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7017의 대형 화분, 직장인의 마음 위로하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⑱ 공중보행로 서울로7017

등록 : 2020-08-2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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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자동차길에서 사람길이 된 곳

고가 위에 놓인 크고 작은 화분 645개

직장인 상한 맘은 그 뒤에서 푼다는데

코로나로 아픈 마음 언제 풀 수 있을까

한참 전진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더 빨리 가려다가 넘어지고,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기라도 한 걸까? 이럴 때는 한 호흡 가다듬는 지혜가 필요하다.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시련이 떠오른다. 부인의 실수로 프랑스 파리의 기차역에서 소매치기당하는 바람에 4년 동안 피땀 흘려 써두었던 원고가 그만 허공에 사라지고 말았다. 허탈감과 분노로 하루하루 지탱하기 힘들 때 그를 위로해주고 다시 일어서게 해준 것은 코로나였다. 물론 그것은 바이러스가 아닌 타자기 이름, 정확하게 말하면 ‘코로나 3번’ 타자기였다.

“코로나 3번 타자기야말로 내가 유일하게 믿는 정신과 의사다.”

코로나 3번은 현대의 노트북 컴퓨터처럼 출장이나 여행 다닐 때 휴대가 가능한 최초의 이동식 타자기였다. 심기일전한 그는 타자기와 함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써서 작가로서의 길이 열렸고 ‘잃어버린 세대의 기수’라는 명성도 함께 얻었다. 그러니 헤밍웨이의 인생은 코로나 이전(BC)과 코로나 이후(AC)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과 헤어지기를 반복했지만, 그 타자기만큼은 항상 함께 있었기에 인생의 도반(道伴)이라 말할 수 있다.


신문 연재를 위해 다시 걷기 시작한다. 세상이 불확실하고 답답할 때는 조금은 높은 곳에 올라가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번에 택한 곳은 ‘서울로7017’. 45년 동안 퇴계로에서 만리재로를 잇는 차량 전용 도로였다가 3년 전 보행자 전용으로 바뀐 국내 최초의 공중보행로다. 차량이 주인공이었다면 이제는 사람이 이곳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낯선 숫자 7017은 무슨 뜻인가?

서울역 고가도로가 처음 시작된 1970년과 보행길로 재탄생한 2017년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작명할 때 그 이름 안에 설명과 의미를 많이 부여하려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름은 직관적이며 발음하기 쉽게 지어야 입에 잘 붙고 기억에도 남는다. 서울로7017이 탄생하는 데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미국 뉴욕의 경우 ‘하이라인’이라 부른다. 그것은 어쩌면 민간 주도와 관 주도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뉴욕의 명물 하이라인은 1마일, 즉 1.6㎞인 데 반해 서울로 7017의 길이는 1㎞ 정도 된다. 하이라인이 철길을 보행 전용 공간으로 만들었다면 서울로는 자동차 길을 사람의 길로 전환했다는 차이도 있다.

서울로 풍경들

서울로 근처의 중림동 염천교 안내판

나는 남대문시장이 있는 퇴계로에서 만리재 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고가에서 대우재단 빌딩과 호텔 마누 2층으로 곧장 이동할 수 있는 연결통로를 지나 중간쯤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 염천교 등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피아노가 놓여 있는데, 행인 한 명이 같은 부분을 되풀이해서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시대가 음악의 도돌이표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서울로7017 도보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현재는 인근 다른 직장에서 근무하는 권민정씨를 만나 설명을 들을 기회를 얻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피아노

“서울의 중심 도로를 전체적으로 한눈에 조망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은데, 이곳을 걷다 보면 다양한 서울의 길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전개되는지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저에게는 가장 큰 매력입니다. 서울스퀘어와 서울역 앞쪽으로는 모두 8개의 신호등이 있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양식당 ‘서울역 그릴’과 ‘티룸’이 서울역에 있었다는 것 아세요? 이상의 소설에도 등장합니다.”

사람이 그러하듯 건물이나 도로 역시 그 이면에 숨겨진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그녀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이상의 소설 ‘날개’를 찾아 읽어본다. 당시 이름은 경성역, 소설의 주인공 ‘나’는 대합실이나 티룸을 이따금 찾는데, 그곳은 서울역 옛 역사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역 문화관에 있었다.

구서울역사와 새로 지은 현재의 서울역

강우규 열사 동상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 번 읽었다. 그것들은 아물아물하는 것이 어딘가 내 어렸을 때 동무들 이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날개’ 중에서)

이 부근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기억이 축적된 장소다. 당대의 신지식인들과 재력가들이 자주 찾던 서울역 앞은 코로나19의 여파로 기차 타려는 승객이 줄어든 대신 광장에는 노숙인들 사이 작은 언쟁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광장 건너편 수출 한국의 상징과도 같았던 대우빌딩은 서울스퀘어로 이름이 바뀐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서울로7017에는 여행자카페, 전망카페 등이 있지만 대부분 정상적인 영업이 어렵다. 걷다 보면 중간중간 ‘호기심 화분’이라 명명된 대형 원형 화분이 있는데,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 화분은 645개나 되고 수목은 2만4천 종에 이른다. 이 길은 네덜란드의 건축가이며 조경가인 비니 마스의 국제현상공모전 당선작으로 단순히 걷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서울수목원’으로 만들겠다는 뜻이 담긴 설계를 했다고 한다. 걷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 대형 화분은 불편함의 대상이지만 뜻밖에도 직장인들의 안식처 역할도 한다.

“요즘 젊은 직장인들은 스스로 ‘쪼렙’이라 부르거든요. 일하다가 윗사람에게 야단맞거나 속상한 일이 생길 때면 올라와 이 화분 뒤에 숨어 잠시 눈물을 훌쩍거리거나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풀고는 한답니다.”

근처 대형 빌딩에서 근무했던 또 다른 직장인이 들려준 얘기다. ‘쪼렙’은 게임에서 레벨이 낮거나 초보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누구나 남몰래 눈물 흘릴 나만의 공간은 소중하며 요즘처럼 불안한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보행중심축을 중심으로 17개의 보행길이 열린 덕분에 중림동, 청파동, 만리재 등 그동안 개발에서 소외되었던 많은 지역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도시재생의 동맥 역할을 한 것이다. 반면 그곳에서 터전을 안고 살아가는 소상공인 중에는 임대료만 올라서 삶의 질이 더 떨어졌다고 하소연하는 이도 적지 않다. 서울로7017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도시는 1천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있다. 천 개의 가면을 가진 도시가 천 개의 얼굴을 활짝 펴려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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