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이 사람

잠실을 누비는 시니어 통역봉사대 “인생은 이제부터”

잠실3동 위 캔봉사단…조인숙 동장의 발의로 21일 발대식

등록 : 2017-11-3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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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대화되는 사람 만나 기뻐”

14~74살까지 다양…55살 이상 20명

연륜·경험에서 나오는 통역 서비스

환갑 넘어 영어 공부, 가이드 자격 따

송파구 ‘위 캔 봉사단’ 단원들이 지난 11월28일 오후 잠실 롯데월드타워 근처에서 아랍에미리트(UAE) 관광객 알 하세미(맨 오른쪽)와 그의 친구에게 영어로 관광 안내를 하 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조인숙 위 캔 봉사단장(잠실3동 동장), 류창선·김경현·강순구·김명재 단원.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아랍에미리트(UAE) 관광객 알 하세미는 지난 11월28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타워 주변에 들어서면서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지긋한 나이인데도 영어로 대화가 되는 사람들을 만나, 한국 관광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세미는 “평소에도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는데, 즐겁고 안전한 한국 여행 안내를 받으면서 느낌이 더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날 하세미가 만난 사람들은 송파구 ‘위 캔 봉사단’의 시니어 단원들이다. 위 캔 봉사단은 석촌호수에서 올림픽공원에 이르는 ‘잠실관광특구’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영어·일어·중국어·러시아어로 통역 서비스를 해주는 봉사단체다.

조인숙(52) 잠실3동장의 발의에 따라 지난 11월21일 발대식을 한 봉사단은 ‘1474 봉사단’이라고도 한다. 잠실3동에 사는 14살짜리 국제중 1학년생부터 74살 시니어 단원까지 약 100명이 똑같이 통역 봉사를 맡기 때문이다. 이 중 55살 이상인 시니어 단원은 모두 20명이다.


“삶의 경험 정도로 봤을 때, 오히려 우리가 중·고등학생 단원들보다 더 많은 것을 관광객에게 얘기해줄 수 있을 거예요.” 김경현(59) 단원의 말에서는 ‘어르신’이 아니라 ‘선배 시민’으로 알아주길 바라는 시니어 단원들의 마음이 묻어난다. 이는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경험이 더욱 풍부한 활동적인 시민’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 8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은 위 캔 봉사단원 모집 광고가 이들을 어르신에서 선배 시민으로 변신하게 했다. 광고를 붙인 사람은 그보다 한달 전 잠실3동장으로 부임한 조 동장이었다. 조 동장은 지난해 10월 노인의 날 정부 포상에서 송파구가 노인복지 분야 대통령상을 받는 데 기획과 실무 부문에서 기여한 노인인권 전문가다. 그가 동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주민자치센터 차원에서 ‘선배 시민’ 개념을 확산시킬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김 단원은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던 위 캔 봉사단 모집 광고를 보고 ‘바로 이거다!’ 하고 속으로 외쳤다고 한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1990년까지 7년 동안 시사영어사에서 영어교구를 만들었고, 육아 등으로 직장을 그만둔 뒤에도 성당에서 외국인 무료 홈스테이 자원봉사 등을 꾸준히 했다고 한다. 위 캔 봉사단은 그런 그에게 ‘어학을 매개로 세상과 더욱 깊게 소통하는 새로운 통로’인 셈이다.

김 단원뿐 아니라 위 캔 봉사단 시니어 단원들은 어학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류창선(68) 단원은 미국 등지를 대상으로 섬유 무역에만 30여년을 종사했다. 그러다 2010년 일을 놓자 유사 공황장애 증상까지 느꼈다고 한다. 약 6개월간은 날마다 잠실한강공원에 나가 막걸리 한병을 비우면서 ‘이제는 할 일이 없어진 자신’을 자기에게 납득시키는 날들이 이어졌다고 한다. 위 캔 봉사단은 그런 류 단원에게 다시 ‘할 일’을 만들어준 것이다.

김명재(61) 단원에게 봉사단원이 된 것은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해준 사건이다. 김 단원은 환갑인 2015년 ‘새 인생’을 꿈꿨다. 중고등학교 한문 교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했던 김 단원이 이때부터 ‘영어’ ‘운동’ ‘악기 배우기’를 새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영어를 배워 관광 안내를 했으면 좋겠다’는 당시로써는 꿈같은 이야기가 봉사단 활동으로 현실이 됐다.

강순구(69) 단원은 20여년간 건설회사에 다니면서 유럽·중동 등지로 파견근무를 다녔다고 한다. 그런 경험을 살려 2008년 은퇴 뒤 관광통역안내사 과정에 도전했다. 그리고 2년 만인 2010년에 마침내 자격증을 땄다고 한다. 지난 8월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도 공고문이 붙자 부인이 “당신 같은 이들이 재능기부를 해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추천해 단원이 됐다.

단원들은 지난 28일 오전 11시30분부터 낮 3시까지 잠실 일대를 돌며 알 하세미 외에도 멕시코 모녀를 비롯해 10여 팀의 외국인들에게 길안내 등의 서비스를 했다. 낮 3시 봉사활동을 마무리하기까지 3시간 반 가까이 거리를 누볐지만, 누구 하나 지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가슴속에 새롭게 자리잡은 자신감 탓인지도 모른다. “국제관계 일을 하는 30대 딸이 ‘엄마의 영어 실력이 그 정도였냐’며 놀라는 등 가족들에게도 새롭게 인정받는 느낌”(김경현 단원)이 단원들의 자신감을 더 키워줬을 것이다.

위 캔 봉사단장도 맡고 있는 조 동장은 “시니어 봉사단원 중 한분이 ‘이젠 내 시간을 어딘가에 쓸 수 있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 앞으로 다른 주민센터의 시니어 사업도 시니어를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니라 위 캔 봉사단처럼 ‘사회공헌 노인상’으로 바꿔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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