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릉이를 타고 한강의 ‘오래된 역사’를 느끼다

장태동 여행작가, 따릉이로 한강을 여행하다 ① 한강 남쪽 한강대교~방화대교

등록 : 2020-05-1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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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가 바퀴가 강변 미루나무 지나면

동작동 효사정에서 봤을 조선 때 풍경

68년 폭파되기 전 밤섬 주민 이야기 등

신라 이후 한강 역사 강바람 속 살아나

한강철교를 지나 여의도로 가는 자전거 길. 여의도 강가 수양버들에 연둣빛 물이 올랐다.

한강 둔치 자전거길은 강 북쪽과 남쪽을 다 해 80㎞ 정도다. 한강대교를 기준으로 다리 남단 서쪽과 동쪽, 북단 서쪽과 동쪽 등 네 구간으로 나누어 한강 둔치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이번 자전거 여행길에서는 한강에 있었던 옛 나루와 강마을 이야기,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 등을 알아보고, 늦봄과 초여름에 걸쳐 펼쳐지는 한강과 그 주변 풍경을 그려본다. 먼저 한강대교 남단 동작구 흑석동에서 강서구 방화동 강서습지생태공원까지 다녀왔다.

수양버들이 많았다는 노들나루 주변 한강에는 지금도 바람에 날리는 수양버들이 있다. 줄지어 선 미루나무 아래 일렁이는 밀밭 길에서 추억도 꽃핀다. 가양대교 지나 옛 공암나루터 부근에는 옛이야기 얽힌 두 개의 바위가 증거로 남아 있다. 강가의 펄에서 자란 수양버들 연둣빛 물오른 가지가 강물에 닿을 것 같다. 푸른 자전거가 가는 길이 싱그럽다.



밤나무 마을과 강가의 수양버들

한강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큰 문제는 자전거였다. 7~8년 전에 타던 자전거를 수리하자니 돈이 꽤 들어갈 것 같았다. 문제는 쉽게 해결됐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자전거 대여 제도인 ‘따릉이’가 있었다. 휴대전화에 ‘서울자전거 따릉이’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 대여했다. 잠겨 있던 자전거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한강대교 남단이 자전거 여행의 출발 지점이기 때문에 그 부근에 있는 지하철 9호선 흑석역 1번 출구 앞에 있는 따릉이 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흑석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한강 둔치 자전거길로 내려갔다. 올림픽대로 교각 사이로 한강이 보인다. 강가의 진흙 펄에 한강의 물결이 만든 흔적이 나이테처럼 남았다.

효사정.

자전거길에서 효사정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보였다. 계단 입구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효사정으로 올라갔다.

효사정은 조선시대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 노한의 별서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노한은 삼년상을 치르고 노량진 한강 가에 정자를 짓고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수양버들 낭창거리는 한강 풍경을 굽어보았던 효사정은 당시 빼어난 경치로 유명했다. 신숙주는 효사정 주변 풍경을 시에 담았는데, 시구에 ‘산세가 큰 들 머리에 꿈틀거리며/ 영수(靈秀: 뛰어나고 빼어남)한 기운을 잉태하여/ 어느 때나 아름답다’라고 적고 있다.

효사정에서 본 풍경.

지금의 효사정에서 보는 풍경도 아름답다. 눈앞에 용산 아파트 단지와 빌딩 숲이 있고 멀리 북한산까지 보인다. 굽이치는 한강을 따라 눈을 돌리며 바라보는 풍경이 유장하다. 지금의 효사정은 1993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흑석동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한강신사가 있었다.

흑석동은 고구려 장수왕 때 노량진동, 사당동과 함께 율목군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율목군은 율진군으로 바뀌었다. 율진은 밤나무와 나루터를 뜻한다. 예로부터 노량진, 사당동, 흑석동에는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또 노량진 한강 가 노들나루 주변에는 수양버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흑석동에서 여의도까지 이어지는 한강 둔치 자전거길에서 보면 강가에 수양버들이 낭창거리는 풍경이 보인다.


강물 너울지는 강 언덕에 넘실대는 밀밭

한강철교 아래를 지나 여의도로 접어드는 자전거길에 수양버들 꽃가루가 한창 흩날리고 있었다. 샛강을 따라가다가 여의도로 접어들었다.

여의도 한강공원 백사장은 땅콩밭이었다. 1916년부터 1971년까지 비행장이 있었다. 1922년 안창남이 한국인 최초로 시험비행을 한 곳도 여의도 비행장이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나섰던 권기옥은 1917년 여의도 비행장에서 열린 곡예비행을 보고 공군이 되어 조국 광복에 앞장서겠다고 결심하고 상하이 중국 국민군 항공대에 들어가 항일운동에 전념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원효대교 남단 한강공원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강가에 줄지어 선 수양버들이 바람에 날리는 풍경을 마음에 담고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줄지어 선 미루나무 아래 밀밭이 보였다. 바람에 일렁이는 밀밭과 미루나무 가지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70년대 시골 신작로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신작로의 가로수가 미루나무였다. 산모퉁이를 돌아 머리를 내미는 완행버스는 미루나무 신작로를 따라 먼지를 일으키며 터덜터덜 달렸다. 추억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을 뒤로하고 자전거를 달렸다.

밤섬 앞으로 유람선이 지나간다.

마포대교를 지나자 밤섬이 눈에 들어왔다. 밤섬은 옛날에는 나룻배를 제작하고 수선했던 곳이었다. 뽕나무가 많았고 옥수수와 땅콩 등을 재배했다. 밤섬의 백사장은 율도명사(栗島明沙)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1968년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밤섬은 폭파됐다. 당시 밤섬에 살던 62가구 400여 명의 주민은 창전동으로 이주했다. 지금은 철새가 사는 섬이 됐다.

서강대교를 지나 강가에 난 길로 접어들었다. 강에 떠 있는 119여의도수난구조대 건물 앞을 지난다. 수양버들 가지가 터널을 만들었다. 길 오른쪽은 강기슭이다. 물비린내가 강가에서 맴돈다.

양화대교 남단 서쪽에 밀밭길이 있다. 일렁이는 밀밭 사이 흙길을 걷는 사람들 걸음이 느리다. 한참 동안 머무르며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보인다. 양화대교에 올라 그 풍경을 굽어보았다. 밀밭 한쪽 원두막은 그 자체로 쉼표다.


두 개의 바위

가양대교를 지나 한강공원 구암나들목으로 나가면 바로 구암근린공원이다. 그곳에는 옛이야기가 얽힌 두 개의 바위가 있다.

조선시대 때 홍수에 경기도 광주에 있던 바위가 양천까지 떠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증거물이 현재 구암근린공원 연못에 있는 광주바위다.

또 하나의 바위는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이 태어난 곳이라고 알려진 허가바위다. 구암근린공원 후문 영등포공고 앞에 있는 허가바위는 ‘공암’이라고도 불리는데, 바위에 가로 6m, 세로 2m, 길이 5m 정도의 동굴이 있다. <경기읍지> 기록에 고려 건국 전후 이곳에 허선문이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공암의 촌주로 임명돼 공암 허씨의 시조가 됐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을 양천이라 불렀기 때문에 허선문은 양천 허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허가바위는 서울시 기념물 제11호다.

허가바위(공암) 옆에는 공암나루터가 있던 곳을 알려주는 표석이 있다. 공암나루는 양천과 행주를 잇던 나루로 북포나루라고도 불렸다.

고려시대 말 금덩이를 강물에 던진 형제 이야기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방화대교 남단 동쪽에 있다.

공암나루에 얽힌 고려시대 이야기가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어느 형제가 길을 가던 중 금덩이 두 개를 주워 하나씩 나눠 가졌다. 공암나루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갑자기 동생이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다. 그것을 본 형이 동생에게 그 이유를 묻자 동생은 금덩이를 주워 형과 나누어 갖고 있으니 불현듯 형과 나누었던 깊은 우애에 금이 가고 삿된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 금덩이를 강물에 버렸다고 말했다. 이에 형도 동생을 따라 금덩이를 강물에 버렸다는 이야기다.

다시 한강 둔치 자전거길로 돌아와 서쪽으로 달렸다. 붉은 아치가 인상적인 방화대교가 보였다. 방화대교가 도착 지점이었지만 그곳에서 시작되는 강서습지생태공원을 놓칠 수 없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강서습지생태공원을 거닐었다. 강기슭으로 밀려드는 한강의 물결, 진흙과 모래가 섞인 펄, 강물에 닿을 것 같은 낭창거리는 수양버들 가지, 그곳에 자라는 푸른 생명들이 어우러진 풍경에서 한갓진 한강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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