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교토 마을 사람들 ‘마치슈’, 일본 부르주아의 탄생

⑤ 야마보코 순행에서 시마바라까지…교토 상인의 대명사 마치슈의 발자취

등록 : 2022-12-15 16:29 수정 : 2022-12-1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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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7월 열리는 기온마쓰리의 야마보코 행렬. 마치슈들의 전통 어린 축제이다.

장사하는 길을 중심으로 ‘마치’ 형성

내란의 폐허 속 노점으로 유대 다져

화재·정변 때마다 교토 부흥 이끌고

일본 최초 초등·여성 교육 스스로 시작


시마바라 유흥가에도 고급문화 자취

학술문화예술 후원 ‘메디치’ 역할도


실학과 심학, 마치슈 상인정신의 원천

교토의 실질적 주인은 ‘장사꾼’ 마치슈

해마다 여름 교토에서는 7월 한 달 동안 기온마쓰리(祗園祭)가 열린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3년 만에 열려 더욱 기대를 모았다. 기온마쓰리의 꽃은 야마보코(山鉾) 순행. 악대를 앞세우고 수십 명의 수레꾼과 소리꾼이 화려한 ‘야마’(가마)를 끌고 거리를 행진한다(요즘은 바퀴가 달려 있다). 자기 가마만의 특색을 상징하는 ‘보코’(장대)를 높이 매단 수레도 있다. 보통 마쓰리는 신사가 주관하지만, 기온마쓰리의 이 야마보코 순행은 기온시장의 공동조합 격인 기온어령회가 이끈다. 본래 9세기께 역병 퇴치를 기원하며 시작된 마쓰리답게 높은 장대에 날카로운 칼을 매단 장도보코를 선두로 야사카신사를 출발한 수십 대의 야마보코가 긴 행렬을 이루며 자신들의 영업장이자 생활공간인 시장통과 마치(町)를 돌며 그들만의 유대를 다짐하고 과시한다. 기온어령회 같은 조닌(町人)을 교토에서는 예로부터 ‘마치슈’(町衆)라고 불렀다.

8세기 말 교토가 계획도시로 건설될 때 사방의 길로 구획된 공간을 ‘마치’(우리말 마을의 고어 ‘마실’과 관계가 있다)라고 했는데, 이마치가 중세 이후 상업이 발전하면서 장사하는 길을 중심으로 재편돼 ‘료가와마치’(兩側町)가 됐고, 길 양쪽에서 마주보며 장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한동네’라는 유대감이 생겨났다. 특히 15세기 말 일어난 11년에 걸친 내란으로 교토가 잿더미가 됐을 때 이들은 다치우리(노점: 오늘날에도 교토 곳곳에 지명으로 남아 있다)를 하며 간신히 삶을 도모하게 되었다. “믿을 건 자신뿐”이게 된 사람들이 공동조합인 좌(座)를 조직하고 그들만의 자치규약에 따라 마을공동체인 ‘마치구미’(町組)를 형성한 것이 마치슈의 시작이다. 이들 마치슈야말로 교토의 실질적 주인이다. 역사상 여러 차례 정변과 화재로 폐허가 된 교토를 부흥시킨 주역도 마치슈였다.

교토의 거상 스미노쿠라 료이. 그의 아들 대엔 교토의 ‘메디치’가 됐다.

마치슈들이 무역, 금융, 포목, 직조, 염색, 도자기업 등에서 활발한 상공업 활동을 벌이며 교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자 교토는 빠르게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18세기 무렵 교토는 아마도 세계 최대 직물 생산지였을 것이다. 교토시 가미교구 호리카와이마데가와에 있는 직물박물관 ‘니시진오리회관’에 가면 당시의 대형 직조기를 비롯해 니시진 특산의 정교한 ‘선염직물’ 제품을 구경할 수 있다. 7세기 신라 도래인에 의해 시작된 교토의 직물산업은 16세기부터 정권의 비호 아래 부흥기를 맞았고 18세기에 이르면 직조소가 무려 5천 곳이 넘을 정도로 전성기를 이룬다. 이 무렵 교토 인구는 기록에 따르면 57만7548명. 당시 세계기준으로도 손꼽히는 도시 규모였다.

이토 진사이의 ‘고의당’. 지금은 꽃꽂이 학원이다.

시장통의 고만고만한 상인이었던 마치슈가 중산층의 경제력을 갖추고 몰락한 귀족과 무사계급이 마치슈 사회로 스며들면서 막강한 경제력에 고전적 교양과 시서화(詩書畵)의 고급문화까지 갖춘 마치슈들이 속속 출현했다. 마침내 마치슈는 왕공 귀족과 막부 실력자 같은 상위계급과 ‘자시키’(연회좌석)를 같이하는 부유한 중간계급을 가리키는 말로 ‘지위’를 높여갔다.

교토시 시모교구에 있는 시마바라는 에도시대 ‘아게야’(요정집)가 밀집한 가가이(花街:요정거리)로 유명했던 유흥가이다. 현재는 ‘스미야’(角屋)라는 아게야만이 유일하게 남아서 ‘접대문화미술관’ 간판을 달고 “손님을 맞고” 있다. 스미야는 일본 근세의 접대 문화를 엿볼 수 있다고 해서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스미야는 마치슈뿐만 아니라 왕실과 막부 실력자들이 드나들며 시가, 음악, 연희를 벌인 호사스러운 연회장답게 당대 최고 수준의 격조와 화려한 내외장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스미야는 당시 상층 마치슈와 궁정귀족간의 내밀한 교류를 보여준다고 할 만큼 왕실의 별궁을 닮았다고 한다. 스미야의 2층 방 미닫이문이나 창문틀의 미적 구성은 20세기 몬드리안 그림의 추상성을 이미 앞서간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미술과 디자인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오래 머물며 관찰하고 싶은 ‘미술관’이다.

니시진오리회관에 보존된 대형 직조기. 한때 교토의 직조소는 5천 곳이 넘었다.

마치슈는 일본 대중문화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모가와강과 나란히 흐르는 다카세가와운하에는 스미노쿠라 료이라는 거상의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교토와 오사카를 잇는 수상교통로였던 다카세가와운하는 교토 경제성장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는데, 스미노쿠라가 100% 자기 돈으로 만들었다. 도쿠가와 막부에 멸문을 당한 도요토미 가문을 위령하는 절을 지은 ‘의리’로도 기억되는 스미노쿠라의 아들 소안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처럼 일본 근세의 ‘위대한 문화 후원자’였다. 유학 발전을 위해 학교를 지었고 민간 출판의 대명사 같은 ‘사가본’ 서적의 공급자였다. 그의 사가본 1호 출판이 사마천의 <사기>였다는 사실은, 마치슈를 비롯한 일반 대중의 교양 수준을 귀족 못지않게 끌어올리려 한 소안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50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마치슈들의 반상회 ‘마치나이카이’ 팻말.

소안과 같은 상층 마치슈의 문화활동은 일본 문화의 저변을 획기적으로 넓히는 촉매제 구실을 했다. 오늘날 일본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다도, 화도(꽃꽂이), 정원 가꾸기 등의 생활문화와 노(能·가무극), 가부키 같은 전통예술이 하나의 대중문화 장르로 된 데는 이 문화의 주 소비층이자 후원자였던 마치슈의 역할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이런 마치슈로부터 막부 말기의 미쓰이 등 3대 금융재벌이 나오는가 하면, 일본 최초로 마치구미별로 초등학교를 짓고(1869), 근대적인 여성 교육을 시작하고(1872), 서양종교사상(기독교)을 이념으로 삼은 대학을 교토에 받아들인 것(1875)도 개방적이고 국제화에 민감했던 마치슈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슈들의 접대 장소였던 스미야 요정은 놀랍도록 왕실 별궁과 닮아 있다.

오늘날 역사도시로서뿐 아니라 교육과 문화에서도 교토가 일본에서 손꼽히는 도시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천년왕실도, 막부 권력자도 아닌, ‘다치우리’에서 시작해 돈 많은 문화 후원자까지 된 ‘장사꾼’ 마치슈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사의 큰 흐름 속에서 기억해둘 가치가 있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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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정직·성실·검약으로 대표되는 일본 직업도덕의 배후에는 유학자 이토 진사이의 고의학(古義學)과 이시다 바이간의 심학이 있다. 이토는 관념론을 비판하며 유학의 실천성을 강조해 주자학적 근본주의에 질린 마치슈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토의 ‘열린 유교’는 난학이나 의학 등 다양한 학문과 예술이 전개될 수 있는 토양을 일궈줬다. 마치슈의 진정한 스승 이시다 바이간은 포목상 점원 출신으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 아래 일상생활에서 실천 가능한 도덕을 설파했다. 인간의 도리를 다하며 깨끗하고 정직한 이익을 추구한다는, 얼핏 형용모순 같은 그의 가르침은 마치슈들에게 위안이자 목표가 돼줬다. ‘세키몬신가쿠’(石門心學)라고 불린 그의 평민사상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자본주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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