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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울문리대 앞에 문 연지 61년
서울서 가장 오래된 다방
‘미래유산’ ‘오래 가게’ 모두 뽑혀
전혜린, 김민기, 김광석, 송강호 등
숱한 문인·예술가들의 사연 넘쳐
80년대엔 “혁명 모의” 사건으로 유명
‘별 그대’ 이후 중국인도 찾는 관광코스
역사와 커피맛 앞세워 ‘학림백년’ 준비
마리오네트 공연을 위해 만들었다는 복층에서 내려다본 학림다방의 실내 전경. 30여년 전 지금 주인 이충렬씨가 옛모습대로 복원했다.
#살아 있는 문화사
동숭동 대학로 ‘학림다방’은 서울에서(어쩌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이다. 그 이름을 얻은 지 61년째다. 1975년까지는 주로 서울대생들의 ‘살롱’이었고, 1980년대에는 이른바 ‘학림사건’을 통해 “학생과 노동자들이 혁명을 모의한 장소”로 이름이 났다. 한때는 경영난 때문에 레스토랑으로 ‘전락’했다는 소리를 들었고, 송강호·전인권 등 현재 유명 배우와 가수들이 평범한 손님마냥 드나들던 때도 있었다. 21세기에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덕분에 중국인들까지 찾는 관광 코스가 되었고, 커피 맛이 좋아 바야흐로 ‘학림커피’라는 브랜드의 꿈까지 익어가는 중이다.
학림다방은 엘리트 대학문화가 민주화 시기 저항문화운동을 거쳐 대중문화로 확산된 문화사가 한 공간에 응축된 곳이다. 학림이 ‘서울시 미래유산’(2013년)과 ‘서울 오래가게’(2017년)에 이름이 오른 것도 이런 역사적 가치 때문이다.
#낭만과 저항의 아우라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좁은 나무 계단을 올라 2층 문으로 들어서면 마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의 한 장면처럼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 보인다. 칠이 벗겨진 오래된 나무 탁자와 의자, 손때 묻은 피아노, 다락층 벽에 낡은 흑백사진으로 도열한 고전음악의 별들…. 그 공간을 은은한 커피 향과 엘피(LP) 음질의 장중한 선율이 호위하듯 감돈다. 학림을 처음 찾는 사람도 금세 느낄 수 있는 복고의 분위기다.
“학림의 비품”을 자임한 작가 이덕희가 타계한 뒤에는 백기완 선생이 아침마다 학림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학림은 아직도, 여전히 60년대 언저리의 남루한 모더니즘 혹은 위악적인 낭만주의와 지사적 저항의 70년대쯤 어디에선가 서성거리고 있다…. (학림을) 대학로라는 첨단의 소비문화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고립된 섬처럼 느끼게 할 정도이다. 말하자면 하루가 다르게 욕망의 옷을 갈아입는 세속을 굽어보며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 할 어떤 것이 있노라고 묵묵히 속삭이는 저 홀로 고고한 섬 속의 왕국처럼….”
학림다방 입구에 문패처럼 걸려 있는 황동일 시인의 글이다. 고립을 자처하되 낭만과 저항의 시대를 사수할 것, 남루하되 비루하지 않을 것. 그것이 이 “낡아서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위에 다락처럼 떠 있는 남루한 공간”(정찬, 단편소설 <베니스에서 죽다>)의 아우라이다.
#역사
‘학림’(學林)은 학문의 숲, 배움의 숲이란 뜻이다. 옛 서울대 앞과 지금의 대학로라는 거리명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6·25 휴전 직후 서울의대 옆에 생긴 ‘별장’이라는 다방에 1956년 신선희란 여성이 ‘학림’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 학림의 시작이었다(문필가 고 이덕희의 회고). 학림다방은 곧 문예 취향의 서울대 학생·교수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다. 당시 24개의 강의동이 있던 서울문리대의 ‘제25강의실’로 통했고, “학생들 틈에 노시인 교수도 비벼 앉아서 시를 쓰던 곳”(서울법대 최종고 명예교수의 회고)이었다. 원래 ‘鶴林’이었다는 다방의 한자는 1962년 서울문리대 첫 축제인 ‘학림제’(學林祭)를 계기로 자연스레 배울 학(學) 자, 학림이 되었다. 학생들은 단골 다방 이름에서 축제 아이디어를 얻고, 학림다방은 덕분에 학생들의 숲, 즉 ‘學林’으로 자연스레 알려진 것이다.
서울대생의 전유물 같았던 학림다방이 변화를 맞은 것은 19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고, 신선희가 이민을 떠나고부터이다. 서울대가 떠난 대학로에서 학림은 경영난과 지하철 공사로 인한 건물 신축 등의 영향으로 본래 모습을 잃어 한때 학림 단골들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10여년 동안 몇 번의 주인이 바뀌고 1987년부터 학림을 경영하는 사람은 이충렬(62)씨다. “학림에 오면 주눅부터 들던 비(非)서울대생” 이충렬은 사진이 좋아 학전, 연우 무대 등의 연극 포스터와 보도자료 사진을 찍으며 연극패들과 학림에 드나들다 학림을 인수하는 인연을 맺었다.
#진정한 주인들
학림다방 방명록에 끼어 있는 사진. 홍세화(사회운동가·오른쪽 끝), 김지하(오른쪽 두번째) 시인, 김민기 학전 대표(왼쪽 세번째), 유홍준 교수(왼쪽 다섯번째) 등이 보인다.
학림은 단순한 다방이 아니라 사회·문화운동가, 유명·무명의 사상가, 문인, 예술가가 그 자취를 남긴 곳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주인 이씨가 만들어둔 방명록에는 지금도 낯익은 이름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의 고 전혜린으로부터 비로소 학림의 전설이 시작되었다고 할 만큼 그는 학림의 여신 같은 존재였다. 김승옥, 고 이청준, 김지하, 고 천상병, 황지우 등 한국 문학사의 걸출한 소설가, 시인들도 초기 학림의 연대기에 등장한다. 서울문리대 1학년 때 4·19를 겪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시인 김광규도 학림의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다/…/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1970~80년대에 학림은 김지하, 홍세화, 백기완 같은 이름들이 보여주듯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전사와 신화가 탄생하기도 하고 굴절과 전향의 상흔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오직 한 가닥 있어/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이른바 ‘광주 사태’(광주민주화운동)와 함께 시작된 1980년대에 학림은 “반독재투쟁 주도자들이 혁명조직 건설을 모의한” 장소로 유명했다. 당시 공안당국이 조작한 대규모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별칭인 이른바 ‘학림사건’은 학림을 전국적으로 알린 계기가 되었다.
대학로 낡은 다방은 어느새 보물이 되어 있었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저항시가 쓰이고,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의 사회사상이 영글며, 저 멀리서 ‘공장의 불빛’(김민기)이 빛나던 학림은 민주화 바람과 함께 1990년대부터는 점차 대중문화의 산실로 바뀌어간다. 강준일, 김광림, 강준혁, 이상우 등의 음악·연극인·문화기획자들이 학림의 역사를 채워갔다. 송강호, 설경구, 황정민 같은 유명 배우들이 무명의 설움을 달랜 곳이었고, 희대의 가객 김광석이 가수의 꿈을 키우며 학전의 연극패들과 공연 뒤풀이를 벌이던 곳도 학림이었다. “나의 하늘을 본 적이 있을까/조각구름과 빛나는 별들이/끝없이 펼쳐 있는 구석진 그 하늘/어디선가 내 노래는 널 부르고 있음을….”(김광석 데뷔곡, <너에게>)
그러나 이들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오래 기억될 인물은 아무래도 고 이덕희와 이충렬이 될 것 같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글을 쓰다가 지난해 타계한 이덕희는 서울법대 55학번으로, 학림이 탄생한 1956년부터 죽을 때까지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학림과 함께한 자칭 “학림의 비품”이었다. 1965년 전혜린이 죽기 전날에도 학림에 함께 있었고, 1980년대 초 망가진 학림이 보기 싫다며 일부러 길을 돌아다녔다는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책상 위에는 학림 60주년 문집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 그와 학림의 마지막 작별도 기묘했다. 이덕희와 가까웠던 소설가 정찬이 우연히 학림에 들러 한동안 연락이 끊긴 이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마침 영정사진을 가지러온 동생으로부터 뜻밖의 부음을 들은 것이다(한경심 외, <이덕희>). 그는 어쩌면 우연의 힘을 빌려서라도 학림의 추억을 저승으로까지 이어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학림다방과 학림커피
1987년부터 학림다방을 운영하는 이충렬씨. 그는 학림의 백년대계로 ‘학림커피’의 브랜드화를 구상하고 있다.
이충렬은 1987년 이래 31년째 학림을 지키고 있다. 학림의 역사에서 이충렬의 공로는 학림의 옛 모습을 되살려 오늘에 이르게 한 것, 학림의 아우라에 걸맞은 커피 맛을 더한 것이다. 2000년 초 대학로에 들어선 스타벅스2호점 점장이 배우고 싶어 할 정도로 학림은 이미 로스팅 커피 맛을 보이고 있었다. 이씨는 최근 학림다방 골목 안쪽에 조그만 분점도 열었다. 원래는 로스팅 기계를 놓고 커피를 볶는 살림집이었는데 “학림에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단골들 모습이 안타까워” 테이블과 의자 몇개를 놓은 게 분점이 됐다. 분점 ‘학림커피’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담소하거나 모임을 갖기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이씨는 요즘 ‘학림의 브랜드화’를 생각 중이다. 유서 깊은 학림의 이름으로 로스팅한 원두를 직접 파는 사업이다. “커피만 팔아서는 대학로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60년 전통의 다방이 그 자체로 하나의 원두커피 브랜드가 되어 집집마다 배달이 되고, 심지어 미제 ‘별다방’과도 경쟁하는 날을 보게 될까? 체 게바라가 브랜드로 소비되는 시대이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렇게 한 다방의 역사가 백년 가게의 꿈을 이루어간다면 그 또한 멋진 일 아닌가?
“세월 흘러흘러 60년/학림은 교림이 될 수도 있지만/여전히 배움의 숲으로 출렁인다//지성과 낭만과 저항…/후대인들이 붙여주는 이름은 늘어도/우리가 원하는 건 그때 그 커피 맛//오늘도 커피 한 잔 시키고/마시기 전 생각이 길어지고/백발이 늘어갈수록 지키고 싶은/그 옛 자리.”(최종고, <학림 추억>)
글 이인우 선임기자iwlee21@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