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교토 근교 트레킹 코스에선 ‘신라 독경 소리’ 들리는 듯

㉖ 가을이 기다려지는 교토 북쪽 오하라(大原)의 ‘극락정토’ 절들

등록 : 2023-10-19 16:34 수정 : 2023-10-2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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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땔감과 숯을 공급하던 오하라

6.5㎞ 코스엔 ‘정토세상’ 느낌 절 즐비

산젠인, 불당·정원 아름다워 발길 북적

잣코인, 비극의 왕비 살던 곳으로 유명


일본 불교 천태종 염불·독경의 발상지

염불 전파자, 신라방서 ‘신라성명’ 배워


절을 감싼 두 계곡엔 ‘율려사상’ 흔적도

오하라특산 장아찌 ‘시바즈케’ 교토명물

산젠인(三千院) 절의 본당인 왕생극락원. 연못 위에 떠 있는 듯한 이 불당은 배 모양의 천장 아래 아미타삼존불상이 안치돼 있다. 객전에서 보면 거목의 삼나무들에 둘러싸여 신비감을 더한다.

교토시 동북쪽 농촌 마을 오하라(大原. 교토시 사쿄구)는 교토의 가을 패키지여행 코스에서 잘 빠지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 자리잡은 몬제키사원(왕족사찰) 산젠인(三千院)의 경관과 단풍이 아름답기로 소문나 있다. 관광객에게 치이는 단풍철을 피해도 4계절 모두 충분히 아름답다. 봄에는 벚꽃과 전원의 채소꽃, 여름에는 자줏빛 차조기밭, 가을은 상사화와 코스모스가 한적한 시골길을 파노라마처럼 물들인다. 눈이 드문 교토에서 오하라의 설경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하라는 옛날에 교토에 땔감과 숯을 공급하던 근교 농업지대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멀 수도, 가까울 수도 있는 산중이어서 교토의 귀족이나 권부층의 은거지로도 애용됐다. 오늘날에도 그 지리적 ‘이점’이 오하라 일대를 교토 외곽의 인기 높은 트레킹 코스로 만들어주고 있다.

산젠인 유세이엔(有淸園)은 왕생극락원을 둘러싸고 있는 지천회유식 정원이다. 맑은 연못, 초록의 이끼밭과 단풍나무 숲이 잘 어우러진 교토 명정(名庭)의 하나로 꼽힌다.

교토역 기준으로 한 시간 거리인 오하라로 가려면 교토와 동해 쪽 바다를 잇는 사바카이도(鯖街道)를 타야 한다. 사바카이도는 동해에서 잡힌 사바(청어)가 교토로 운반되는 길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버스를 타고 노무라와카레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오하라 마을 쪽으로 걸어가면 신선 채소와 가공식품을 파는 ‘사토노에키오하라’(방문객을 위한 휴게소)가 나온다. 대부분 사람이 여기서 간단히 요기하거나 준비한 뒤 본격적인 트레킹에 들어간다. 천변을 따라 산책로 ‘사쿠라이 길’을 걸어 잣코인(寂光院) 절을 먼저 구경한 다음 되돌아나와 산젠인 일대를 돌아본 뒤 오하라버스정류장으로 가서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면 6.5㎞, 약 1만3천 보의 트레킹이 즐겁게 끝난다.

오하라 구경의 축은 산젠인이다. 절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주변에 흩어진 다른 절에 접근하는 중심이 된다. 같은 천태종계의 고찰인 쇼린인(勝林院), 호센인(寶泉院), 라이고인(來迎院), 짓코인(實光院) 등이 산젠인과 더불어 오하라 산중에 하나의 ‘정토(淨土) 세상’을 이루고 있다.

슈헤키엔(聚碧園)은 객전에 앉아서 감상하기 좋게 꾸며져 있다. 유세이엔의 하정(下庭)을 이룬다.

산젠인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절보다는 승병들의 성채처럼 보인다. 이는 교토 몬제키사원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산젠인의 본당은 ‘왕생극락원’이다.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된 문호 이노우에 야스시(1907~1991)가 “보석상자 같다”고 상찬한 이 불당은 배를 엎어놓은 모양의 천장 아래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여래삼존불(국보)이 주석하고 있다. 호위하듯 불당을 둘러싼 거목의 삼나무들이 신비감을 더하며 ‘정토’의 분위기를 물씬 자아낸다.

산젠인에는 고저 2면의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높은 지대의 유세이엔(有淸園)은 왕생극락원을 끼고 도는 지천회유식 정원. 구름과 산이 들어앉은 연못, 깊고 푸른 이끼, 비껴든 햇살, 낮게 가지를 드리운 단풍나무의 녹색이 유현미(幽玄美, 그윽하고 아리송한 아름다움)의 절정을 연출한다.

유세이엔 이끼밭의 지장보살 동자석. 지장보살은 어린이를 지키는 부처로 일본 민중에게 가장 친숙한 불교신이다.

이끼밭에 숨은 듯이 놓인 지장보살 동자석도 꼭 찾아보기 바란다. 자기를 알아보는 이에게 반가운 듯 천진한 미소를 띠어준다. 객전에서 쉬며 바라보는 슈헤키엔(聚碧園)은 연못과 식물의 조화가 아름다운 관상정원이다.

짓코인은 산젠인 앞 참도 왼쪽에 있고, 거기서 쇼린인을 거쳐 수령 700년의 오엽송과 대나무숲이 유명한 호센인으로 길이 이어진다. 산젠인에서 나와 동쪽으로 가면 라이고인 절이다. 라이고(來迎)는 임종한 사람의 영혼을 극락정토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부처나 보살을 가리킨다. 라이고인 뒤 산길을 올라 작은 다리를 건너면 ‘오토나시노타키’ 폭포다. 오하라 트레킹의 종착점이다.

산젠인 옆을 흐르는 리쓰센(律川). 이웃한 라이고인의 료센(呂川)과 함께 율려(律呂)의 강을 이룬다. 신라 독경의 전설이 서려 있다.

오하라는 한국인에게는 조금 특별한 곳일 수 있다. 오하라는 일본 불교사에서 천태종 성명(聲明)의 발상지로 꼽힌다. ‘성명(聲明)’이란 범패(梵唄:불교음악)의 한 종류로서, 음률에 맞춰 읊는 염불이나 독경을 말한다. 일본 천태종의 교조 중 한 사람인 지카쿠(慈覺)대사 엔닌(円仁. 794~864)이 서기 860년 이곳을 교산(魚山. 중국 천태산 서쪽의 지명. 엔닌이 수학한 곳이다)이라 칭하고 “성명업(聲明業) 정사(精舍)”를 세운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이것이 한국인에게 특별하다고 한 것은, 엔닌이 중국에서 들여왔다는 천태종 성명이 사실은 ‘신라 성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엔닌은 중국 유학 시절 신라방에서 신라불교를 배울 때, 신라성명을 접하고 이를 기록(<입당구법순례행기>)에 남겼다. <신라신사와 고대일본>(2004)의 저자 데와 히로아키는 이와관련해 “엔닌은 ‘성명은 신라 성명이 제일이다’라고 하여, 신라 성명을 천태 성명으로 도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이 맞는다면, 이른바 ‘오하라교산류’ 성명의 실상은 중국이 아니라 신라 성명인 셈이다.

잣코인(寂光院) 입구 계단. 잣코인은 일본 고대소설 <헤이케모노가타리>(平氏物語)의 무대로 유명하다. 절도 무척 고요하고 아름답다.

한편, 산젠인과 라이고인에는 각각 리쓰센(律川)과 료센(呂川)이란 이름의 두 계곡이 흐른다. 율려(律呂)는 6개의 양률과 음려로 이뤄진 12음계가 태극을 이루며 합쳐져 천지의 소리가 완성된다는 음악이론인데, 이는 이 ‘성명업 정사’들이 음양사상과도 밀접하게 닿아있음을 보여준다. 일찍이 최치원(857~?)이 말한 신라의 ‘풍류도’(風流道)에도 음양사상이 담겨있었다고 여겨지며, 근래에는 고 김지하 시인이 자신의 생명사상을 ‘율려사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산젠인 절의 연보에 따르면, “산젠인은 일본 천태 성명의 발상지로서, 성명에 대한 ‘구전서’(口傳書)와 <궁중어참법강>(宮中御懺法講) 등의 불교음악 자료가 전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전적문서류 3021점(중요문화재 지정)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 생각으로는 이 안에 신라 성명 연구는 물론, ‘고한국어’ 발굴의 중요한 실마리가 숨어 있을 것도 같다. 한·일 어느 쪽이든 한번 연구해봤으면 좋겠다.

‘오하라메의 길’ 표지석. 교토 시장에 땔감을 이고 가 팔았다는 오하라메(大原女)는 생활력 강한 교토 여성을 상징한다. 매년 봄가을 기념 마쓰리가 관광 이벤트로 열린다.

오토나시노타키 폭포는 ‘소리 없는 폭포’란 뜻이다. 11세기에 천태 성명을 부흥시켰다는 료닌이라는 승려가 낭랑한 성명으로 폭포 소리를 잠재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신라 성명에 얽힌 전설, 율려의 계곡, 소리 없는 폭포…. 신라의 서라벌 어느 산사에서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새벽 독경 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질 법하지 않은가?

오하라에는 산젠인 주변 말고도 유명한 것이 몇 가지 더 있다. 사바카이도를 경계로 산젠인 반대편에 있는 잣코인은 비운의 여성이 살다간 사찰이다. 일본 헤이안 시대 최대 권문이었던 다이라씨(平氏)가 겐지(源氏) 가문에 패하여 멸망할 때, 왕실에 시집간 다이라씨 왕후가 7살 난 아들(왕)을 안고 투신했다가 구조돼 이곳 잣코인에서 비운의 비구니로 살다 갔다. 이 비극은 일본 전통극 노(能)와 소설 <헤이케모노가타리>로 일본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오하라메의 길’ 표지석. 교토 시장에 땔감을 이고 가 팔았다는 오하라메(大原女)는 생활력 강한 교토 여성을 상징한다. 매년 봄가을 기념 마쓰리가 관광 이벤트로 열린다.

두 번째는 일본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오하라메’(大原女)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머리에 땔감을 이고 교토에 나와 팔던 여성들로, 꽃을 파는 동쪽의 시라카와메(白川女), 생선을 팔던 서쪽의 가쓰라메(桂女)와 더불어 생활력 강한 교토 여성을 상징했다고 한다. 오하라메는 잣코인에서 비운의 왕비를 모시던 시녀가 생활을 위해 감색 통소매 상의, 앞 묶음을 한 허리띠, 천으로 감싼 손발, 발목 각반과 짚신 차림으로 시장에 나선 것이 시초가 됐다는 전설이 있다. 참가자들이 오하라메를 재현하는 이벤트 ‘오하라메마쓰리’가 봄가을에 열린다.

오하라 장아찌 ‘시바즈케’(柴漬け)도 빼놓을 수 없다. 오하라 특산의 향기 좋은 붉은 차조기(紫蘇)잎에 가지, 오이, 양하 등을 함께 절여서 발효시킨 이 절임음식은 센마이즈케(千枚漬. 무나 무청을 얇게 썰어 미림·누룩 등에 절인 것), 스구키즈케(가미가모신사에서 시작된 시큼한 순무절임)와 함께 교토 3대 쓰케모노(漬物. 소금·초·된장·지게미 등에 절인 저장 식품의 총칭)로 꼽힌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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