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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공사 중인 흑석동 성당 어귀. 공중전화 부스 뒤편 성당 어귀에 심훈 생가터 표지석이 있었다. 현재 공사 중이라 성당 내 다른 곳에 옮겨놓았다.
시, 소설, 연극, 영화 등의 분야를 넘나들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심훈, 그의 예술혼의 뿌리는 일제에 항거하는 광복정신에서 출발한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동작구 흑석동에 그의 시비와 태어난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동작구에서 만든 동작충효길을 걸으며 심훈을 생각해 본다.
1919년 3월1일 외쳤던 대한독립만세
“내 목을 잘라도 죽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겠다.” 심훈(본명 심대섭)이 자신을 회유하려는 일제 앞에서 한 말이다.
1919년 3월1일 탑골공원 독립만세운동 현장에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서울 경기고) 학생 심훈이 있었다. 심훈은 서울 시내 곳곳에서 계속되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돼 옥살이를 하게 된다. 옥에서 어머니께 쓴 글 중 일부를 소개한다.
“…경찰서에서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되어 나와서 이곳에 온 뒤에도 밤이면 몹시 앓았습니다. 병감은 만원이라 옮겨 주지도 않고 쇠잔한 몸에 그 독한 나날이 뼈에 사무쳐 어제는 아침부터 신음하는 소리가 높았습니다.…우리는 모두 일어나 그의 머리맡을 에워싸고 앉아서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덮쳐오는 그의 얼굴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습니다.…금세 운명을 할 노인의 손아귀 힘이 어쩌면 그다지도 굳셀까요?…”
-심훈기념관에 전시된 글 중
옥살이를 끝낸 심훈은 흑석동 집과 가회동 큰형 집에 머물면서 문학 공부를 한다. (당시 심훈은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리고 1920년 중국으로 간다.
심훈은 이때 우국지사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과 교류하며 항일과 조국 광복의 정신을 그의 예술혼에 투영하게 된다. 1923년 귀국한 그는 신극연구단체인 극문회 활동을 시작했으며, 연극과 영화 등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는 식민지 현실을 다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만든다. 1930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는 일제의 검열로 연재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 <그날이 오면>을 완성한다. 흑석동 언덕에 어린 심훈의 흔적 지하철 9호선 흑석역 1번 출구로 나와 직진한다. 효사정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심훈의 시비가 있다. 시비에 <그날이 오면>이 새겨졌다.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그래도 넘치는 기쁨에/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처 메고는/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우렁찬 그 소리를/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그날이 오면> 2연 시비 옆 계단으로 올라가면 효사정이 있다. 흑석동 일대는 물론이고 한강과 남산 너머 북한산까지 펼쳐지는 풍경이 아름다운 효사정에는 조선 세종 때에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노한 대감의 효심이 배어 있다. 효사정 마당에서 바라보이는 흑석동 성당 주변에 심훈의 생가가 있었다고 한다. 심훈 생가터 표지석이 있던 자리를 확인하고, 왔던 길로 내려간다. 명수유치원 앞을 지난다. 도로를 만나면 우회전한다. 신중앙약국 앞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마을버스(동작 01)를 타고 중앙대 후문 정류장에서 내린다. 흑석동 뒷산 동작충효길을 걷다 버스 진행 방향 뒤로 조금만 걸어가면 도로 위 산기슭에 보행로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다 왼쪽에 산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다. 동작충효길 이정표가 길을 안내한다. 길은 노들역까지 약 1.2㎞를 잇는다. 이 구간은 심훈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의 뒷동산이다. 옛날에는 마을 골목이며 동네 뒷동산이 놀이터였다. 심훈이 살았던 그 옛날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코흘리개 친구들과 이 언덕 어디쯤에서 뜀박질하며 놀았을 어린 심훈을 생각해 본다. 길 곳곳에 이정표가 잘돼 있다. 고구동산노들역배수지공원 방향으로 간다. 숲길에 있는 심훈 안내판을 지난다. 서울이지만 옛날 마을 뒷동산의 정감이 남아 있다. 온화한 숲길을 걷다 보면 농구장이 있는 넓은 운동장이 나온다. 게이트볼장 끝에 전망 좋은 곳이 있다. 풍경을 즐기며 잠시 쉰다. 게이트볼장을 지나 다시 길로 접어든다. 이정표에 노들역이 600m 남았다고 적혀 있다. 남아 있는 숲길을 걸으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심훈을 생각해 본다. 심훈은 1901년에 태어나 1936년 9월16일에 죽었다. 1934년에 아버지가 살고 있는 당진 부곡리에 필경사를 짓는다. 논밭을 일구듯이 붓으로 자신은 물론 사람들의 마음을 일구겠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의 대표 소설 <상록수>를 이곳 필경사에서 썼다. 글ㆍ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심훈은 이때 우국지사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과 교류하며 항일과 조국 광복의 정신을 그의 예술혼에 투영하게 된다. 1923년 귀국한 그는 신극연구단체인 극문회 활동을 시작했으며, 연극과 영화 등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는 식민지 현실을 다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만든다. 1930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는 일제의 검열로 연재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 <그날이 오면>을 완성한다. 흑석동 언덕에 어린 심훈의 흔적 지하철 9호선 흑석역 1번 출구로 나와 직진한다. 효사정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심훈의 시비가 있다. 시비에 <그날이 오면>이 새겨졌다.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그래도 넘치는 기쁨에/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처 메고는/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우렁찬 그 소리를/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그날이 오면> 2연 시비 옆 계단으로 올라가면 효사정이 있다. 흑석동 일대는 물론이고 한강과 남산 너머 북한산까지 펼쳐지는 풍경이 아름다운 효사정에는 조선 세종 때에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노한 대감의 효심이 배어 있다. 효사정 마당에서 바라보이는 흑석동 성당 주변에 심훈의 생가가 있었다고 한다. 심훈 생가터 표지석이 있던 자리를 확인하고, 왔던 길로 내려간다. 명수유치원 앞을 지난다. 도로를 만나면 우회전한다. 신중앙약국 앞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마을버스(동작 01)를 타고 중앙대 후문 정류장에서 내린다. 흑석동 뒷산 동작충효길을 걷다 버스 진행 방향 뒤로 조금만 걸어가면 도로 위 산기슭에 보행로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다 왼쪽에 산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다. 동작충효길 이정표가 길을 안내한다. 길은 노들역까지 약 1.2㎞를 잇는다. 이 구간은 심훈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의 뒷동산이다. 옛날에는 마을 골목이며 동네 뒷동산이 놀이터였다. 심훈이 살았던 그 옛날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코흘리개 친구들과 이 언덕 어디쯤에서 뜀박질하며 놀았을 어린 심훈을 생각해 본다. 길 곳곳에 이정표가 잘돼 있다. 고구동산노들역배수지공원 방향으로 간다. 숲길에 있는 심훈 안내판을 지난다. 서울이지만 옛날 마을 뒷동산의 정감이 남아 있다. 온화한 숲길을 걷다 보면 농구장이 있는 넓은 운동장이 나온다. 게이트볼장 끝에 전망 좋은 곳이 있다. 풍경을 즐기며 잠시 쉰다. 게이트볼장을 지나 다시 길로 접어든다. 이정표에 노들역이 600m 남았다고 적혀 있다. 남아 있는 숲길을 걸으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심훈을 생각해 본다. 심훈은 1901년에 태어나 1936년 9월16일에 죽었다. 1934년에 아버지가 살고 있는 당진 부곡리에 필경사를 짓는다. 논밭을 일구듯이 붓으로 자신은 물론 사람들의 마음을 일구겠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의 대표 소설 <상록수>를 이곳 필경사에서 썼다. 글ㆍ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