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감정 뇌파-특정 색깔 매핑한 예술적 시도 ‘신선’

인공지능과 예술의 만남 ② 인간 감정을 색깔로 표현하는 실험한 ‘랜덤 다이버시티’

등록 : 2020-08-2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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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란이상 프로그램 선정 천영환 작가

흑자 달항아리의 ‘요변’을 모티브 삼아

로봇팔이 만드는 항아리에 색깔 입혀


인간 감정 일어날 때의 전전두엽 뇌파

‘감성 컴퓨터’로 분석한 뒤 색깔로 표현

천영환 작가가 지난 10일 성동구 성수동 우란문화재단 우란1경 전시실에서 로봇팔이 3D 프린트 기법으로 만드는 ‘항아리’ 옆에 서 있다. 수조에 담긴 이 항아리에 입혀지는 색깔은 천 작가의 감정을 표현한 색이다.

‘인간의 감정을 색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오는 26일까지 성동구 성수동 우란문화재단 우란1경 전시실에서 진행되는 ‘랜덤 다이버시티’의 주된 문제의식 중 하나다. 이 전시는 우란문화재단의 ‘우란이상 시각예술연구’(우란문화재단 인력 육성 프로그램)의 하나로 진행됐다. 이는 재단이 보유한 소장품을 매개로 선정된 작가가 연구 주제를 확장하고, 이러한 연구 과정을 통해 예술 작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탐구하려는 의도로 기획된 사업이다.

지난해 우란이상 프로그램에 선정된 천영환 작가는 우란문화재단이 보유한 김시영 도예가의 ‘서가흑자 달항아리’라는 작품에 주목했다. 카이스트 출신인 그는 이미 2019년 6월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이것은 99.17005896568298% 확률로 달항아리입니다’라는 전시를 진행한 바 있다.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조금씩 다른 달항아리의 모델을 무한대로 생성한 뒤 이를 3D 프린팅으로 구현한 전시다. 여러 개의 같은 듯 다른 달항아리들은 현실 세계에서 똑같은 것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천 작가는 올해 전시에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검은 도자기인 흑자의 ‘색깔’에 눈길을 돌렸다.

천영환 작가가 작품의 모티프로 삼은 김시영 도예가의 ‘흑자’.

지난 10일 방문한 우란1경 전시실에는 ‘도자기’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전시실 입구에는 인간이 만든 도자기, 즉 김시영 도예가의 흑자가 놓여 있었다. 그보다 조금 안쪽에는 큰 수족관 형태의 백색물질이 담긴 통이 설치돼 있었고, 그 통 안에서 두 대의 로봇팔이 3D 프린트 기법으로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핵심은 ‘색깔’이다. 로봇팔이 만드는 도자기는 파란색과 노란색 등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이 색깔은 천 작가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작가의 감정이 색깔이 되어서 로봇이 만드는 도자기에 표현된 것일까?

천 작가는 이를 ‘디지털 요변(窯變)’이라고 말한다. 요변이란 도자기가 가마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일, 특히 유약의 변화를 말한다. 사실 인간이 만든 흑자의 검은빛도, 도예가가 가마에 넣기 전 바른 유약이 요변을 일으키며 만들어진 것이다. 13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유약이 변하면서 흑자는 검은색을 주로 띠게 되지만, 그 안에는 푸른색, 녹색, 보라색 등 수많은 색이 섞여 들어가게 된다.

천 작가는 인간의 감정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봤다. 우리가 분노, 기쁨 등이라고 표현하는 감정도 사실은 매우 다양하고 쉽게 변화한다. 천 작가는 더 나아가 이런 다양한 감정도 과학의 영역에서는 동공의 확장, 심장의 두근거림, 뇌파의 파장 변화, 뇌 안의 혈류 이동 등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봤다. 천 작가는 어떤 특정한 감정이 특정한 측정치로 파악될 수 있다면, 이를 특정 색깔과 매핑하는 ‘예술적 시도’도 가능할 것으로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천 작가는 어떤 감정이 떠오를 때 뇌의 전전두엽 쪽 뇌파와 안구의 움직임을 측정한 뒤, 감정을 분석하는 감성 컴퓨터(Emotion AI) 기법을 사용해 해당 감정을 색깔로 나타냈다고 설명했다.

천 작가는 “10일 전시장에서 로봇팔이 만들던 항아리의 색깔은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생각하며 생긴 감정의 색깔”이라며, “이 외에도 로봇팔로 항아리 수십 개를 만들었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감정을 색깔로 표현해 항아리의 표면에 담아냈다”고 말했다.

관람객이 가상현실(VR)로 보낸 사진을 보며 생각한 감정이 전자신호가 돼 흘러가면 벽에 걸린 4개의 물감 통에서 그에 맞는 양의 물감이 흘러나와 ‘감정 색깔’을 만든다.

물감들이 섞여 감정 색깔을 만드는 과정.

전시장 한편에는 이런 과정을 일반 관람객이 체험할 수 있는 코너가 마련돼 인기를 끌고 있었다. 관람객은 우선 가상현실(VR) 기계를 쓴 채, 화면 속 흑자 항아리 색이 붉은색과 검은색 등 다양하게 바뀌는 과정을 보며 뇌파를 측정한다. 이어 자신이 가진 사진 중 하나를 가상현실로 보낸 뒤 다시 집중해서 바라보면서 뇌파를 측정한다.

관람객은 이 두 과정을 거친 이후 자신이 사진을 보며 느낀 감정을 색깔로 추출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벽에 걸린 빨강·파랑·노랑·하양 4색 물감 용기들이 자기의 감정 뇌파에 반응해 물감을 일정 정도씩 책상에 놓인 플라스크에 떨어뜨린다. 그 4개의 색이 섞이면 바로 자신이 해당 사진을 보면서 느낀 감정의 색깔이 되는 것이다.

관람객인 30대 직장인 이우정씨는 감정을 색으로 변형시키는 체험을 마친 뒤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씨는 “넬이라는 그룹의 공연 사진을 가상현실에 보낸 뒤 주시해 보았다”며 “사진의 주 색깔인 보라색이 아니라 감정 색깔로 초록색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씨는 “초록색은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며 “아마도 공연 관람 때의 즐거운 감정이 되살아났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전시장 벽에는 관람객들의 다양한 감정 색깔을 담은 시험관 수십개가 화려하게 전시돼, ‘인간의 감정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관람객들의 감정 색깔을 담은 시험관들.

글·사진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사진 우란문화재단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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