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순의 도쿄라이프

다급한 NHK 아나운서의 목소리

등록 : 2016-11-24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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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2일 새벽 6시경, 지난 1일부터 운영하는 호텔 레스토랑의 조식 준비로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텔 건물이 마구 흔들렸다. 지진이었다. 이어서 휴대폰의 긴급 메시지를 전하는 진동이 요란하게 울리고, 텔레비전에서는 일제히 속보가 떴다.

건물의 격렬한 흔들림은 계속됐다. 습관대로 위아래 직하형으로 흔들리는지, 좌우 옆으로 흔들리는지 진단하고자 냉정함을 유지하려 했으나 너무 겁이 난 나머지 판단조차 불가능했다.

2층 레스토랑이 이 정도로 흔들리는데, 아마도 고층 건물은 아무리 특수공법으로 내진 설계를 했다 하더라도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만큼 심하게 흔들렸을 것이다. 20년 넘게 일본에 살면서 내심 지진에 대한 내공이 많이 쌓였다고 자부해왔건만, 22일 새벽 같은 강진과 맞닥뜨리면 역시 냉철함보다는 우선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이고 만다.

그런 와중에 조식 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가는 사이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빨리 피하세요. 가능한 고지대로 당장 도망치세요!” 후다닥 레스토랑 홀로 나와 소리 나는 곳을 보니 방금 전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아나운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급한 목소리만 반복해서 들려왔다.

“5분 이내로, 3분 이내로 쓰나미가 몰려옵니다. 빨리 고지대로 피하세요. 1m 쓰나미도 속도가 빨라 휘말리면 대단히 위험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빨리 도망치세요. 높은 지대로 빨리 피하세요!”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아나운서의 절박하디절박한 피난 권유 외침은 이른 아침 일본 열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이 외침과는 별도로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후쿠시마 현 바닷가를 중심으로 시시각각 쓰나미가 어떤 형태로 내륙으로 몰려오는지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화면 속 바닷가는 긴급상황임을 알려주는 빨간색 표시로 계속 깜빡이고 있었다. 이날 일본의 모든 방송사가 이처럼 일제히 지진 속보를 내보냈다.

흔히 일본인들을 가리켜 냉정하고 차분하다고들 한다. 나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실제로 일본에 살면서 늘 느끼는 것이 일본인들의 무표정, 무변화다. 또한 자연재해에 늘 시달려와서인지 아무리 큰 사고가 나도 일본인들은 허둥대지 않고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 하지만 이날은 안 그랬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아나운서의 숨소리가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될 정도로 말이 빨랐고, 1m 쓰나미라는 말에 혹여 주민들이 안심할까봐, 물의 기류가 빨라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정말 오랜만에 일본인의 민낯을 본 기분이었다. 이날처럼 흥분한 모습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지상파 방송에서 말이다. 1만5873명의 사망자와 2744명의 실종자가 생긴 2011년 3월11일의 동일본대지진 현장을 가본 적 있는 나로서는 이날 처절하리 만큼 절박하게 외치는 여성 아나운서의 외침은 그만큼 충격이었다. 혹시 동일본대지진처럼 대규모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감이 일시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320㎞ 이상 멀리 떨어진 도쿄에서도 건물이 심하게 흔들릴 만큼 규모가 큰 7.3의 강진이었는데도, 다행히 큰 인명 피해는 없었다. 쓰나미 경보도 이날 12시를 넘어 해제됐다.

그렇지만 이번 지진으로 느끼는 것이 참 많다. 특히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304명이 수장돼가는 것을 전 국민이 발을 동동거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유일하게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던 한 사람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무려 7시간 동안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고 공식적으로 직무유기를 한 사람, 그러고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그 뻔뻔함에, 그래서 하야할 자격조차 없는 그녀에 비춰, 22일 지진 발생 후 단 17분 만에 비상사태에 들어간 일본 정부의 발빠른 대처, 그리고 외국 순방길에서 긴급 기자회견으로 일본 국민을 안심시킨 아베 신조 총리의 행보는, 제아무리 반일감정이 앞서는 일본이라고 해도 그 대처 능력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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