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를 이용한 소통

“학습 교구 사용, ‘코로나 교육 양극화’ 완화에도 도움”

학습 교구 200여 종 만든 ‘학토재’ 하태민 대표

등록 : 2021-07-01 14:07 수정 : 2021-08-25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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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촌 공부방 봉사 뒤 ‘교사’ 진로 선택

03년 공립 대안 ‘꿈타래’ 개설 멤버로

‘학생 학습 향상 목적’ 교구 처음 만들어

11년엔 ‘토종’ 교구 제작사 학토재 설립


뇌교육 박사 받고서 대학교수 됐지만

‘논문 쓰기보다 교구 만들기 중요’ 판단

7년 반 만에 교수 사직 뒤 학토재 전념


‘현직 교사 개발 교구 전파 플랫폼’ 꿈


코로나로 재택수업하는 초·중·고생들

플래너와 부모의 따뜻한 말 큰 ‘효과’

하태민 학토재 대표가 지난 6월25일 학토재 사무실 안에 마련된 교구 전시실에서 밝게 웃고 있다.

‘교육도구 개발에 인생을 건 사람.’

교구 제작·판매 회사인 ‘학토재’의 하태민 대표를 가리키는 말이다. ‘도구가 아닌 가치를 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토재는 2011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200여 종의 우리 교육 현실에 맞는 ‘토종’ 교육도구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하 대표는 이 가운데 90% 이상의 교구를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교구, 즉 교육도구는 교육 과정에서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보재도구다. 학습효과를 높이는 제대로 된 교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한 사람이 그 많은 교구를 만들 수 있었을까?

궁금증을 안고 지난 6월25일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학토재 사무실을 찾았다. 30평 남짓한 사무실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교구 전시실이 방문객을 맞이했다. 전시실 한편에는 학토재에서 만든 교구들이 빼곡히 벽에 걸려 있고, 다른 한 면에는 각종 교육 기관·단체와 맺은 협약서와 함께 감사장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인사를 나눈 뒤 바로 하 대표에게 교구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시범을 한번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하 대표는 웃으며 ‘피사의 사탑 쌓기’라는 교구를 꺼냈다. 나무로 된 원통형 조각과 정육면체 조각들을 함께 쌓는 것이었다.

이것들을 단순히 쌓기는 너무 쉬워 보였지만, 하 대표가 보인 시범을 보고는 “아하”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먼저 쌓기 전에 쐐기 모양의 조각을 바닥에 깔고 나니 나뭇조각 쌓기가 만만치 않았다. 더욱이 조각 하나하나를 6개의 줄을 단 고무밴드로 들어 올리는 작업이 보태지니 난도는 훨씬 높아졌다. 6개의 줄을 한 사람씩 잡고 고무줄을 늘여 나뭇조각을 하나씩 끼운 뒤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작업이었다. 이런 작업을 통해 6명으로 이루어진 팀 구성원들이 협동력을 기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각각의 교구는 이렇게 놀이처럼 다가가면서도 교육에 필요한 지식과 교훈을 주도록 구성돼 있다고 했다. 하 대표는 과연 이런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은 걸까?

“1996년부터 10년 이상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의 학습 능력 향상을 위해 직접 교구를 만든 것이 출발점입니다.”


대기업 3곳 합격했지만 교사 되려고 포기

하 대표의 교사 경력은 매우 독특하다. 1987년에 대학에 들어간 하 교수의 전공은 전자통신이었다. 당시 인기가 높은 전공이어서, 군대 등을 마치고 4학년이 된 1994년 5월에는 이미 삼성·현대·엘지 등에 모두 합격한 상태였다. 하지만 하 대표는 대기업행을 포기하고 1995년 2월 실시하는 교사 임용고시에 도전하기로 한다. 대학 시절 빈민촌 공부방 봉사활동을 경험하면서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1995년 임용고시에 합격한 하 대표는 그다음 해에 서울의 한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의 첫발을 뗐다. 하지만 학교 현실은 하 대표의 기대와 달랐다. “교직 사회가 매우 관료적이어서 아이를 위한 것인지 어른을 위한 것인지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하 대표는 그때 막 태동하던 대안학교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신촌에 있던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연 3개월 과정의 ‘대안학교 교사 양성’ 과정에 등록했다. 같은 기수 40명 중 현직 교사는 그가 유일했다.

하 대표의 이런 노력은 2003년 서울시교육청이 만든 ‘공립 위탁형 대안학교’인 꿈타래학교가 탄생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꿈타래학교는 자퇴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학생들을 맡아 자유롭게 교육하는 곳이다. 하 대표는 꿈타래학교 설립 과정 컨설팅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학교 개설 멤버가 됐다. 당시 서울시교육청 소속 교사 중 하 대표만큼 대안학교 교육을 알거나 고민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태민 학토재 대표가 지난 6월25일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학토재 사무실에서 ‘피사의 사탑 쌓기’ 등 교구의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하 대표는 고등학교 교사와 대 학교수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200여 종의 학습 교구를 만들었다.

잡지 오려 만든 ‘이미지 카드’ 큰 효과 보여

하 대표는 이곳에서 처음 교구를 만들었다. 아이들과 대화를 시도해도 아이들이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는 현실을 개선해보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 가령 영화를 본 뒤 얘기하는 경우 하 대표는 사진을 여러 개 펼쳐놓고 아이들에게 한 장을 선택하게 한 뒤 영화를 본 소감을 말하게 했다. 평소 “좋아요” “싫어요” 등 짧은 문장으로 말하던 아이들이 사진을 고른 뒤에는 길게 자기 얘기를 했다.

‘교구의 힘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한 하 대표는 여러 잡지에서 다양한 사진을 수집한 뒤 코팅을 해서 본격적으로 아이들 교육에 활용했다.

하 대표는 이어 꿈타래학교 아이들을 위한 플래너도 만들었다. A4 용지에 줄을 그어 만든 플래너는 아이들의 학교생활 일지다. 학교에 도착한 시간, 오늘 할 일, 수업시간에 배운 것 등을 적게 돼 있다. 하 대표는 그렇게 자신의 생활을 적는 것이야말로 ‘자기 주도 학습’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한다. 하 대표는 또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 자아선언문이라는 교구도 만들었다. 이 교구는 “나는 주위의 모든 사람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처럼 “나는 ~ 사람이다”라는 형식으로 된 카드들로 구성됐다. 아이들이 매일 하나씩 뽑아 문장을 읽으면서 자존감을 높일 수 있게 구성돼 있다.

하 대표는 이와 함께 좀더 효율적인 교구를 만들기 위한 공부도 꾸준히 이어갔다. 대학원에 진학해 진로상담으로 석사학위를, 뇌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이다.

하 대표는 이런 준비과정을 거친 뒤 2011년 학토재를 만들었다. 출발 당시 학토재는 하 대표가 꿈타래학교 시절 만든 세 가지 교구로 출발했다. 지금도 학토재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이미지 프리즘’과 ‘징검다리 플래너’ ‘자아선언문 카드’가 그것이다.

사실 학토재를 창립할 당시 하 대표는 교사 생활을 정리한 뒤 한 사이버대학 교수로 임용된 상태였다. 하지만 하 대표는 2018년 7년 반 동안의 교수 생활도 스스로 그만둔다. 학토재에 전념해 좀더 많은 교재를 만들기 위해서다.

“당시 교수 평가를 위한 논문도 많이 써 교내 평가 1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논문을 쓰는 데 들이는 시간으로 교구를 만들면 더 많은 학생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습니다.”

2018년 학토재 운영에 전념하기 시작한 하 대표는 이후 교구 문화를 넓히기 위해 더욱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게 그 이전에는 하 대표 중심이던 교구 제작진 풀을 넓힌 점이다.

“지금 현직에 종사하는 교직자 가운데는 교육현장에서 나온 교구 아이디어를 가진 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학토재가 이분들의 아이디어를 교구로 제작해 보급하는 플랫폼이 되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실제로 학토재에서는 현재 부산의 한 현직 선생님이 개발한 독서 교육 교구 ‘독서마블’ 등 현직 종사자들이 만든 교구를 늘려가는 상태다.


내년, 교육 낙후 지역에 교육재단 설립 계획

하 대표는 교육·교구 전문가로서 코로나 팬데믹 사태가 몰고온 학력 불평등 심화 현상을 완화하는 데도 교구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재택수업이 많은 학생의 경우에도 플래너를 이용하거나 자아선언문 카드에 나오는 긍정적인 문장들을 매일 읽는다면 자기주도학습이나 자존감 향상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그러나 꼭 제품을 사지 않더라도 부모들이 A4 용지에 줄을 쳐 만들어주거나, 아이들을 위한 문장을 직접 선정해 들려줘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의 학습 능력 향상을 위해 애써온 하 대표는 내년에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교육 서비스가 낙후된 지역 아이들을 위한 교육재단을 만드는 것이다. 하 대표는 “재단의 모토를 ‘기회에서 희망으로’로 정하고 현재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교육도구 개발에 인생을 건’ 한 교사의 꿈은 하나하나 열매가 되어 다시 아이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피사의 사탑 쌓기’ ‘나뭇돌 쌓기’ 등 학토재에서 만든 교구들.

글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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