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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탕! 탕!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하얼빈역에서 여섯 발의 총소리가 파란 허공을 갈랐다. 안중근 의사가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순간이었다.
한국 근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독립투사 박은식은 안중근 의사를 ‘평화의 사도’라고 칭송했다. 안중근 의거는 평화를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안중근 의사가 한국 근대사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역사학은 물론 문학과 예술의 놓칠 수 없는 대상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역사 논문은 사실관계 확인과 사상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반면, 안중근 의사의 다양한 면을 생동감 있게 그리는 소설과 영화는 독자와 관객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는 ‘무게감’에 직면한다. 이러한 예술 환경은 역사 속의 안중근 의사를 ‘상상 속의 인물’로 묘사하는 원인이 되곤 한다.
지난해 말 개봉한 ‘하얼빈’도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작가와 감독의 상상 속의 안중근 의사를 그린 영화였다. 하지만 “독립투쟁의 목적, 독립투사들의 인간적 고뇌”라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윤석열 정권의 내란’이라는 현재 우리에게 직면한 현실을 헤쳐나가는 힘과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나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라는 주인공의 대사는 현재의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온 나라지만 저 나라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야.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라는 이토 역을 맡은 배우의 대사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한국사의 힘을 정확하게 짚었다.
그런데 이 대사는 한국사를 넘어 인류가 지향할 세계라는 점에서 안중근 의사의 역사적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은 단순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었다.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명령인 ‘평화’를 지상에서 이루기 위한 ‘순명’이었다. 지상천국을 실현할 방안이 곧 ‘동양평화론’이었다. 그는 동양평화론에서 평화를 구현할 구체적인 방안으로 아시아 공동의 군대·은행·교육기관 창설을 제시했다. 이는 세계가 나가야 할 방향임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영화 ‘하얼빈’처럼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동양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평화체제 구축이 선행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한 공동의 군사훈련, 은행 설립, 교육 기관 창립을 앞당겨보자. 당장 실현될 가능성은 없지만, 반드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일 것이다.
독립 투쟁의 목적은 민주공화국 건립에 있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으로 구체화되어 1948년 8월15일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대한민국 헌법으로 완성됐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핵을 당하고서도 1952년 친위 쿠데타(부산정치파동)를 단행한 수괴 이승만은 결국 4·19혁명으로 쫓겨났다. 1960년 쿠데타와 1972년 영구 집권 친위 쿠데타(10월 유신)를 일으킨 수괴 박정희는 총탄에 사라졌다. 박정희의 충복이 일으킨 12·12 군사 반란의 수괴 전두환은 국민의 저항으로 무너졌다. 이들 독재자의 반평화적, 반인륜적 폭력성과 야만성은 현대 민주화 투쟁가들의 희생으로 극복됐다. 현대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사상적 기둥은 안중근 의사였다. 2024년 12월3일 일어난 친일적 군사 반란 옹호 세력이 떠받친 윤석열 정권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그랬듯이, 왕을 꿈꾸며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아! 30여 년간 아시아 민주주의의 희망이자 상징이었던 대한민국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하지만 115년 전 쏜 안중근 의사의 총알은 빛의 속도로 2024년 12월 국회 앞 광장에서 20·30대 젊은이들이 발산하는 응원봉의 불빛이 되어 윤석열 정권의 심장을 갈랐다. 새해 2025년은 다시 안중근 의사의 총알이 가른 빛을 받은 우리가 내뿜는 분노에 한남동의 역도들은 반드시 타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교수
독립 투쟁의 목적은 민주공화국 건립에 있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으로 구체화되어 1948년 8월15일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대한민국 헌법으로 완성됐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핵을 당하고서도 1952년 친위 쿠데타(부산정치파동)를 단행한 수괴 이승만은 결국 4·19혁명으로 쫓겨났다. 1960년 쿠데타와 1972년 영구 집권 친위 쿠데타(10월 유신)를 일으킨 수괴 박정희는 총탄에 사라졌다. 박정희의 충복이 일으킨 12·12 군사 반란의 수괴 전두환은 국민의 저항으로 무너졌다. 이들 독재자의 반평화적, 반인륜적 폭력성과 야만성은 현대 민주화 투쟁가들의 희생으로 극복됐다. 현대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사상적 기둥은 안중근 의사였다. 2024년 12월3일 일어난 친일적 군사 반란 옹호 세력이 떠받친 윤석열 정권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그랬듯이, 왕을 꿈꾸며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아! 30여 년간 아시아 민주주의의 희망이자 상징이었던 대한민국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하지만 115년 전 쏜 안중근 의사의 총알은 빛의 속도로 2024년 12월 국회 앞 광장에서 20·30대 젊은이들이 발산하는 응원봉의 불빛이 되어 윤석열 정권의 심장을 갈랐다. 새해 2025년은 다시 안중근 의사의 총알이 가른 빛을 받은 우리가 내뿜는 분노에 한남동의 역도들은 반드시 타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교수
지난 12월13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바라본 1909년 의거 장소. 왼쪽 삼각형이 안 의사가 섰던 자리이고, 오른쪽 위 마름모가 이토 히로부미가 섰던 자리다. 5m 정도 떨어져 있다
사진 하얼빈/최현준 특파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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