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맥주의 오래된 오명, 크래프트 비어가 씻는다

김작가 등 맥주 마니아 4명이 뽑은 ‘핫한 크래프트 비어 집’ 두곳

등록 : 2017-09-1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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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 양조장에서 에일 계통 맥주를

옛 모습 그대로 또는 재해석한 게

요즘 핫한 크래프트 비어

맥덕들의 핫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사워 맥주(왼쪽)와 맥주 샘플러.

지금으로부터 딱 500년 전인 1517년, 마르틴 루터는 95개조의 <스콜라 신학에 대한 논박>을 발표하며 종교개혁의 행보를 시작했다. 성직자였던 그는 대단한 맥주 애호가이기도 했는데, 물보다 맥주가 더 깨끗했기에 일상적으로 맥주를 마시던 당시 독일의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맥주는 인간이 만들고, 와인은 신이 만든다”(Bier ist Menschenwerk, Wein aber ist von Gott)는 말을 남긴 건 그의 맥주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물론, 맥주를 사랑했던 건 그와 독일만이 아니다. 우리도 맥주를 사랑한다. 안주를 따지고 기분을 따지는 소주와는 달리 맥주는 언제 어디서나 마실 수 있다. 맛있는 맥주, 색다른 맥주에 대한 관심이 쌓이고 이어지며 지금 맥주는 모든 주종 중 가장 움직임이 활발하다. 대중과 마니아, 양쪽의 움직임이다. 일상에서 싸고 가볍게 마시려는 이들을 위해 맥주 대기업들은 필라이트, 피츠 같은 발포주(맥아 비율이 10% 미만이거나 옥수수·콩 등 맥주 원료가 아닌 것으로 만든 술)를 내놨다. 편의점에서 네 캔에 만원으로 할인해 파는 수입 맥주들이 ‘만원의 행복’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더욱 정교하고 큰 움직임은 마니아들의 전파로 시작한 크래프트 비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주세법 개정으로 맥주 제조와 판매 기준이 완화되면서 자체적으로 맥주를 만드는 가게들이 생겨난 게 출발이다. 그 후로 약 15년, 이제 어지간한 상권이면 ‘수제 맥주’라는 간판을 단 술집을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맥주의 맛과 향, 제조법 등을 파고드는 ‘맥덕’(맥주 오타쿠)들도 도처에서 창궐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 전 대기업 총수와의 간담회에서 국내 크래프트 비어인 ‘세븐 브로이’를 만찬주로 골랐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2년 백악관에서 ‘화이트 하우스 허니 에일'이란 맥주를 만든 데 이어, 크래프트 비어가 일상 속으로 완전히 파고들었음을 보여준 순간이다.


맥주 고유의 맛 지키려는 크래프트 비어

크래프트 비어는 1970년대 후반 미국양조협회(ABA)가 만든 말이다. 소규모의 양조장에서 에일 계통의 유행이 지난 스타일을 옛 모습 그대로, 또는 기발한 재해석 등을 더해 만든 모든 맥주들을 가리킨다. 크래프트 맥주의 기준은 엄격하다. 생산량도 제한되어 있고, 50% 이상의 맥아(몰트, 엿기름)를 써야 하며, 외부 자본을 25% 이상 끌어들이면 안 된다. 맥주 고유의 맛을 지키고, 자본의 상업논리를 차단하기 위한 엄정한 자기 규제인 것이다. 크래프트 맥주의 천국인 미국에만 4000개 가까운 맥주공장(브루어리)이 있고, 전통의 맥주 강국인 벨기에는 그 좁은 땅에서 3000종류가 넘는 맥주를 만들어낸다. 입천장이 까끌까끌해질 정도로 홉을 때려넣은 맥주가 있고, 죽처럼 부드럽게 넘어가는 맥주가 있다. 오렌지 향이 나는 맥주가 있고, 고수씨 맛이 물씬 나는 맥주가 있다. 각각의 크래프트 맥주는 그렇게, 하늘의 별만큼이나 다양한 맛을 낸다. 취하려고 마시는 게 아니라 와인처럼 맛과 향을 즐기려고 마신다. 위에서 흩뿌리는 흐름을 따라가는 대중의 시대에, 개별적 취향의 연대로 엮인 다중이 균열을 내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강서, 강남, 은평 등 서울의 특정 지역 이름을 딴 제품들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으니, 맥주의 흐름이 어떤 격변을 타게 될지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다.

최근 크래프트 비어계에선 생맥주를 캔에 담아 테이크 아웃 판매하기도 한다.

‘맥덕’들 이구동성 뽑은 마포 ‘미스터리 브루잉’

지금 가장 핫한 맥주는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 자타가 공인하는 맥주 마니아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를 진행하고 있고 세계를 다니며 마신 술들에 대한 책 <스피릿 로드>의 저자이기도 한 탁재형 피디, 맥주가 좋아 독일에서 7년 동안 맥주를 공부하고 ‘맥주 양조 책임자 과정’까지 졸업한 류강하 브루마스터(맥주양조책임자), 그리고 해외 출장이나 여행을 갈 때마다 맥주를 테마로 삼는 모 일간지 기자 ‘맥덕’(본인 요청으로 익명 처리)이 그들이다. 어디서 볼까 물었더니 약속이나 한 듯 한곳을 꼽았다.

지난 8일 정식으로 문을 연 마포 ‘미스터리 브루잉’이다. 이미 맥덕들 사이에선 신흥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크래프트 비어의 명가로 꼽히는 가로수길 ‘퐁당’과 이태원 ‘사계’(최근 폐업)의 대표들이 합심하여 문을 열었다. 업장보다 넓은 공간에 맥주 제조 시설이 가득하다. “대중적이면서도 트렌디하고 맥덕들의 입맛도 맞출 수 있는 곳”(탁재형)이라고 한다. 헤페 바이젠, 필스너, 페일 에일, 커피 스타우트 니트로, 바닐라 스타우트 니트로 등 자가 제조 맥주 외에도 여러 맥주가 있지만, 미스터리 브루잉에서 반드시 먹어봐야 할 맥주가 있다면 ‘사워 맥주’(시큼한 맛이 나는 맥주)다. 말 그대로 신맛이 난다. “식전주나 디저트주로 좋아요. 입을 닦아주는, 샴페인과 같은 역할이죠.”(류강하) “요즘 와인도 내추럴 와인이 유행하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미식계에 신맛이 트렌드예요.”(맥덕) “삼세번은 먹어봐야 안다는 점에서 평양냉면과 비슷한 면이 있어요. 여기 사워 맥주는 나박김치의 산미가 느껴지죠.”(탁재형) 나박김치라니,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톡 쏘는 신맛을 연상하면 될 듯하다. 그래서 더욱 소맥(소주+맥주)용으로는 부적절하고, 만취해서 향하는 2차 코스로도 적합하지 않다. 맥주의 경험을 넓히고 싶은 이들에게 최적이라 할 만하다.

독일 맥주의 기본에 충실한 바이젠 보크.

독일 오리지널 바이젠 ‘합정동 크레머리’

미스터리 브루잉의 사워 맥주가 대중들의 취향을 반발자국 앞선, 트렌드의 맨 앞에 있다면, ‘맥주의 기본'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합정동 ‘크레머리’를 추천할 만하다. 독일인 브루마스터가 맥주 양조를 책임지고 있기에 독일 맥주의 참맛을 알 수 있다. 10종 안팎의 맥주가 있지만 크레머리를 대표하는 건 바이젠 보크. 원료를 엄청나게 넣어, 채 알콜화되지 않은 당분이 그대로 살아 있는 밀맥주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독일 오리지널 바이젠 스타일”이라는 게 류강하 마스터의 추천 이유다. 기본은 기본대로, 실험은 실험대로, 그러면서 대기업 맥주 수준의 균등한 품질 관리까지, 이런 요소들이 삼위일체를 이룰 때 크래프트 비어는 한국 맥주의 오랜 오명을 씻어내는 대체재로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글 김작가 음악평론가, 사진 탁재형 피디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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