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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심우장 앞길은 북정마을로 오르내리는 샛길이다. 좁디좁은 골목이다. 지난가을 노란 낙엽이 떨어져 자못 낭만적이긴 했지만, 부스러져가는 시멘트 담장에는 재개발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글귀들이 찢긴 채로 수년째 붙어 있었다. 그 중간의 심우장은 한용운의 생각이 아직도 짙게 남아 있었고, 선글라스 머리에 인 사람들도 그 생각을 아는 듯 이 공간에 들어오면 자못 숙연한 모습이다.
재개발을 놓고 찬반에 휩싸인 이 늙은 마을에 침묵으로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심우장은 자본의 침공을 경계나 하는 듯, 마을 한가운데서 촛불처럼 세상을 밝히고 있다. 권력과 욕망으로 가득한 도성 안을 등지고 북풍한설을 마주하며 거기 그렇게 앉아 있다.
그런 가옥의 앞쪽 성북동 길의 한켠에는 언젠가부터 작은 공원이 만들어지고 그곳에 만해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곳을 관광지처럼 만들고 싶은 지역당국의 생각이겠지만, 평상복이 되어버린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도 지나면서 힐끗거린다. 왜 그럴까?
해방 후 40년대 후반이 되자 이 땅에 이념 대립이 나타나고, 성북동에도 그 여파가 미쳤다. 한국전쟁을 거치자 성북동은 문인촌의 면모에서 상당히 후퇴한다. 그리고 피난민들과 실향민들의 생활 근거지로 변하기 시작한다. 토막집, 판잣집, 가건물 등이 급격하게 들어선다. 말하자면 무허가 정착지가 형성된 시기이다.
그러던 성북동에 1970년대가 되자 정치 또는 재개 인사들이 잇따라 찾아들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수려한 자연환경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5·16군사정권 이후 권세가들이 국유지를 사들여 팔면서 고급 주택과 외교 사택지가 형성된다. 곧 고급 주택지가 서민들의 정착지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도시형 한옥과 그 골목길로 꽉 차 있던 경관도 차차 헐리어 고급 주택들로 채워진다. 부자 동네란 이름이 붙은 연유이기도 하다. 이에 그들의 활동을 돕는 대원각, 삼청각 같은 고급 요정도 들어섰다.
성북동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길상사에도 극락전이 있는데 보통 절집의 법당 건물 형식이 아니라, 궁궐 집 형태이니 이것은 필시 김영한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더구나 방갈로 같은 저 유사 통나무 막사들은 뭐란 말인가? 아무래도 조금은 속되어 보이지만, 절집 안에 저런 집들이 수십 채나 있다는 것은 도저히 감으로는 잡히지 않으니 이야기는 ‘대원각’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김자야(본명 김영한, 예명 진향)이 쓴 <내 사랑 백석>은 백석(본명 백기행)의 애인이었던 그가 우리에게 길상사는 유원지가 아니라 대원각의 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옛 요정 건물을 법당으로, 방갈로를 선승들의 수도처로 사용하며 원형을 바꾸지 않았음을 증언해준다. 여기서 그는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조선 권번의 기생이 되어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1867~1937)의 문하생이 되고 명인 기생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이런 기생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본명 신현모 1894~1975)이란 분이 1935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주었다. 도쿄의 문화학원에 편입해 다니던 중, 해관 선생이 조선어학회 사건(1942)으로 잡혀들어가 함경도 홍원형무소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졸업을 앞두었지만 포기하고 함흥으로 달려갔단다. 해관을 면회하려 했지만 허용되지 않아 정·관계 사람들을 통해 면회해볼 생각으로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그릇과 여자는 내놓으면 깨지기 마련이야’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함흥에서 백석을 만나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물론 후일 사람들은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했지만, 김영한은 ‘첫눈에 어이없이 사로잡히고 말았다’고 했다. 이것이 신파조든 아니든 그것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현재로써는 길상사가 남아 있어 그 연원을 현실적으로 입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당시 가치로 1000억원에 이르는 요정 ‘대원각’을 법정 스님 앞에 내놓고 사찰로 키워달라고 한 것을 신파조로 규정한다면, 백석과의 만남도 신파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나무만 남아 있다는 ‘노시산방’을 찾아 김환기·김향안의 흔적을 찾다가 그들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던 중 결국 백석과 그의 애인이었던 ‘자야’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고, 이야기는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로 이어졌다. 그나저나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한다. 그 뜻이 심오할 것 같은데, 경상도 지방에서는 이름의 끝 자에 ‘자’자가 들어가면 짧고 친하게 부르는 호칭과 같은 발음이니 어쩐지 친숙함이 느껴진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이런 기생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본명 신현모 1894~1975)이란 분이 1935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주었다. 도쿄의 문화학원에 편입해 다니던 중, 해관 선생이 조선어학회 사건(1942)으로 잡혀들어가 함경도 홍원형무소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졸업을 앞두었지만 포기하고 함흥으로 달려갔단다. 해관을 면회하려 했지만 허용되지 않아 정·관계 사람들을 통해 면회해볼 생각으로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그릇과 여자는 내놓으면 깨지기 마련이야’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함흥에서 백석을 만나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물론 후일 사람들은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했지만, 김영한은 ‘첫눈에 어이없이 사로잡히고 말았다’고 했다. 이것이 신파조든 아니든 그것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현재로써는 길상사가 남아 있어 그 연원을 현실적으로 입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당시 가치로 1000억원에 이르는 요정 ‘대원각’을 법정 스님 앞에 내놓고 사찰로 키워달라고 한 것을 신파조로 규정한다면, 백석과의 만남도 신파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나무만 남아 있다는 ‘노시산방’을 찾아 김환기·김향안의 흔적을 찾다가 그들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던 중 결국 백석과 그의 애인이었던 ‘자야’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고, 이야기는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로 이어졌다. 그나저나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한다. 그 뜻이 심오할 것 같은데, 경상도 지방에서는 이름의 끝 자에 ‘자’자가 들어가면 짧고 친하게 부르는 호칭과 같은 발음이니 어쩐지 친숙함이 느껴진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