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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6일, <마이니치신문> 계열의 방송사인 티비에스(TBS)에서 일본의 전설적인 가수 겸 배우인 고 미소라 히바리와 국민배우로 추앙받는 고 이시하라 유지로에 대한 특집 방송이 있었다. ‘실록 히바리와 유지로’라는 타이틀의 ‘쇼와의 일본을 조명한 두 개의 태양이 있었다’라는 주제로 약 3시간에 걸쳐 방송됐다.
쇼와(昭和:1926~1989)는 일제강점기에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망자 히로히토가 일왕으로서 재임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미소라 히바리와 이시하라 유지로도 쇼와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두 사람 모두 52세 때 각각 병으로 사망했다.
미소라 히바리는 어머니가 일본인, 아버지가 한국인이다. 하지만 그녀가 어렸을 적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한국 여인과 재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공식적인 그녀의 출생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완벽하게 일본인으로 되어 있다. 그녀의 존재감은 ‘일본의 이미자’급이지만 미소라 히바리가 영화나 각종 무대활동을 한 것을 보면 다재다능한 만능 엔터테이너로 보면 될 듯하다.
이시하라 유지로는 도쿄도지사를 네 번 역임한 극우 정치인이자 소설가인 이시하라 신타로(84)의 두 살 아래 친동생이기도 하다. 그의 노래는 저음으로 솜사탕처럼 부드러워, 우리나라 원로 가수 최희준 씨 목소리와 대단히 흡사하다.
이날 방송을 보면서 놀란 것은 티비에스가 보여준 자료화면이었다. 여덟 살에 데뷔한 미소라 히바리가 열두 살 때 대히트시킨 ‘도쿄 부기우기’의 공연 모습, 그리고 이시하라 유지로가 영화배우로 데뷔하자마자 인기 스타가 돼 구름 팬을 몰고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1940년대의 흑백 영상인데도 불구하고 화면이 너무나도 깨끗했다. 70여 년 전의 흑백필름이 저리도 깨끗하고 선명하다니, 일본의 기술을 부러워해야 할지 아니면 자료 영상의 보존성을 부러워해야 할지,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사람이 가수 진미령이었다. 언젠가 그녀가 일본에 왔을 때 일본 연예계 환경을 부러워하면서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진미령의 대표적인 히트곡은 1977년 ‘MBC 서울가요제’에 출전할 때 불렀던 노래 ‘소녀와 가로등’이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당시 그 곡을 작곡한 17세 소녀 장덕과 그 노래를 부른 당신 모두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그랬더니 진미령 씨가 정색하고 말했다. “저도 아쉬워요. 그런데 그 당시 필름이 하나도 없어요.”
사연인즉 이랬다. 19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방송사의 환경이 워낙 열악해서 한 번 쓴 필름을 다시 덮어씌워 촬영하는 방법으로 필름 값을 절약했단다. 그래서 자신의 방송 출연 영상자료가 아예 없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런 사정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가수들의 영상자료까지 일절 없다는 것이다.
이건 경제적인 문제만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의식의 문제다. 일본은 1945년 패전 후 전 국토가 폐허가 된 절체절명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한번 촬영된 영상은 그대로 온전히 보존했다. 이런 일본인들의 의식의 저변은 과거 역사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서기 578년, 일본은 당시 백제의 건축 장인들을 불러 오사카에 사천왕사를 건립했다. 하지만 지진이 빈번한 일본은 나중에 붕괴하였을 경우 보수할 때를 대비, 백제인 류중광 일행을 설득해 일본에 정착하게 했다. 이들은 훗날 호류사(법륭사), 오사카 성을 짓는 데도 주체가 되어 참여했다. 당시 류중광이 중심이 되어 세운 건축보수전문 ‘금강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기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6년 40억 엔의 부채로 파산신고를 해 1429년간의 역사는 그 막을 내렸지만, 세계 관광객들이 감탄하는 법륭사나 동대사 등 일본의 고대 사찰들은 이 ‘금강조’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원형 보존이 가능했다. 사천왕사, 동대사, 법륭사를 지은 사람들은 분명 백제, 고구려, 신라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1500여 년 이상 그 건물을 보존하고 지켜온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인이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이건 경제적인 문제만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의식의 문제다. 일본은 1945년 패전 후 전 국토가 폐허가 된 절체절명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한번 촬영된 영상은 그대로 온전히 보존했다. 이런 일본인들의 의식의 저변은 과거 역사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서기 578년, 일본은 당시 백제의 건축 장인들을 불러 오사카에 사천왕사를 건립했다. 하지만 지진이 빈번한 일본은 나중에 붕괴하였을 경우 보수할 때를 대비, 백제인 류중광 일행을 설득해 일본에 정착하게 했다. 이들은 훗날 호류사(법륭사), 오사카 성을 짓는 데도 주체가 되어 참여했다. 당시 류중광이 중심이 되어 세운 건축보수전문 ‘금강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기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6년 40억 엔의 부채로 파산신고를 해 1429년간의 역사는 그 막을 내렸지만, 세계 관광객들이 감탄하는 법륭사나 동대사 등 일본의 고대 사찰들은 이 ‘금강조’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원형 보존이 가능했다. 사천왕사, 동대사, 법륭사를 지은 사람들은 분명 백제, 고구려, 신라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1500여 년 이상 그 건물을 보존하고 지켜온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인이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