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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원에 놓은 중고거래 교환함, 상인-주민 ‘함께’ 갈 새 미래

등록 : 2021-04-2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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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남가좌2동, 생활상권 활성화 위한 기반사업 추진

주민들, 상인과 추진위 꾸려 ‘함께가게’ 22곳 운영 나서

가좌지역 생활상권 기반사업으로 만들어진 커뮤니티 스토어 ‘함께가게’ 22곳이 14일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생활상권 기반사업은 기존 가게에 편의서비스를 얹어 주민들이 동네 가게를 더 많이 찾게 하는 사업이다. 함께가게는 중고거래 물품 교환함, 공유 장바구니, 공유 컵, 공유 공간 등 무료 대여서비스를 주민에게 제공한다. 1 커뮤니티 스토어 ‘함께가게’ 지도.(가좌지역 생활상권 기반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편의서비스 잘 유지되면 동네 가게 더 많이 찾을 것 같아요”

카페·베이커리·떡집·안경점 등에서

중고거래 교환함과 공유 장바구니,

공유 컵 비치해 주민들 손쉽게 이용

시범 뒤, 3개년 육성사업 추진 결정


서대문구 남가좌2동에 있는 씨웰안경원에는 다른 안경원에서는 볼 수 없는 물건이 여럿 있다. 어린아이 장난감도 있고 책도 있고 드럼도 있다. 최근 2단짜리 초록색 사물함이 새로 들어왔다. ‘걸어서 와~ 남이동 길은 처음이지?’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번호키가 달려 물건을 안심하고 맡기고 찾을 수 있다. 중고물품을 거래하는 주민들이 길거리 대신 이용하면 안성맞춤이다. 나진수 대표는 “주민에게 편의서비스를 제공하면 당장 매출이 늘지 않더라도 가게를 알릴 수 있고 동네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추진위원이 씨웰안경원에 들어가고 있다.

지난 14일 남가좌2동 생활상권에서 씨웰안경원처럼 주민에게 생활편의서비스를 제공하는 커뮤니티 스토어 ‘함께가게’ 22곳이 운영을 시작했다. 생활상권은 동 주민센터, 학교, 버스정류장 등에서 걸어 10분 이내 범위의 상권으로 골목상권이라고도 한다. 서울시는 2019년부터 생활상권 활성화 사업을 해왔다. 기존 가게에 생활편의서비스를 얹어 주민들이 동네 가게를 더 많이 찾게 하는 사업이다. 추진 주체는 주민, 상인, 지역단체 등이다. 일정 기간 기반사업으로 시범 운영해 성과가 좋으면, 3년에 걸쳐 육성사업으로 발전시킨다.

현재 자치구 19곳에서 기반사업이 추진되고 있고, 남가좌2동도 그 가운데 하나다. 명지대 앞 2차로 거북골로 주변은 아파트 밀집 지역이다. 래미안 루센티아 아파트, DMC에코자이 아파트, DMC센트럴아이파크 아파트 등 뉴타운·재건축 사업이 끝난 단지들이 입주를 마무리했다. 2017년에 견줘 가구 수는 9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생활상권은 기대만큼 활성화되지 않아 변화가 필요했다.

지난해 9월 주민 중심의 가좌지역 생활상권 기반사업 추진위원회가 꾸려졌다. 지역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대표, 주민자치회 위원 등 4명과 상인 1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8명이 활동하고 있다. 5개월 동안 주민 욕구를 파악하고 운영계획을 세웠다. 지난해 12월부터 3개월간 주민 목소리를 듣기 위한 설문조사와 표적 집단면접(FGI) 4회를 진행했다.

카페 어뮤즈그라운드 입구에 있는 중고거래 물품 교환함.

상인 대상 설문조사도 곁들여 함께가게들이 주민에게 제공할 편의서비스 3가지를 정했다. 당근마켓 등 중고품 거래 때 이용할 수 있는 물품 교환함, 공유 장바구니와 공유 컵 무료 대여 서비스다. 공유 컵은 일회용품을 대용하는 다회용 컵 공유 플랫폼 ‘보틀클럽’과 연계했다.

지난 3월 리플릿을 만들어 함께가게 공개모집을 위한 홍보를 시작했다. 지역명인 남가좌2동을 기억하기 쉽게 남이(2)동으로 정해 홍보문구로 썼다. 추진위원들은 500여 곳 점포에 홍보물을 돌리고 100여 곳은 일일이 찾아다니며 취지를 알리고 공모에 참여하도록 안내했다. 취지에 공감하는 가게들이 2주 만에 목표 수에 알맞게 지원했다. (지정 편의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정부문엔 카페, 베이커리, 안경원, 떡집, 생협 등 15곳, 자유부문엔 사진관, 공방, 꽃집, 작은도서관 등 7곳이다.

추진위원들이 노블베이커리에서 빵을 사 공유 장바구니에 담고 있다.

지정부문 함께가게들은 물품 교환함, 공유 장바구니, 공유 컵과 소독기 등을 매장 여건에 맞춰 선택해 비치한다. 카페 어뮤즈그라운드는 물품 교환함과 공유 컵·소독기를 뒀다. 이동형 대표는 “방역수칙만 잘 지키면 사회적 거리 두기 상황에도 괜찮을 것 같고, 매장 홍보에도 도움이 되는 등 조금이라도 활력을 가져오지 않을까 싶어 참여했다”고 했다.

물품 교환함은 매장 사정에 따라 실외에 두기도 한다. 대부분 점주 혼자 운영하는 작은 가게라 교환함을 둘 공간이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다. 분실이나 파손, 일손 추가를 걱정하는 상인도 있다. 이영희 추진위원장은 “상인 의견을 반영해 관리에 도움이 되는 방안을 마련해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카페 어뮤즈그라운드 입구 테이블에 놓인 공유 컵과 소독기.

자유부문 함께가게들은 자체적인 주민 편의서비스를 제공한다. 모임 공간, 생활용품 만들기 프로그램, 진로체험과 상담 등이다. ‘그림그리는 사진관’에선 어르신 대상 스마트폰 사진 인화 서비스를 한다. 최차랑 대표는 “동네 사람들 모습을 사진과 그림으로 담아주는 일과 더불어 문화 콘텐츠 기획에도 관심이 많다”며 “여건이 되면 ‘남가좌동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동네 어르신들의 정겨운 모습이 담긴 작은 사진전을 열고싶어 지원했다”고 했다.

추진위원회는 이달부터 주민 홍보를 본격적으로 해나간다. 동 주민센터에 펼침막을 붙이고 구청 누리집에 올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한다. 지역 맘카페에도 알리고 소규모 찾아가는 공유회도 연다. 이 추진위원장은 “격주마다 한 곳의 함께가게 사례를 선정해 이용 주민이 경험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도 운영하려 한다”고 했다.

추진위원인 주민이 가장 먼저 변하고 있다. 김숙희 위원은 “40년 넘게 산 토박이지만 3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느라 동네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며 “부족하지만 이웃과 소통하고 이웃의 필요에 관심을 갖게 돼 좋다”고 했다. 전상은 위원은 “동네 소비로 활력이 생기고 동네가 좋아지는 선순환 구조를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상인도 주민도 이번 사업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동형 카페 어뮤즈그라운드 대표는 “생활상권 활성화가 이뤄지려면 상인과 주민 모두에게 이점이 있어야 하고, 이런 이점이 지속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주민 이정화씨는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들어가고 나올 수 있고, 중고거래 물품 보관 등 편의서비스가 잘 유지되면 동네 가게를 더 많이 찾을 것 같다”고 했다.

추진위원들이 14일 함께가게 참여 점포 탐방에 나섰다.

남이동 함께가게는 10월 말까지 시범 운영된다. 이후 평가를 거쳐 육성사업으로 이어질지 결정된다. 이 추진위원장은 “기반사업에서 주민과 상인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활동하고 있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본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육성사업으로 선정되지 못하면 주민자치회 중심으로 방안을 모색해 이어가는 것도 논의해보려 한다”고 덧붙였다.

생활상권 활성화 사업이 기반 단계를 넘어 육성사업으로 진행되는 자치구는 현재 5곳이다. 종로(창신동), 관악(난곡동), 양천(신정동), 서초(방배동), 송파구(가락동)다. 이곳들은 커뮤니티 스토어, 상인 마케팅 스터디그룹, 지역 소식을 전하는 마을기자단 ‘우리동네 사람들’ 등을 운영한다. 커뮤니티 스토어의 주요 편의서비스는 무인택배함(난곡, 신정, 방배), 공유 프린터(난곡, 창신, 신정, 방배), 에코백 대여(난곡, 방배), 사진 인화(난곡, 방배), 돌봄·회의 공간 등이다.

지역 특성에 따른 차별적 서비스도 있다. 가락동에선 언덕에 있는 카페가 커뮤니티 스토어로 참여해 매장 앞에 ‘가치벤치’를 설치했다. 주변에 학원 차를 기다리는 아이가 적잖아, 교통사고 위험을 걱정하는 주민이 많았다. 벤치 설치 뒤 아이들은 벤치에 앉아 안전하게 차를 기다리고, 언덕을 올라오느라 힘든 어르신들은 잠시 쉬어가는 등 반응이 꽤 좋다. 창신동은 경사가 급한 동네 지형에 맞춰 비 올 때 우산을 가지러 다시 올라가는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커뮤니티 스토어에서 우산 대여 서비스를 한다.

생활상권 육성사업은 2023년까지 이어진다. 서울시의회 김인제(더불어민주당·구로4) 포스트 코로나 대응 및 민생안정대책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생활상권이 대기업, 프랜차이즈, 온라인 쇼핑몰 등에 밀려나는 가운데 코로나19로 상인들이 더 힘든 상황에서이 사업은 서민경제에 활력을 찾을 수 있는 매개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은 “서민경제 살리기는 서울시와 시의회가 힘을 모아 이어가야 한다”며 “예산이 안정적으로 확보될 수 있게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

가좌지역 생활상권 기반사업 추진위원회가 14일 공유 공간 ‘새로고침’에서 주간 회의를 열어 함께가게를 주민들에게 알리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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