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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기 좋은 가을이다. 서울&으로부터 서울 문화유적에 대한 글을 부탁받고 올해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탄생 200주년임이 떠올랐다. 안국역 4번 출구에서 종로3가역 8번 출구 쪽으로 걸어가다보면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큰 종교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입구에서 안쪽으로 몇십 미터 더 들어가면 적벽돌의 이채로운 서양식 건축물이 눈을 사로잡는다. 바로 천도교 중앙교당이다. 천도교는 동학을 창시한 수운의 정신을 이어서 손병희가 1906년에 개칭한 종교다. 이 중앙교당은 천도교가 근대 종교로 다시 태어난 상징과 같은 기념물이다.
사실 이 멋진 천도교 교당이 경운동에 들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준 수운이 있었다. 수운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큰 의미는 역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밝혔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세종은 용비어천가 120장에서 “백성이 하늘이다”라는 조선의 정치 철학을 내세웠다. 하지만 세종은 성리학적 애민사상에서 한글을 창제하는 등 애민을 실천했지만 지배자 중심의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몸부림친 사람이 바로 수운이다. 재가녀의 아들로 태어난 수운은 신분제의 비참함 속에서 신음했고, 신분제의 모순과 불평등한 사회적 부조리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수도에 정진했다. 그 결과 그는 1860년 드디어 하느님을 만나는 종교적 체험을 함으로써 하느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최시형의 인시천(人是天)과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으로 발전했다. 이는 우리의 근대는 서양이 강요한 것이 아니라, 수운 덕분으로 “사람이 곧 한울(하느님)”이라는 생각을 우리 스스로 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동학·천도교의 주장은 근대를 여는 기폭제가 됐다. 여기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이 동학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음미해본다. 동학사상을 기반으로 민족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 한국 근현대사는 현재까지 달려왔다.
서울은 그냥 서울이 아니다. 사람이 많고 높은 건물이 많다고 해서 수도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온 시공간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서울’이다. 한국 근대사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 ‘3·1혁명’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3·1혁명은 임시정부를 탄생시켰고,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태반이 됐다는 사실은 헌법이 증명하는 진리다.
3·1혁명은 크게 천도교와 기독세력이 주축이 됐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3·1혁명에 사용된 자금은 주로 천도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그 자금이 천도교의 중앙교당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지 않다. 손병희는 1918년 4월5일 약 30만원의 예산으로 서양식 교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약 300만 교인 한 가구당 10원씩을 목표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그중 건축비 일부를 제외한 모든 자금을 3·1혁명과 그 일로 구속된 이들 뒷바라지와 임시정부 수립 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는 일제의 온갖 방해 공작에도 굴하지 않고 1919년 7월 공사를 시작해 1921년 2월 1824평의 대지 위에 212평의 천도교 교당을 완공시켰다.
천도교 중앙교당은 빨간색 벽돌로 외부를 치장했다. 빨간 벽돌을 보고 있노라면 1894년 동학혁명 때 희생된 천도교의 전신인 30만 동학 교도들과 농민들의 피를 상징한다는 생각에 젖게 된다. 그러다보니 “높이 날고 멀리 뛰어라”라는 수운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곧 겨울이 오겠지만 “봄은 반드시 온다”는 역사의 진리가 천도교 중앙교당에서 울리고 있다.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교수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교수
천도교 중앙교당.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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