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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3대조 권세 누린 한명회가
놀던 정자에서 이름 유래
후대에 부관참시, 철저하게 부정당해
마지막 주인은 개화파 박영효
구현대 1차아파트 근처에 푯돌
옛터 배나무밭엔 최고가 아파트군
‘압구정도’와 ‘계화도’가 당시 모습 전해
강남구 압구정동 구현대 1차아파트 근처 압구정 옛터. 정자 터 아래 ‘압구정지’라고 새긴 큰 바윗돌이 이곳이 압구정 터임을 알려준다.
서울은 푯돌의 도시이다. 우리가 흔히 표석, 또는 표지석이라고 일컫는 푯돌은 서울처럼 오래 묵은 도시의 파란만장한 속살을 보여주는 장소인문학의 보물창고이다. 특정 시공간에서 활동한 인물이나 사건의 전말을 묵묵히 말해주는 역사의 파편이기도 하다. 서울에는 300여개의 푯돌이 서 있다.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나 사건이 몰렸기 때문이다. 푯돌은 역사의 층위가 얽히고설킨 곳에 세워진다. 지금은 비록 길 가장자리, 건물 한쪽에 볼품없이 서 있을지라도 반드시 사연이 있다. 서울의 시공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명멸하고 진화해왔는지 온몸으로 증언해준다. 서울을 휩쓴 경천동지할 변화의 지문이 내밀하게 새겨져 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곤 하는 푯돌을 통해 사람·사건의 내막과 장소의 내력을 알아보려 한다. 살아남은 것들도 아름답지만, 푯돌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것이다. <서울택리지> <서울특별시 vs 서울보통시>의 저자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이 연재를 맡아 격주 금요일 아침마다 흥미로운 푯돌의 세상으로 안내해줄 것이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는 압구정이 없다. 강남 시대를 열었고, 뚜렷한 문화코드를 생성했으며, 서울 제일의 부촌으로 군림하는 압구정동에는 동 이름을 증명할 물증이 없다. 실체가 없는 것이 압구정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내력은 이렇다. 압구정(狎鷗亭)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수양대군을 왕위에 등극시킨 뒤 세조-예종-성종 3대에 걸쳐 최고의 권세를 누린 한명회(1415~87)가 지은 정자 이름이다. 2대에 걸쳐 딸 둘을 왕후에 올린 조선 500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척신 한명회의 호이기도 하다.
압구정 터 표지석.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구글 누리집 갈무리
중국 송나라의 명재상 한충헌이 ‘세상사 모두 잊고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는 정자’라는 뜻으로 지은 호를 글자 한 자 고치지 않고 대물림했다. 그러나 한명회는 갈매기와 벗 삼는 척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갈매기와 친하다는 ‘압구’(狎鷗)를, 갈매기를 누른다는 ‘압구’(押鷗)라고 바꿔 말했다. 압구정에 갈매기가 얼씬도 하지 않은 탓이다. 두고두고 놀림감이 됐다.
칠삭둥이 한명회에 대한 후세 평가는 가혹했다. 74세로 죽자 왕조실록에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서, 토지와 금은보화 등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어여쁜 첩들을 많이 두어, 그 호사스럽고 부유함이 한때에 떨쳤다”라는 졸기를 남겼다. 결국 연산군 때 부관참시당했다.
압구정은 권력무상의 대명사다.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은 한명회가 정자에 써 붙인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라는 시를 한 글자씩 고쳐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라고 놀려먹었다.
퇴계 이황의 제자 고봉 기대승은 “거친 숲 엉킨 풀이 높은 언덕 덮었으니/ 그 옛날 성대한 놀이 베풀어지던 일 생각나네/ 인간사 100년이 그 얼마나 되던가/ 안개 낀 강을 바라보며 머리만 긁적긁적”이라고 읊었다.
학봉 김성일은 죽은 한명회를 대놓고 손가락질했다. 다산 정약용도 “압구정 피리 연주 즐거웠겠지/ 그때는 금가락지 미녀를 끌어안았으리/ 지금은 적막한 집 누가 살려 하겠나/ 수양버들 예전 같고 저녁 매미 많이 우네”라고 비웃었다. 압구정이라는 정자와 호는 가식과 허세에 불과했다.
겸재 정선의 ‘압구정도’
압구정은 어떻게 생겼을까. 겸재 정선의 ‘압구정도’ 두 점과 작자 미상의 일본 대화문화관 소장 ‘계회도’가 모습을 전한다. 겸재는 잠실 쪽에서 압구정을 바라보는 장면과 한강 남단에서 압구정을 보는 두 장의 그림을 따로 그렸다.
계회도 속 압구정은 웅장하고, 겸재 그림 속 정자는 한강을 바라보는 높은 언덕에 자리잡았다. 제법 가파른 낭떠러지 위 정자에 담장을 둘렀고, 마루에 난간을 쳤다. 팔작지붕에 부속 건물까지 딸렸다. 10여 칸이 넘는 두 채의 한옥으로 보아 예사로운 정자가 아니라 화려한 별장이었다. 왕이 하사한 시와 당대 문장가들의 시문 수백 편이 장식돼 있었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경관과 호화로움을 자랑하던 압구정의 마지막 주인은 철종의 유일한 부마이자 한때 개화파였던 박영효였다.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리면서 헐렸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22년(1885년) 12월23일자에 “…압구정에 모여 사냥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몰래 우정국에 가서 흉악하고 간사한 짓을 저질러…”라는 기록으로 보아 개화파의 소굴로 낙인찍힌 탓이리라.
압구정은 어디로 갔나? 조선의 시인묵객처럼 정자를 찾아나섰지만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압구정역 1번 출구에서 동호대교를 따라 올림픽대로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수십 동의 거대한 아파트 숲이 앞을 막아섰다. 압구정 옛터는 24개 아파트단지 1만여 세대가 사는 압구정아파트지구 한가운데 파묻혀 있다.
압구정 정자가 있던 언덕에서 내려다본 1961년도 한강변. 앞에 나룻배가 보이고, 오른쪽에 마을굿을 열던 도당터가 남아 있다. 멀리 보이는 곳이 뚝섬이다.
본래 강 건너 옥수동 쪽 저자도와 독서당, 삼각산을 바라보며 제왕의 풍수와 경관을 뽐내던 곳이었다. 1969년 멀쩡한 저자도의 흙과 모래를 파내 강남 쪽 강변을 메운 한강 공유수면 매립공사가 끝난 1972년 저자도는 종적을 감췄다. 압구정 정자 터를 중심으로 마련된 4만8000평의 택지 위에 23개 동 1500가구의 현대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압구정 옛터는 구현대 1차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 비탈진 응달에 달랑 푯돌 하나로 남았다. 서울시에서 세운 공식 푯돌 이외에 안내판을 따로 세웠다. 네모난 공터에는 벤치 8개가 놓였고, 정자 터 아래 ‘압구정지’(狎鷗亭址)라고 새긴 큰 바윗돌이 덩그렇게 서 있다. 인적은 드물었고, 주민들의 반려견 산책 코스인 듯했다.
지대가 높은 74동과 아래쪽 72동 사이에 20개가 넘는 계단이 여러 층으로 나눠 놓여 있었다. 72동 아래로는 신사시장과 20동, 21동, 22동이 나란히 줄을 섰다. 계단 오른쪽으로는 압구정초등학교 건물이 보였다. 정자 옛터와 한강 사이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수십 채의 아파트가 빼곡하고, 올림픽대로가 한강을 가로막고 있다. 압구정 옛터에서 한강까지는 배나무밭이었다고 한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