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돌과 이끼로 ‘바다와 산’ 만든 일본 정원 ‘가레산스이’

⑮ 가장 일본적인 정원의 대명사 교토 료안지 석정과 이끼절 ‘고케데라’

등록 : 2023-05-1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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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없는 정원’ 가레산스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료안지의 석정. 보는 이의 마음을 깊은 선의 세계로 끌어당긴다.

가레산스이, ‘물 없는 정원’이라는 뜻

석재의 조합만으로 ‘선의 세계’ 표현

14세기 선종사찰의 작은 뜰에서 출발

처음 보는 사람에겐 일종의 ‘문화충격’


료안지 석정 의미, ‘정설 없는 게 정설’

고케데라, 120종 넘는 이끼로 뒤덮여


힘든 모래 손질, 선‘ 수행으로 여겨 가능’

“가장 일본적”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일본의 정원은 크게 세 종류가 있다. 연못 중심의 지천회유식정원(연재 9회 가쓰라리큐정원 편 참조)과 다정(茶庭), 그리고 지금 구경해볼 가레산스이(枯山水)정원이다. 13~14세기 선종사찰의 작은 뜰에서 성립하기 시작한 가레산스이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석재의 조합으로 산수의 풍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정원’으로 정의된다. 물론 돌과 모래뿐 아니라 이끼, 식물 등의 소재를 곁들이는 다양한 변주도 가능하다.

산에서 도시로 들어온 선종사원은 넓은 정원터를 구하기 힘들고 연못물을 끌어오기도 쉽지 않자 규모를 축소하는 대신 내용을 더욱 추상화, 상징화한다. 커다란 연못을 만들지 않고 “돈과 허세가 덜 드는” 돌과 모래와 자갈, 혹은 이끼만으로 선승들은 바다와 산, 나아가 내세까지도 표현해내게 됐다. 가장 ‘일본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원 형식이 탄생한 것이다. 교토의 료안지(龍安寺. 세계문화유산), 다이토쿠지 다이센인(大仙院), 그리고 사이호지(西芳寺. 세계문화유산)의 정원이 일본의 대표적인 가레산스이정원으로 꼽힌다.

료안지의 가레산스이정원인 석정(石庭)을 처음 본 사람은 대개 일종의 문화충격 상태에 빠진다. “이건 뭐지?” 정원이라고 하지만 낮은 토담으로 둘러친 공간 안에는 돌과 모래뿐이다.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다.

석정은 방장(선종사찰에서 주지 스님이 기거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 마루 앞의 동서 25m, 남북 10m의 직사각형 마당이다. 그 안에 물결무늬로 물을 표현한 모래를 깔고 15개의 돌을 다섯 군데에 나눠 배치해놓고 있다. 2개 이상의 돌은 누워 있거나 서 있다. 돌 주변은 이끼가 자라거나 모래에 약간 파묻혀 있기도 한다. 이 외는 아무것도 없다. 담장 너머로 나무와 빈 하늘이 차경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예부터 이 석정이 무엇을 말하는지 여러 설이 있었다는데, ‘정설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입구 안내문에 “돌의 배치가 마치 호랑이가 새끼를 데리고 물을 건너는 듯하여 ‘호랑이 새끼 건네기’라고도 불린다는 설명 아닌 설명이 있다. “호랑이는 강을 건널 때 결코 새끼를 한 마리만 데리고 건너지 않는 습성이 있다. 옛말에 사냥꾼이 말하기를, 호랑이가 새끼 세 마리를 낳으면 그중 한 마리는 반드시 무늬가 아름다운 표(彪)가 있다. 이놈은 사납고 사악하여 다른 새끼를 능히 잡아먹는다. 그래서 어미 호랑이는 새끼를 데리고 강을 건널 때 표를 업고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간다. 강을 건넌 뒤에는 다시 표를 데리고 돌아와 먼저처럼 표를 업고 나머지 한 마리를 데리고 물을 건넌다…”. 이것이 과연 이 석정이 중생과 나누고자 하는 선문답일까?

교토 이끼 정원의 명품 중 하나인 기오지(지왕사). 이끼 정원을 돌보는 일은 선수행의 하나다.

아무튼 가레산스이는 가장 일본적인 것으로 일컬어지지만, 정작 일본인도 이처럼 “의미를 알기 어려운” 공간이다. 그래서 가레산스이 구경을 갈 때는 사전 정보가 필요 없다고들 한다. 알아도 쓸모가 없고 오히려 자기만의 감상에 방해될 뿐이란 이유에서다.

가레산스이의 또 다른 특징은 엄격한 공간 구분이다. 가쓰라리큐 같은 연못을 중심으로 한 회유식 정원은 자연과 정원의 경계가 없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서 정원을 감상하고 자연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가레산스이는 미술관의 그림처럼 ‘액자’ 속에 있다.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이다. 특히 석정은 3면이 벽이어서 오로지 방장 마루가 있는 정면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무대와도 같다. 사람은 객석의 관객일 뿐이고, 그 밖의 것은 일체 불필요하다. 료안지의 석정은 그래서 꽃이나 단풍의 아름다움조차 방해물이다.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회색빛 하늘이 드문드문 보이는 겨울 오후나, 나뭇가지에 연두색 새싹이 살짝 올라오기 시작하는 이른 봄의 저녁 무렵이 석정을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계절이란 것도 그런 이유다.

다이토쿠지 다이센인 가레산스이는 산수화를 묘사한 가레산스이 중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료안지의 석정이 깊은 사색을 요구한다면, 다이토쿠지(대덕사)에 있는 다이센인 가레산스이는 자연풍경을 구상화한 산수화의 세계이다. 피안을 찾아가는 불교적 세계관을 담은 한 폭의 그림을 오직 돌과 모래만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절묘한 ‘입체 산수화’의 내용은 설명을 들으면 굳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지만, 각 주제와 소재에 맞춤한 석재들을 구해다가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조합’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어려울 것만 같다.

가레산스이정원은 선불교의 전래와 확산, 중국 남종화의 유행 등 종교·문화적 영향과 중세 일본 사회의 계급갈등 등 경제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생겨났다. 귀족들이 막대한 재력을 동원해 대형 정원을 만들었다면, 선종 승려들은 돌과 모래만으로 작은 공간에 대자연의 세계를 묘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중 소재를 이끼에서 찾은 것도 있다. 하찮은 미물인 이끼의 ‘푸르름’ 속에서 그들은 더 높은 차원의 종교적 가치를 발견했던 것 같다. 숲의 그늘 속에서 바위와 나뭇등걸을 뒤덮은 이끼 위로 햇빛이 비쳐드는 광경은 그런 선승의 마음을 충분히 상상하게 한다.

난젠지 곤치인(금지원) 가레산스이는 학과 거북의 묘사가 일품이다.

교토 서쪽 교외에 자리잡은 고찰 사이호지는 통칭 ‘고케데라’(苔寺. 이끼의 절)라고 불릴 만큼 이끼의 정원으로 유명하다. 120종류가 넘는 이끼가 정원의 마당을 푸르게 물들인 모습은 압권이다. 8세기에 창건되고 14세기에 재건됐다는 고케데라는 ‘일본 가레산스이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데, 정원을 만든 이가 무소 소세키(1275~1351)라는 승려로 일본 정원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이웃한 덴류지의 정원(세계문화유산)도 이 사람의 작품이고, 긴가쿠지(은각사. 세계문화유산)의 모델이 된 것도 이 절이다. 그만큼 자부심이 높은 때문인지 우편을 통한 사전예약제, 높은 입장료 등 관람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관광 일정상 고케데라를 ‘직관’하기 어려운 분에게는 대안으로 교토시 서북쪽 지역 ‘사가노’의 기오지(지왕사)를 추천한다. 덴류지가 있는 아라시야마에 들렀다면 시간을 내보기 바란다. 푸른 이끼가 주는 고요한 선경의 느낌만큼은 충분히 얻어올 수 있을 것이다.

가레산스이는 일본 전역에 있지만 특별히 교토의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데는 하늘과 나무 등 자연을 차경으로 끌어들이기 좋은 도시 조건이 작용하지만, 절집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교토 절 특유의 ‘테이레’(손질)를 꼽기도 한다. 교토 사찰의 자부심이랄까 경쟁심 같은 것도 작용하겠지만, 전통적으로 교토의 선종사원에서는 고된 정원 손질도 수행의 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2014년 시민 참여로 제작된 짓소인(실상원)의 ‘현대적’ 가레산스이. ‘일본국’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사시사철 모래마당을 어떤 일관된 이미지로 유지 관리하는 일에 비하면 비행장의 폭설을 치우는 사역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이끼는 그 이상이다. 이끼는 그냥 둬도 자라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의 생명을 원하는 형태로 유지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고 한다. 이끼는 무려 1600여 종이 있다고 한다. 애초 이런 정원의 창안자가 선종수행승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면 ‘테이레 설’은 충분히 수긍이 갈 만하다.

가레산스이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이사무 노구치(1904~1988)라는 일본계 미국인 건축가의 공이 크다. 노구치는 선 사상을 바탕으로 한 건축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는데,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이 바로 이 가레산스이였다. 가레산스이는 특히 서양 관광객의 인기 코스인 것 같다. 교토 여러 곳의 가레산스이정원에서는 멍때리기를 하는 ‘백인’을 종종 볼 수 있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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