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꿈꾸었던 대한제국의 좌절 흔적 곳곳에

유영호의 우리 동네 어슬렁 산책ㅣ중구 정동 일대

등록 : 2019-09-1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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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대등한 제국’ 만들려던 고종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단 지어

영국·러시아 등 각국 공사관 덕에

서울 최초의 대중적 답사거리 되기도

일제, 환구단 철거 뒤 호텔 짓고

덕수궁도 도로 확대 따라 축소돼

을사늑약의 현장인 중명전만은

그대로 남아 슬픈 역사 전하고 있어


중구 정동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를 이곳에 조성하며 그 이름을 정릉이라 하였기에 붙은 이름이다. 결국 사대문 안에는 묘를 쓸 수 없게 한 원칙을 가장 먼저 위반한 셈이다. 그 위치는 현 영국대사관이나 경향신문 문화체육관 근처로 추정되지만 문인석이 미국대사관저 영내에서 발견되어 정릉 최초의 위치를 그곳으로 보기도 한다. 그후 신덕왕후의 묘는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아들 태종이 즉위하면서 지금의 정릉동으로 이장되었다. 이때 태종은 정릉의 석물을 청계천 광통교의 교각(다릿발) 등으로 사용하여 사람들이 밟고 가도록 만들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신덕왕후 강씨와 사이가 좋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나 이곳 정동은 우리 현대사의 슬픈 역사가 쓰인 장소로 또다시 우리에게 나타났다. 고종이 당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자주를 꿈꾸며 대한제국을 설립하고 근대화 계획을 추진했지만 끝내 좌절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당시 이 일대는 미국공사관을 시작으로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각국 공사관이 자리잡았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독특한 거리 풍경을 만들며 서울의 도시 답사로는 가장 최초로 대중화된 곳이기도 하다.

오늘 산책의 출발은 1897년 대한제국이 시작된 환구단에서 하기로 한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대한제국이 황제국임을 드러내주는 장소이다.

대한제국은 겨우 몇 년도 못 가 러일전쟁, 미국과 일제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그리고 을사늑약을 거치며 외세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이후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간선철도가 완공되면서 경성을 통과하는 유동인구가 많아졌다. 한편 경술국치 후 일제는 자신들이 통치를 잘하고 있음을 선전하기 위해 ‘시정 오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1915)를 열고 이 행사의 관람객 숙소로 사용하려고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을 철거하고 바로 그 자리에 북유럽 양식의 조선철도호텔을 세웠다. 이 공사로 부속건물인 황궁우, 석고단, 석조대문 그리고 호텔의 입구로 사용한 환구단 정문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60년 말 지금의 조선호텔이 신축되는 과정에서 정문조차 사라졌다. 그러다 2007년 이 환구단 정문이 강북구 우이동 한 시내버스 차고지 입구로 이용되고 있음이 확인돼 2009년 비록 제자리는 아니지만 현 위치로 옮겨졌다.

한편, 길 건너 덕수궁의 정문은 본래 지금의 대한문이 아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인화문이었다. 왜냐면 제왕남면(임금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를 펴야 한다)의 원칙에 따라 남쪽으로 궁궐의 정문을 설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덕수궁 돌담길로 변했고, 대한문이 정문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문도 일제강점기 이후 태평로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여러 번 뒤로 물려진 것이다.

돌담길을 따라 걸어 오르면 이내 서울시립미술관이 나오는데 이곳은 1928년에 지은 경성재판소 건물이다. 따라서 이곳은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사법부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수많은 연인의 데이트 장소지만 흔히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나오게 된 것도 이곳에 있었던 가정법원 때문이라고 한다. 이혼 판결을 받고 나올 때는 따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정동길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이 일대는 정동제일교회가 있으며 그 뒤는 1885년 8월 3일 아펜젤러가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옛 배재학당이 있던 곳이다. 배재학당 터에는 현재 러시아대사관이 들어서 있고, 제일교회는 사적 256호로 문화재예배당이 되었다. 하지만 배재학당 건물 중 일부가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남아 그 흔적을 전하고 있다. 한편 을사늑약의 현장인 중명전이 그대로 남아 우리의 슬픈 역사를 전하고 있다.

아관파천의 현장, 러시아공사관 터.

덕수궁에 딸린 서양식 전각인 중명전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는 미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가 있다. 이곳 건물이 독특한 것은 다른 나라의 대사관저와 달리 우리의 전통 양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2년 옛 대사관저가 무너질 뻔하자 이 기회에 그동안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양옥 건물로 신축하려고 했으나 당시 주한 미대사였던 필립 하비브가 한옥을 고집하면서 여전히 한옥 건물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 미대사관저 뒤편으로는 영국대사관에서 러시아대사관까지 소위 ‘고종의 길’이 조성되었다. 이 길은 1896년 을미사변을 겪고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아관파천의 길로 추정되는 길이다. 일국의 왕이 외세를 피해 또 다른 외세로 피신했다는 것은 참으로 치욕스러운 역사다. 그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자고 서울시에서 최근 이 길을 조성하였다. 당연히 이 길의 끝은 아관, 즉 러시아공사관이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공사관의 탑 부분만 남아 있다.

그런데 이 고종의 길 북쪽으로 커다란 빈터가 있는데 이곳은 경기여고가 있던 자리며, 그 전에는 이곳 역시 덕수궁의 일부로 선원전(어진을 모신 곳), 흥덕전(왕과 왕비의 혼백을 모신 곳) 등 여러 전각이 있던 자리다. 미국은 광화문 대사관과 종로구 송현동 관사를 이곳으로 옮기려 하였지만 역사 유적지 훼손을 염려한 시민들의 반발에 결국 포기하고 평택으로 이전하게 될 용산 미군기지의 일부인 캠프 코이너 터에 들어서기로 했다.

러시아공사관 터를 내려오면 이화여고가 있는데 그 영문 표기는 ‘Ehwa girls’ high school’이지만 이화여대는 ‘girls’가 아닌 ‘Womans’ University’로 표기한다. 즉 문법에 맞는 ‘Women’s’가 아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화여대는 개개인을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화학당 설립 후 1년 만에 처음 입학한 학생이 딱 한 명, 즉 단수였기 때문이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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