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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12월이면 은행에서도 달력을 주고 회사에서도 주고, 하다못해 단골 가게에서조차 달력을 돌렸더랬다. 그림 없이 숫자만 큼지막한 은행 달력, 얇은 습자지를 매일 한 장씩 찢는 재미가 있었던 금은방 달력 등. 미처 걸지 못한 달력들은 설날에 윷놀이 말판이나 아이들의 도화지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달력을 많이 주고받았다. 스마트폰 때문에 시계도 필요 없어진 세상에 달력이 웬 말인가 싶긴 한데, 돈 주고 사게 되진 않고 없으니 아쉽다. 빨간 색연필로 동그랗게 생일도 표시하고 기념일도 챙기는 그런 맛이 있었는데 말이다. 기술이 발전하다 못해 따라가기 벅찰 정도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나는 적당히 불편하고 약간의 수고가 따르는 생활방식이 지금의 우리에겐 더 필요하지 않나 싶다.
표지판
1년 전 큰 수술을 받았다. 건강검진에서 소견이 나와 급히 수술을 받게 됐다. 엄마는 오래 투병도 못하고 돌아가신 터라 빨리 발견할 수 있어 오히려 감사했다. 사람이 건강과 관련해 큰일을 겪고 나면 이런저런 다짐을 하게 된다. 먹는 거, 자는 거, 운동 주로 이런 것들이다. 이 중 내가 제일 공들이는 건 운동이다. 그동안 살면서 제일 소홀했던 분야이기 때문이다. 실내 헬스장을 다니는 건 재미없고 수영은 귀찮다. 그나마 걷기가 제일 좋은데, 운동이 되려면 평지보다는 산이 나은 것 같아 동네 뒷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 뒷산, 서달산이다.
서달산 가파른 초입
서달산은 서초구와 동작구의 경계에 위치해 사당동, 방배동, 구반포, 흑석동, 상도동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 접근성이 좋다. 나는 방배동에서 출발하는 동작충효길을 주로 이용하는데, 초반엔 꽤 숨 가쁜 오르막길을 통과해야 하고, 이후로도 적당히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길이라 운동으로 삼기에 아주 적합하다. 진출입 코스가 많다는 점도 서달산의 장점 중 하나다. 지친다 싶을 땐 사당동 시장 쪽으로 하산해도 되고, 더 걸어도 되겠다 싶은 날엔 중앙대 쪽으로 내려간다. 컨디션이 아주 좋을 땐 숭실대 쪽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런 날은 도보 수 1만5천 보는 거뜬히 나온다. 물론 아무도 그렇게나 많이 걷길 권하진 않지만 말이다. 나처럼 운동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겐 이렇게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 버겁지 않은 산이 동네에 있다는 게 그저 축복이랄밖에.
장군묘역에서 바라본 한강
여러 출입로 중 내가 제일 많이 이용하는 코스는 국립현충원으로 빠지는 코스다. 거리도 적당하고 사람이 많지 않은데다 바닥이 고른 편이라 걷기 편하다. 나는 주로 장군 묘역 쪽으로 올라가 한강을 조망한 뒤 현충원 정문 쪽으로 내려오는데, 여길 자주 다니다보니 아무래도 이곳에 잠들어 계신 순국열사나 독립유공자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특히나 끝도 없이 세워진 수많은 비석을 볼 때면 전쟁으로 대체 얼마나 많은 목숨이 희생된 건지 참혹할 뿐이다. 자식뻘이란 생각이 들어 그런지 일병, 이병이라 새겨진 묘비명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건 없다는 걸 현충원 올 때마다 생각한다. 다만 이들의 희생이 값없는 희생이 되지 않도록 잘 지켜내는 게 남은 자들의 숙제임을 기억하고 싶다. 다사다난하지 않았던 해가 한 해도 없었지만 2024년은 유독 좋았던 일보다 가슴 아팠던 일만 기억에 남는다. 눈물로 얼룩진 이 땅에 더는 아픈 일도, 슬픈 일도 없기를 2025년 을사년 새해 일출을 바라보며 소망했다.
겸재 정선 동작진도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 중 ‘동작진’이라는 그림이 있다. 그림에 나오는 배산임수의 마을이 지금의 현충원 자리이고, 그 현충원을 병풍처럼 포근히 감싸 안은 산이 바로 서달산이다. 그림 속 한강에 배가 여러 척 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나루터를 통해 물류 이동이 활발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제 막 배에서 내린 듯한 선비가 당나귀를 타고 배산임수의 아늑한 마을을 향해 들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그지없이 평온한 일상의 풍경이다. 2025년 우리의 일상도 그러하길 소망한다. 아울러 조금은 불편해지기를 기꺼이 감수한 나의 운동 여정도 꾸준히 이어갈 수 있기를 다짐한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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