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기의 서울 골목길 탐방

민주화 투쟁을 지켜본 골목,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서울 종로구 피맛골 골목길

등록 : 2016-11-18 10:21 수정 : 2016-11-2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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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 네거리 교보빌딩 뒤 피맛골 과거 모습. '열차집'은 피맛골을 상징하였다.
조선 초 태종12년에 종로 거리 양측에는 시전행랑이 들어섰다. 전차가 처음 들어온 직후의 종로 모습이다. 도로변 상가들과 그 뒤편 피맛길이 보인다.

피맛길이 파괴되고 피맛길 안쪽 동네 청진동이 개발되면서 발굴된 조선 시대 집터와 골목, 그리고 시전행랑 터가 드러났다. 이문(동네 어귀에 세운 문) 안의 집 자리 모습뿐만 아니라 우물과 부엌의 모습도 잘 나타났다. 김란기,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울 종로 ‘피맛길’은 높은 사람이 지나갈 때 도성 민초들이 엎드려 조아리기를 피하기 위한 길이었다고 했다. 근래에는 독재 정권, 부패 정권에 항의하다 경찰의 최루탄을 피하는 길이 되었다. 그런 일은 이미 1960년쯤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민주 의식이 터를 잡은 뒤 민중이 정권의 독재에 저항해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 것은 4·19혁명이 대표적이다.

그런 피맛길이 이제는 도심재개발로 거의 사라져버렸다. 사실 길이라기보다는 대로의 뒷길로 오붓한 골목이었다. 어느 해였던가. 예비고사를 마치고 긴장이 풀린, 아직 고딩 머리 예비 대학생이 처음 ‘다방’이란 곳을 들어가기 위해 두리번두리번 헤매던 그 골목. 70년대의 그 들뜨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진눈깨비 흩날리던 그날, 난생처음 ‘다방 출입’을 시작하는데 이 다방, 저 다방 앞을 서성거리다가 결국 그 다방에 들어갔다.

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 그곳이 그 흔한 다방이었는지조차 아스라하지만 ‘와이엠시에이(YMCA) 지하다방’은 비교적 대중적인 다방이었다. 다방에 들어서 앉자마자 한 여학생이 다가왔다. 같이 음악을 신청하지 않겠느냐고 말을 걸어온다. 물론 이 고딩은 잔뜩 겁을 집어먹었는데, 이미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은 ‘로라’(에이스 캐넌, 1968)를 신청하자고 했다. 로라?

그런 음악을 알 턱이 없었던 고딩 머리는 우물거렸다. 결국 그녀가 신청곡을 써서 냈고 처음 그 음악을 들었지만, 그녀는 흥미를 잃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흰 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 피맛길 골목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 홀로 추억’ 같은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건물 뒤쪽으로 여전히 피맛길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피맛길에 대한 인식은 없었다.

다만 시위 때면 그 골목 속으로 숨어들었던 기억은 생생하다. 그 기억은 80년대에 들어서 더욱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사과탄, 지랄탄 같은 것들이 난무하던 시절, 밀가루처럼 하얀 가루가 공중에서 터져 머리와 얼굴, 그리고 온몸에 뿌려지던 날들…. 한번 뒤집어쓰면 눈물, 콧물, 심지어 배 속의 위액까지 나오려던 그때, 골목길 다방으로 뛰어들면, 우선 시원한 냉수와 물수건을 내주던 ‘레지 아가씨’가 누님처럼 고마웠다. 물론 골목까지 쫓아와 잡아가려던 경찰을 피해 숨겨주던 다방도 있었다. 인제 와서 생각하면 어쩌면 낭만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난 일이란 이유로 낭만적이라 말하기에는 너무 엄혹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고, 민주화를 이루었으니 말이다. 그런 피맛길 골목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태조 이성계가 처음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시작한 일은 물론 궁궐을 짓는 일이었다. 태조는 중국의 학설을 좇아 ‘앞에는 궁궐이요 뒤에는 시장’을 두려고 했으나(전조후시) 경복궁 뒤에 시장을 개설하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결국 이성계는 시장을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뒤이은 태종이 동서로 개설된 종로라는 큰길 양편에 관립 상가(시전행랑) 건립을 실행했다.(태종 12년, 1412~1413년) 처음에는 돈화문로 양측에 472칸을 건설하고, 2차로 육조거리의 끝부분인 혜정교에서 종묘 부근(돈화문로 입구)까지 지었다. 3차에는 남대문로(보신각-숭례문)에도 지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새로 들어선 왕조 정부가 물자를 수급할 수 있도록 하고, 성내의 도민들도 생활용품을 공급받게 했다. 이들 상가에는 ‘금난전권’(조선 후기에 육의전과 시전 상인이 상권을 독점하고자 난전을 금지할 수 있었던 권리)이라는 권리를 주어 다른 난전이 생기지 못하게도 했다.

그러하였다니 피맛길 골목은 길기도 하고 다양하기도 했을 터이다. 지금도 돈화문로 양쪽 피맛길은 종로 쪽과는 조금 다르게 남아 있으니 찾아 걸어보고 기웃거려볼 일이다. 그런 골목이 근대의 강을 건너 산업화 시대, 그리고 민주화 시대를 지나왔으나 이제 그 모습이 소멸해가고 있으니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중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하는 일은 그 골목에 배인 ‘기억의 상실’이다. 모습이 사라지면 이름도 잊히고, 이름이 잊히면 기억도 사라지니 이것이 상실 아닌가.

지금의 교보빌딩 뒤쪽 피맛길 초입에는 ‘원조 빈대떡집’이라는 ‘열차집’이 있었음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어디 이 빈대떡집만이 있었을까? 피맛길을 따라 걷거나 청진동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벌써 아련한 주점들 이름이 떠오른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집기들을 기증했다는 청진옥, 해방 직후에 문을 열었다는 원조 청일집…. 청진동 마을 안 ‘청진8지구 재개발 부지 발굴지’ 땅속에는 100년마다의 문화층이 시루떡처럼 켜를 이루고 있다. 이제는 그것들마저 지하 6층이니 8층씩이나 파헤쳐져서 사라졌다. 600년 전 부터 차례로 이어온 땅속의 역사마저 물려줄 수 없게 되었다.

그나저나 지난 11월12일 밤에 인사동, 종로, 을지로 일대의 음식점들에 음식이 완전히 바닥이 났다는데, 80년대에도 시위가 끝나면 열차집, 청진옥, 청일집에 모여 한잔씩 하면서 그날의 치열한 전과를 자랑했던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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