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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신제도인 파발제의 출발지
금암참·연서역 흔적 속 낭만 느끼며
제비 닮은 기와지붕 아름다움에 취해
박물관 앞 한옥마을을 거닐 수밖에
몇 해 전 아무 생각 없이 놀러갔던 은평한옥마을과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 매년 한두 번씩 찾는 쉼터가 됐다. 은평한옥마을의 첩첩이 겹치고 늘어졌다 치닫는 한옥 기와지붕의 선이 북한산 바위 능선과 잘 어울린다. 그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전망대인 삼각산 전망 뜰이다.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 은평구의 역사와 한옥 이야기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다. 파란 하늘 높고 단풍 물드는 이맘때라서 그 감동이 두 배다.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전망대인 삼각산 전망 뜰에서 본 은평한옥마을과 북한산.
‘한참’과 ‘구파발’의 유래
‘한참 동안을 찾아가지 않은 저 언덕 너머 거리엔~’ 밴드 부활이 부른 가요 ‘사랑할수록’의 첫 대목이다. 그 사랑 참 아프다. 가사 속 주인공이 견디던 시간, ‘한참’의 심리적 시간은 얼마나 더디고 깊게 흘렀을까? 아니면 그 시간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한참’의 물리적 시간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은평구 진관동 은평역사한옥박물관 2층 전시실 바닥에서 ‘한참’의 물리적 시간을 안내하는 글을 보았다. ‘한참’이란 조선시대에 하나의 참(站, 역참)에서 다음 역참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당시 역참과 역참 사이 거리는 20~30리(약 8~12㎞) 정도 됐다고 하니, 그 사이를 이동하는 시간이 꽤 걸렸을 것이다. ‘시간이 상당히 지나는 동안’이라는 뜻의 ‘한참’이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은평구의 한 지명인 ‘구파발’도 역참을 오가던 파발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에 파발 터가 있던 곳에 옛 구(舊) 자를 붙여서 ‘구파발’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조선시대 군사정보 통신제도 중 하나가 파발제였다. 파발은 서로, 북로, 남로 등 세 길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의주로 가는 서로의 첫 번째 역사가 금암참이다. 금암참의 역사는 남아 있지 않지만 구파발이라는 지명과 정조가 글을 지어 세운 ‘금암기적비’가 금암참의 역사를 말해준다. 구파발과 금암기적비는 은평구에 있다.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 은평구의 역사와 한옥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다. 한옥전시실을 따로 두고 있는 것은 박물관이 있는 곳이 한옥마을이기 때문이다. 박물관 2층 전시실 입구 벽에서 ‘의주로 가는 길, 은평의 역과 참’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정면에는 커다란 마패 5개가 걸렸다. 조선시대 은평은 한양에서 개성과 평양을 거쳐 중국을 오가는 길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하나의 관문이었다. 옛 은평의 역사 속으로 박물관 2층 은평역사실 입구는 옛 은평구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은평구의 자연과 사람들 생활을 촬영한 화면 속 사진들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1943년 불이농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머리에 수건을, 아저씨들은 밀짚모자를 썼다. 1957년에 촬영한 사진에 상여를 메고 가는 긴 행렬이 보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노부부 사진은 1950년에 촬영한 것이다. 동선을 따라 더 깊은 은평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조선 중기 김성일의 문집 <학봉집>에 실린 글을 전시했다. ‘삼월 십일에 성을 나와서 연서역을 바라보니 살구꽃이 만발하였다’라는 글에 나오는 연서역이 지금의 은평구에 있었다. 그 옛날 은평구 어느 곳에 살구꽃은 피었고, 그 꽃에 취해 글을 남긴 사람의 흥취가 느껴진다. 연서역은 금암참과 함께 의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살구꽃 핀 은평의 옛 풍경을 생각하는 사이 역참과 역관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 글 앞에 도착했다. 1896년 러시아 사절단에 참가한 김득련은 상해, 동경, 태평양, 대서양, 런던, 베를린, 모스크바, 몽골,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두루 다녔다. 조선시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셈이다. 그가 바로 조선의 대표적인 역관 집안인 우봉 김씨 집안이었다. 우봉 김씨 집안의 묘가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에서 많이 발견됐다.
‘한참 동안을 찾아가지 않은 저 언덕 너머 거리엔~’ 밴드 부활이 부른 가요 ‘사랑할수록’의 첫 대목이다. 그 사랑 참 아프다. 가사 속 주인공이 견디던 시간, ‘한참’의 심리적 시간은 얼마나 더디고 깊게 흘렀을까? 아니면 그 시간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한참’의 물리적 시간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은평구 진관동 은평역사한옥박물관 2층 전시실 바닥에서 ‘한참’의 물리적 시간을 안내하는 글을 보았다. ‘한참’이란 조선시대에 하나의 참(站, 역참)에서 다음 역참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당시 역참과 역참 사이 거리는 20~30리(약 8~12㎞) 정도 됐다고 하니, 그 사이를 이동하는 시간이 꽤 걸렸을 것이다. ‘시간이 상당히 지나는 동안’이라는 뜻의 ‘한참’이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은평구의 한 지명인 ‘구파발’도 역참을 오가던 파발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에 파발 터가 있던 곳에 옛 구(舊) 자를 붙여서 ‘구파발’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조선시대 군사정보 통신제도 중 하나가 파발제였다. 파발은 서로, 북로, 남로 등 세 길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의주로 가는 서로의 첫 번째 역사가 금암참이다. 금암참의 역사는 남아 있지 않지만 구파발이라는 지명과 정조가 글을 지어 세운 ‘금암기적비’가 금암참의 역사를 말해준다. 구파발과 금암기적비는 은평구에 있다.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 은평구의 역사와 한옥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다. 한옥전시실을 따로 두고 있는 것은 박물관이 있는 곳이 한옥마을이기 때문이다. 박물관 2층 전시실 입구 벽에서 ‘의주로 가는 길, 은평의 역과 참’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정면에는 커다란 마패 5개가 걸렸다. 조선시대 은평은 한양에서 개성과 평양을 거쳐 중국을 오가는 길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하나의 관문이었다. 옛 은평의 역사 속으로 박물관 2층 은평역사실 입구는 옛 은평구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은평구의 자연과 사람들 생활을 촬영한 화면 속 사진들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1943년 불이농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머리에 수건을, 아저씨들은 밀짚모자를 썼다. 1957년에 촬영한 사진에 상여를 메고 가는 긴 행렬이 보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노부부 사진은 1950년에 촬영한 것이다. 동선을 따라 더 깊은 은평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조선 중기 김성일의 문집 <학봉집>에 실린 글을 전시했다. ‘삼월 십일에 성을 나와서 연서역을 바라보니 살구꽃이 만발하였다’라는 글에 나오는 연서역이 지금의 은평구에 있었다. 그 옛날 은평구 어느 곳에 살구꽃은 피었고, 그 꽃에 취해 글을 남긴 사람의 흥취가 느껴진다. 연서역은 금암참과 함께 의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살구꽃 핀 은평의 옛 풍경을 생각하는 사이 역참과 역관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 글 앞에 도착했다. 1896년 러시아 사절단에 참가한 김득련은 상해, 동경, 태평양, 대서양, 런던, 베를린, 모스크바, 몽골,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두루 다녔다. 조선시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셈이다. 그가 바로 조선의 대표적인 역관 집안인 우봉 김씨 집안이었다. 우봉 김씨 집안의 묘가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에서 많이 발견됐다.
은평구 조선시대 무덤 출토품.
다음 발길이 머문 곳은 ‘은평에는 왜 무덤이 많을까?’라는 질문과 그 대답이 적힌 안내 글 앞이었다. 은평 뉴타운 개발지역에서 5천여 기에 이르는 조선시대 무덤이 발견됐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랬다. 조선시대에는 한양 도성과 도성 밖 10리까지 금장 지역(매장이 금지된 지역)이었다. 은평구 진관내동과 진관외동은 금장 지역 바로 밖이었으며 무학재와 박석고개 등으로 금장 지역의 경계와 지형적으로도 확실하게 구분됐던 곳이다.
(왼쪽)은평구 조선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은제 어패. (오른쪽)조선 초기 남자들이 사용했던 귀고리. 은으로 만들었으며 알은 수정이다.
많은 무덤에서 출토된 다양한 부장품이 전시됐다. 선과 색이 아름다운 백자병, 청동거울, 금동 장신구, 병 모양 장식, 구슬, 목걸이, 청동반지, 청동손칼, 청동숟가락, 가지 모양 장신구, 분청사기, 백자 등 생활 도자기…. 지금 사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모양과 빛깔이다.
특히 수정으로 알을 만든 은제 귀고리가 눈에 띈다. 조선시대 초기에 남자들이 하고 다녔던 것이다. 은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장신구(은제 어패)는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백성을 보살피라는 뜻에서 임금이 관리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3층 한옥전시실에 전시된 서울 계동 근대 한옥 축소 모형.
한옥마을 속을 거닐다
은평역사실에서 나와 3층 한옥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 양쪽 벽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한옥마을 사진과 안내 글이 줄지어 걸려 있다. 사진을 보며 한옥마을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마을에 대한 설명 글에 이해가 깊어진다.
한옥전시실 한쪽에 있는 화면을 통해 우리의 전통 한옥이 자연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볼 수 있다. 중구 계동 근대 한옥의 축소 모형 앞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없다. 아궁이와 구들을 만들어 놓은 곳에서 발길을 멈추는 사람들은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손가락으로 구들을 가리키며 장작불 때던 옛날이야기를 하는데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해가 곧추서는 여름이면 직사광선을 막고, 기울어 뜨는 겨울이면 햇빛이 방 안까지 들 수 있게 하는 처마에 대한 설명, 여닫거나 들어서 열 수 있는 분합문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에 따라 바람의 지나는 길과 풍경 보는 눈길을 조절하는 구조라는 이야기가 인상 깊다.
한옥을 짓는 방법과 과정에 대한 설명과 한옥을 지을 때 사용하는 도구들을 전시한 공간을 마지막으로 한옥전시실을 나서면 커다란 한옥 미닫이문이 여러 폭 병풍처럼 펼쳐진다.
이어지는 동선은 건물 밖 전망대인 삼각산 전망 뜰로 발길을 인도한다. 은평한옥마을을 한눈에 굽어본다. 첩첩이 겹친 기와지붕의 선이 제비 날개를 닮았다가, 넘실대는 파도가 되거나, 너울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옥전시실에서 받은 감흥이 실제의 한옥이 한 마을을 이룬 풍경 앞에서 더 살아난다.
한문화 너나들이센터.
나도 모르게 발길이 한옥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한옥마을 어느 골목 어귀에 있는 ‘한문화 너나들이센터’도 은평역사한옥박물관과 하나다. 은평구의 옛 모습과 옛사람들의 생활을 담은 ‘추억의 사진전’이 열린다. 2층에는 한복을 빌려 입는 곳과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사진 촬영 공간 한옥 창으로 햇볕이 든다. 천연염색으로 물들인 하늘하늘한 색색의 천이 햇볕을 받아 은은하게 빛난다. 한옥의 창과 자연색 물든 천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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