아싸’) 기질이 풍부했다. 본질과 거리가 멀수록 더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겠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국·영·수보다는 음·미·체가 좋았다. 물론 음·미·체도 학교 수업과 관련 없는 비공식적인 게 더 좋았다.
가령 체육 수업의 육상이나 구기보다는 그냥 고무공을 가지고 친구들과 하는 ‘짬뽕’(방망이나 야구 글러브 없이 손으로만 하는 야구)이 좋았고 수채화나 데생보다는 만화나 흙장난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뭔가 딱 부러지고 틀에 박힌 것을 싫어했던 듯하다.
이탈리아 요리 유학을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인을 위한 요리학교’(ICIF) 수업이 이내 답답해졌다. 졸업 후 인턴을 할 때, 레스토랑에서 손님들이 가장 많이 주문하는 음식은 육회(바투타)와 소 척수 볶음(필로네)이었다. 그만큼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음식 문화는 고기 중심이었고 학교 교과과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산물 요리를 하고 싶은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토끼 간·닭볏 따위를 다루는 레시피도 있었다.
그래서 국·영·수라고 할 수 있는 요리 수업보다는 음·미·체 격인 그 외의 수업들이 때로는 더 기다려졌다. 포도주(와인) 수업이 더 그랬다. 학교가 있던 북부 이탈리아 코스틸리올레는 적포도주의 원료인 바르베라와 백포도주의 원료인 모스카토 생산지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나는 이곳을 산책했고 포도나무가 커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카슬렛의 시음 와인들. 이곳에서 시음은 무료다.
포도밭이 있으니 주변에 와이너리(포도주 양조장)도 많았다. 이 가운데 내가 주로 다니던 산책로에 있던 ‘카슬렛’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집은 한여름에도 눈이 안 녹는 알프스를 볼 수 있는 기숙사 뒤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기숙사 뒤 언덕은 3월에도 낮에는 반소매를 입을 만큼 더웠고 4월에도 아침저녁으로는 입김이 날 만큼 쌀쌀했다. 변화무쌍한 날씨에도 포도나무는 무럭무럭 자랐다. 이런 날씨에 어떤 포도알이 맺히고 어떤 맛의 와인이 빚어질지 너무 궁금했다. 당연히 카슬렛은 내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방문한 와이너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와이너리는 너무 작았다. 그래서 이 집이 그렇게 유명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10여 년 전에 프랑스 보르도의 5대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 가운데 한 곳을 가봤다. 8월에 갔는데 푸른 포도밭에 덕수궁의 석조전을 닮은 성이 서 있었다. 규모도 생각보다 컸고 모든 것이 잘 정리돼 있었다. 깔끔하고 우아했지만 친근함은 없었다. 포도밭 사이에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라고 쓰여 있는 하마비가 숨어 있을 듯했다.
학교 뒷산의 카슬렛은 그 보르도 와이너리와 대척점에 있었다. 작지만 정겹고 아기자기했다. 하마비 대신 방문객끼리 놀 수 있도록 멍석이 깔린 듯한 느낌이었다. 실제 우리(요리학교 동기들)를 맞았던 여주인은 무려 와인 6병을 내주고 잠시 사라졌다. 우리는 이 와인을 신나게 마셨다. 무료였다. 안주라고 해야 치즈와 과자가 전부였지만 와인 맛이 좋았다. 와이너리 창 너머로 포도밭 풍경이 펼쳐졌다. 그 밭 너머로 산들이 보였고 그 산들은 눈 덮인 알프스로 이어졌다.
학교 주변의 와이너리 경험은 대부분 유쾌했다. 두 번째 방문한 와이너리 ‘보에리 비니’는 일요일에 학교 근처 성당에서 미사를 다녀온 뒤 신자들과 함께 갔다. 그날 100명이 넘는 신자 가운데 동양인은 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탈리아 교우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몇몇 신자끼리 미사 후 인근 와이너리에서 하는 점심에 초청도 해주었다. 와이너리에서 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인 ‘스푸만테’를 빵과 살라미(이탈리아 햄)를 곁들여 함께 마셨다. 마치 한국 성당에서 미사를 끝내고 잔치국수를 먹는 것처럼 푸근한 느낌을 받았다.
‘보에리 비니’에서 성당 미사를 끝내고 온 주민이 스푸만테를 마시고 있다. 부엌에서는 와이너리 가족들이 점심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4월 포데리 데이 브리키 아스티지아니 관계자가 스푸만테 만드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학교의 현장학습 차원에서 방문한 와이너리 ‘포데리 데이 브리키 아스티지아니’는 스푸만테의 제작 방법을 볼 수 있어 유익했다. 스푸만테는 1년쯤 숙성한 백포도주를 개별 포도주병에 담은 뒤 병 속에서 2차 발효를 일으켜 탄산가스를 발생시키고 이 가스의 힘으로 내부 침전물을 빼내고 코르크 마개를 끼우는 과정을 거친다.
책으로만 배웠던 이 복잡한 과정을 와이너리 관계자의 도움으로 현장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거기다 이날은 오전·오후 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동기들은 이곳의 스푸만테를 포함해 모든 와인을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학교에서 전세버스를 제공해 기숙사로 돌아가는 차편 걱정이 없었다. 우리는 모처럼 ‘주중 낮술’을 즐길 수 있었다.
정겹고 푸근했던 아스티의 와이너리와 달리 바로 옆 도시인 알바의 와이너리는 조금 달랐다. 알바는 세계 3대 적포도주라 알려진 ‘바롤로’(도시 이름이자 포도주 이름)의 주 생산지다. 바롤로의 랑게 지역에서 생산하는 와인이 유명하다. 랑게 언덕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5월 초 주말을 이용해 랑게의 와이너리 두 곳을 견학했다. 프랑스 보르도의 와이너리만큼 크고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그 명성만큼 랑게의 와이너리들은 아스티의 와이너리보다 규모가 크고 매우 화려했다.
다밀라노의 와인 저장고. 끝없이 놓인 오크통이 바롤로의 인기를 짐작게 한다.
일단 포도밭부터 달랐다. 코스틸리올레의 포도밭 언덕이 완만한 구릉이라면 랑게 포도밭 언덕은 더 가팔랐다. 산이나 고개에 가까웠다. 코스틸리올레는 포도밭과 숲과 집이 조화를 이룬 목가적 풍경이었다면 랑게는 포도밭만 끝없이 펼쳐져 풍광의 재미가 덜했다.
거기다 아스티의 와이너리가 시음이 공짜였다면 바롤로는 시음에도 돈을 내야 했다. ‘노 네임’이라는 와인으로 유명한 ‘보르고뇨’는 시음도, 와이너리 견학도 모두 돈을 받았다. 한 잔에 20유로(약 2만6천원)를 내고 시음한 보르고뇨의 2016년 바롤로는 숙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맛이 없었다. 또 와이너리를 미술관처럼 잘 꾸며놓았지만 바롤로 시 중심에 있어 포도밭도 볼 수 없어 답답했다.
같은 랑게의 와이너리인 ‘다밀라노’는 견학은 무료였지만 시음에 20유로를 받았다. 그래도 이곳의 시음에서는 3가지 다른 빈티지 바롤로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다. 2007년 바롤로 리스테는 환상적인 숙성의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포도주 맛이 모두 다르듯 포도주를 만드는 와이너리 역시 제각각이다. 또 힘들게 찾아간 와이너리에서 마시는 포도주가 더 맛있는 것도 아니다. 내 짧은 경험을 놓고 말한다면 와이너리에서 중요한 것은 양조 과학이나 포도주의 명성이 아니라 포도밭 풍광 같은 주변 환경 그리고 와이너리 사람들과의 교감이다. 내가 랑게 언덕에 있는 유명 와이너리보다 학교 근처의 와이너리에 더 끌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유명하고 화려한 와이너리가 아니라 작고 정겨운 시골의 와이너리를 좀더 방문해보고 싶다. 카베르네 소비뇽·네비올로(바롤로를 만드는 품종)·산지오베제같이 널리 알려진 품종이 아니라 아스티의 바르베라처럼 그 지역 특유의 품종을 사용하는 와이너리면 좋겠다. 국·영·수보다는 음·미·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버릇은 이탈리아에서도 여전할 듯하다.
글·사진 권은중 <독학 파스타>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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