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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녹번동 청기와양복점은 2015년 타계한 황재홍(왼쪽)씨가 1973년 창업했다. 황씨는 2전3기의 난관 끝에 양복점 경영에 성공했다. 그는 늘 “실패에서 배운 사람”으로 평가받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가업 승계를 시작한 아들 필승(오른쪽)씨가 존경의 뜻으로 생전의 아버지와 같은 자세를 잡았다. 황재홍씨 사진 정연구(윌스튜디오 대표) 사진작가, 황필승씨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서울 은평구 녹번동(통일로697) 청기와양복점은 서울 외곽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오래된 수제 양복점 중 하나다. 1973년 현재의 자리에 문을 열어 올해로 44년째 영업 중이다. 불광역에서 옛 국립보건원(현 서울혁신파크) 맞은편 대로변을 바라보면 검은 바탕에 황금색 글씨로 ‘명품신사복 청기와’라고 쓴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쇼윈도에는 국제양복기술대회에서 받은 대상 상장이 자랑스레 걸려 있다. 가게 문 좌우에는 특수체형전문 맞춤양복점임을 알리는 광고도 보인다.
가게 문을 들어서면 클래식한 복고풍의 전형적인 양복점 분위기에 풍채가 좋은 중년의 테일러가 손님을 맞이한다. 아버지 고 황재홍(2015년 75살로 타계)씨에 이어 2대째 줄자를 목에 걸고 있는 황 필승(47)씨다.
“외환위기(1997년) 시절 양복점이 부도 위기에 몰렸어요. 그때 둘째 아들인 제가 경영 정상화를 위해 양복점 일을 거들었는데, 그게 결국 2대에 걸쳐 천직이 되었네요.”
아버지 황재홍씨는 양복 기술이 뛰어날 뿐 아니라 체형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맞춤한 양복을 잘 만드는 것으로 정평을 얻은 재단사였다. 기성복이 대세를 이루면서 양복점이 사양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1990년대에는 양복점에서는 재단만 하고 옷은 봉제공장에서 만드는 이른바 반맞춤(MTM, made to measure) 방식의 중저가 양복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했다. 아버지 황씨가 타계한 뒤에도 정통 수제 양복과 반맞춤 양복 생산방식을 병행하는 청기와양복점의 운영 방식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고급 수제 양복의 길만 고집하지 않고 맞춤 양복의 대중화 흐름도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청기와양복점보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명가들은 수두룩하다. 개화기인 1903년 처음으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양복점이 생긴 이래 1916년 문을 연 종로양복점(중구 저동)이 지난해 창업 100주년을 맞이한 것은 양복업계로서는 뜻깊은 일이다.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받은 퇴계로의 한영양복점(1932년), 소공로의 해창양복점(1945년) 등은 70~80년 이상의 역사를, 명동의 미성양복점(1954년)처럼 6·25 이후 양복 붐을 타고 문을 연 가게도 60여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서울 은평구 녹번동(통일로697) 현 위치에서만 44년째 손님을 맞고 있는 청기와양복점 전경.
청기와양복점은 이런 내로라하는 명점들과 어깨를 견주며 서울시로부터 “보존할 가치가 있는” 미래유산의 하나로 지정됐다. 지역주민의 소비 특성에 맞는 중저가 맞춤복 영역을 개척한 점,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가며 지역 상권을 꿋꿋이 지켜온 역사성 등을 인정받았다.
미래유산으로서 청기와양복점의 역사는 창업자인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고 황재홍씨는 14살부터 재봉 일을 배우기 시작해 60년을 ‘테일러’라는 자부심 하나로 산 사람이다. 20대 초반에 이미 독립적인 기술자로 인정을 받았고, 전국주문신사복경연대회에서 대상(1981년)을 받을 만큼 양복 기술이 뛰어났다. 그는 손님이 옷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면 두말없이 다시 만들어주었다.
1973년 33살 때 단돈 3만원으로 양복점을 연 사나이로도 업계에서 유명했다.
“1970년대는 한국 양복이 국제기능올림픽을 연속 제패하면서 전국에 양복 기술 붐이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제대로 된 양복 기술 가진 사람치고 돈 못 번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천대받던 양복 기술자들이 한껏 자부심을 드날릴 때였어요.” 풍속사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산업화 시대는 ‘양복쟁이’의 전성시대기도 했다. 고도성장과 서구화로 너도나도 양복 한벌쯤은 해 입는 시대가 되자 양복 사업은 ‘대박’이 났다. 1970년대 후반쯤 가면 전국에 양복점이 2만개에 이를 만큼(<한국양복 100년사>, 김진식 지음) 경쟁도 치열했다.
“1970년대는 한국 양복이 국제기능올림픽을 연속 제패하면서 전국에 양복 기술 붐이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제대로 된 양복 기술 가진 사람치고 돈 못 번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천대받던 양복 기술자들이 한껏 자부심을 드날릴 때였어요.” 풍속사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산업화 시대는 ‘양복쟁이’의 전성시대기도 했다. 고도성장과 서구화로 너도나도 양복 한벌쯤은 해 입는 시대가 되자 양복 사업은 ‘대박’이 났다. 1970년대 후반쯤 가면 전국에 양복점이 2만개에 이를 만큼(<한국양복 100년사>, 김진식 지음) 경쟁도 치열했다.
아버지 테일러 황재홍씨가 수십년 동안 애지중지한 돋보기안경과 일제 재봉가위.
이 무렵 청기와양복점도 수십명의 직원을 거느릴 정도(봉제공장도 같이 운영했다)로 규모가 컸다. 황씨가 22살 때 처음 고향 대전에서 양복점을 연 이래 “호인 기질의 경영으로” 두번째 양복점도 말아먹은 뒤 거둔 2전3기의 성공이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을 “실패에서 배운 사람”이라고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그 시절 많은 양복인들이 그랬듯이 아버지도 어려운 환경을 헤치고 자기 가게를 연 분이었습니다. ‘가방끈은 짧아도 열정과 적극성만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고 즐겨 말씀했어요.” 평소 백수를 자신할 정도로 건강했다는 황씨는 뒤늦게 발견한 췌장암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필승씨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지인과 멀티미디어프로덕션을 운영하던 중, 부도 위기에 몰린 아버지를 도우러 나섰다가 아예 가업을 잇게 되었다. 아버지 황씨는 기술을 모르고선 양복점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필승씨에게 양복 기술을 가르쳤다. 1990년대 후반에 양복 일은 이미 사양산업으로 인식되던 터라, 컴퓨터 사업을 시작해 한창 몰두하고 있던 필승씨는 처음엔 양복점 경영에 필요한 정도만 배운다고 생각했다.
“당시 맞춤 양복 시장이 살아 있었다면 저는 기술보다는 마케팅 쪽에 주력했을 겁니다. 최근 맞춤 양복 시장이 다시 활기를 띠는 것을 보니, 새삼 아버지의 혜안에 감탄합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양복점을 공동으로 운영한 아버지와 아들은 이후 아버지 황씨가 타계할 때까지 ‘환상의 복식조’였다. “아들의 지식과 아버지의 기술이 잘 결합된 양복점”으로 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졌다.
요즘 맞춤 양복업계는 ‘제2의 중흥기’를 기대할 만큼 활기를 되찾고 있다. 소공동, 청담동 같은 패션가에는 양복점을 찾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크게 늘었다. 테일러가 되기 위해 외국 유학을 떠나는 젊은이도 많다. 자기만의 멋을 추구하는 세대의 등장, 소비력 있는 실버 세대의 복고 향수가 양복 소비를 늘리고 있는 것이다. 기술과 유통의 발달로 중저가 반맞춤복의 품질이 고급 기성복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간 것도 주요 원인이다.
아들 황필승씨가 줄자로 손님 치수를 재고 있다. 청기와양복점은 아버지 때부터 특수체형 맞춤옷으로 정평이 나 있다. 김진수 기자
청기와양복점의 반맞춤 가격대는 최하 39만원대에서 시작한다. 100만원대의 고급 기성복 값으로, 충분히 자기 몸에 맞는 양복을 맞출 수 있는 셈이다.
“전통적인 재단-봉제-마무리 공정으로 옷을 만들면 최소 3~4명 이상의 손길이 필요했으나, 지금은 이 공정이 단축돼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반맞춤 양복 가격은 10년 전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물론 전통 방식의 고급 수제 맞춤복은 300만원대에서 700만원 이상 하기도 한다.
청기와양복점의 주 고객은 아직도 50대 이상이 70%를 차지하고, 30% 정도가 20~40대들이다.
“백화점에서 100만원짜리 기성복을 입어보고 와서 옷을 맞추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기성복값으로 자기 취향에 맞는 옷을 만들어 입겠다는 거죠.” 필승씨는 그래서 사업 확장보다는 반맞춤 양복의 품질 향상을 통해 고객층을 다양화한다는 전략을 추구한다. 규모보다는 기술에 더 집중할 때라는 것.
그래도 뛰어난 수제 양복 재단사였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고객들은 느끼지 않을까?
“물론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저 자신은 잘 못 느끼겠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3대가 함께 오시는 분들도 여전하니까요.”
필승씨는 우연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양복점을 이어받게 된 것이 마치 ‘신의 한수’처럼 감사하게 여겨진다고 한다.
“20년 가까이 양복점 일을 하면서 느낀 건데, 테일러는 슬플 일이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다들 입학식, 결혼식, 은혼식같이 기쁘고 좋은 일에 옷을 맞추잖아요? 심지어 장례식 예복도 미리 맞출 때는 슬퍼하지 않는답니다. 항상 기분 좋을 때, 기분 좋은 일로 고객들과 얽히며 일한다는 것이 정말 좋습니다.”
필승씨에게는 딸이 둘 있다.
“글쎄요, 지금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만, 양복 일을 배운다면 가게를 물려줄 수 있어요. 요즘은 여성 테일러도 가능한 시대니까요.”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