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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관에 넣어 전시되고 있는 호류지 백제관음상(210.9㎝). 프랑스의 세계적인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만약 일본열도가 침몰해서 단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겠는가”라는 일본 기자의 질문에 “백제관음”이라고 답하면서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에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일본 세계유산 1호 절의 ‘보물 중 보물’
7세기 아스카시대 ‘백제풍’ 목조불상
211㎝의 큰 키에 완벽한 조형미 감탄
‘일본·프랑스 대표국보 전시’ 때도 뽑혀
백제나 백제계 장인 제작, 대체로 인정 제작 장소, 한국이냐 일본이냐 ‘논쟁 중’
유럽-인도-중국 거쳐 꽃핀 인류 걸작 세계적 관점서 볼 때 가치 더욱 높아져 ‘구다라간논’ 즉 백제관음(百濟觀音)은 7세기 일본에 불교문화가 꽃핀 아스카(飛鳥)시대의 목조 불상이다. 이름에 ‘백제’가 들어가 있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있다. 백제관음은 역사성과 예술성에서 세계 어디에서도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걸작이다. 1997년 일본과 프랑스가 자국의 대표적인 국보 1점만을 교환 전시하는 이벤트를 할 때 선택돼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일은 세계 미술사에서 이 조각상이 차지하는 존재감을 잘 말해준다. 일본에서 백제관음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은 나라현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호류지(法隆寺) 절이다. 호류지는 그 자체로도 세계적인 문화유적이지만, 백제관음을 보기 위해 호류지에 간다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 아스카마을 여행에서 고대 백제의 향기에 취했던(연재 20회 참조) 필자 역시 “오직 백제관음을 보기 위해” 호류지에 갔다. 백제관음을 ‘직관’하면서 동아시아 문명의 이 위대한 유산이 왜 ‘백제’라는 이름을 가졌는지 이성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백제나 백제계 장인 제작, 대체로 인정 제작 장소, 한국이냐 일본이냐 ‘논쟁 중’
유럽-인도-중국 거쳐 꽃핀 인류 걸작 세계적 관점서 볼 때 가치 더욱 높아져 ‘구다라간논’ 즉 백제관음(百濟觀音)은 7세기 일본에 불교문화가 꽃핀 아스카(飛鳥)시대의 목조 불상이다. 이름에 ‘백제’가 들어가 있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있다. 백제관음은 역사성과 예술성에서 세계 어디에서도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걸작이다. 1997년 일본과 프랑스가 자국의 대표적인 국보 1점만을 교환 전시하는 이벤트를 할 때 선택돼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일은 세계 미술사에서 이 조각상이 차지하는 존재감을 잘 말해준다. 일본에서 백제관음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은 나라현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호류지(法隆寺) 절이다. 호류지는 그 자체로도 세계적인 문화유적이지만, 백제관음을 보기 위해 호류지에 간다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 아스카마을 여행에서 고대 백제의 향기에 취했던(연재 20회 참조) 필자 역시 “오직 백제관음을 보기 위해” 호류지에 갔다. 백제관음을 ‘직관’하면서 동아시아 문명의 이 위대한 유산이 왜 ‘백제’라는 이름을 가졌는지 이성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호류지는 나라시 남쪽 이카루가(斑鳩) 마을에 있다. 백제로부터 불교를 들여와 일본 고대국가의 기틀을 닦은 쇼토쿠 태자가 백제 승려와 장인들을 초빙해 이카루가에 궁실을 짓고 그 옆에 아버지를 위해 세운 원찰이다. 607년 완공됐다가 670년 화재로 전소했다고 한다. 지금 보는 호류지는 711년 무렵 재건된 것이다. 백제관음은 1949년 보수공사 도중 금당 일부에 화재가 발생하자 수장고로 옮겨져 보관됐다. 호류지는 백제관음과 또 하나의 걸작인 금당벽화를 비롯해 백제 위덕왕 때 제작된 구세관음상, 5층목탑 등 국보급의 수많은 일본 중요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1993년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을 처음 등재할 때도 첫손에 꼽혔다.
호류지로 가기 위해서는 오사카나 교토에서 일본철도(JR) 편으로 나라역에 간 다음 기차를 갈아타고 세 번째 역에 내리면 된다. 호류지역에서 호류지까지는 버스 편이 있지만 필자는 걸으면서 동네 구경도 하는 걷기를 선택했다. 역에서 지도를 얻고 북쪽 출구로 나와 약 1.5㎞(20~30분)를 걸어간다.
백제관음의 손 부분. 가볍게 손가락으로 걸치듯 물병을 쥔 모습이 장인의 탁월한 기예를 여실히 보여준다.
호류지에 도착하면 남쪽 입구에 해당하는 남대문에 이어 중문이 나오고 경내가 펼쳐진다. 절은 금당과 5층탑, 강당으로 구성된 서원가람과 백제관음을 안치한 대보장원과 유메도노(몽전·夢殿)가 있는 동원가람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다. 금당과 오층탑 속의 문화재들을 찬찬히 둘러본 다음 백제관음을 보기 위해 대보장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백제관음은 우선 전체 키가 210.9㎝에 이르는 장신의 외형만으로도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훤칠한 몸에 날씬함과 풍만함이 미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부드러우면서도 장엄한 몸매와 따뜻하고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을 더없이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연꽃받침대를 포함해 몸체 대부분을 녹나무 한 개를 깎아 조각했으며, 표면에는 엷은 마른 옻칠을 한 다음 채색을 입혔다. 머리 뒤 광배는 대나무조각을 한 가는 기둥으로 떠받쳤다. 보관(寶冠·보석으로 장식된 관)을 비롯해 가슴장식과 팔찌 등 장신구는 구리 평면에 구멍을 뚫고 도금해 고귀한 입체미를 구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투조 기법과 조형감각은 당대 어느 조각예술품과 비교해도 월등히 뛰어나다.
금당벽화 제6호벽(313×267㎝). 고구려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는 670년 화재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에 자랑하는 걸작에 굳이 ‘구다라’(백제)라는 외국 이름을 붙여놓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한국인은 왜 일본이 더욱 명시적으로 ‘출처’를 밝히지 않는지 따진다.
백제관음은 백제가 한창 일본에 불교문화를 전수할 때의 것으로 모두가 인정한다. 양식과 기법 면에서 직접 전수자인 ‘백제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조각의 재질인 녹나무는 한반도에서는 드물지만 일본에서는 흔한 나무여서 제작 장소는 ‘일본’일 가능성이 크다. 백제관음이 백제에서 만들어져 일본에 증정된 것인지, 일본에 파견된 백제장인 또는 그 후계자가 일본에서 만든 것인지는 직접적인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일본은 백제관음상 옆에 ‘백제관음연표’를 만들어 걸어두고 있다.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허공상보살(虛空像菩薩)이라고 한다. 백제에서 온(百濟渡來) 천축(인도)의 불상이다”라고 한 1698년의 기록이 가장 빠르다. 이후에는 대개 “이국(異國)에서 온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로 불리다가 1887년 일본 문부성이 공식조사를 하면서 ‘조선풍 관음상’으로, 1892년 나라현 조사 때는 ‘한식(韓式) 관음입상’으로 기록됐다. 즉 19세기 말 근대적인 학술조사가 시작되면서 불상의 출처가 전문가들에 의해 ‘한반도계’로 인정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호류지 금당과 5층탑. 금당에는 유명한 금당벽화가 그려져 있고, 높이 33m의 5층탑에도 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있다.
나아가 1897년 일본이 처음 국보제도를 실시할 때는 ‘전백제인작’(伝百濟人作), 즉 ‘백제인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기에 이른다. 공식적인 불상 이름에 ‘백제’가 들어간 것은 이때부터다.
그런데 백제관음의 소장자인 호류지 쪽은 1905년 정부에 국보지정서의 이 명칭을 다시 ‘허공장보살’로 바꿔줄 것을 청원하고 있다. 공식명칭에 ‘백제’가 들어가는 것에 어떤 부담을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911년 호류지 창고에서 백제관음이 썼던 백제 양식의 보관이 발견됐고, 이것이 계기가 됐음인지 1917년 호류지는 ‘절에 전해 내려온 말’임을 전제로 불상 이름을 ‘백제관음’으로 확정하기에 이른다.
백제관음이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근대 일본의 석학 와쓰지 데쓰로(1889~1960)가 1919년 펴낸 그의 저서 <고사순례>에서 처음 사용하면서부터로 본다. <고사순례>에서 와쓰지 데쓰로는 백제관음을 “아스카시대 최고 걸작”이라고 하면서 “인도나 서역의 문화를 중국이 저작(咀嚼·‘음식을 씹는다’라는 뜻으로 중국이 중국화했다는 말)한 양식”으로 감정했다.
금당 닫집(天蓋)에는 수십 개의 천인(天人)상과 봉황이 장식되어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이 하늘거리며 날아오르는 듯한 꽃줄기와 함께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미술사적으로 정확한 관찰이라고 본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양식을 섭취한 인도의 간다라 양식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이르렀고, 다시 중국 남조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백제’(백제인 또는 백제계 일본인)에 의해 기법과 예술성에서 모두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이 백제관음이다.
문명사의 관점에서 볼 때 백제관음의 진정한 위대성은 ‘지역과 국가 단위를 초월해 형성된 문명의 흐름을 절정의 경지로 종합해낸’ 그 세계성에 있다. 이미 ‘백제’라는 이름을 가진이 위대한 유산을 다시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국지성에 가두어 보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접근이다. 백제관음은 인류 문명의 큰 흐름 속에서 높이 평가될수록 ‘백제’라는 국지성도, ‘백제관음’이란 명명의 의미도 따라서 높아질 것이다. 일본이 200년 가까이 허공장 보살이라고 불리던 것을 객관적 조사를 통해 ‘백제관음’으로 확정한 사실을 연표까지 만들어 백제관음상 옆에 걸어둔 것은 한국인들에게 논쟁보다는 화쟁(和諍·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 교리. 원효 사상이 대표적이다)을 제안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봉황은 눈을 가리고 비상하는 특이한 모습이다. 일본 국보로 지정돼 대부분은 나라박물관에 가 있다.
참고로 고구려 승려 담징(579~631)이 그렸다는 호류지의 금당벽화는 670년 호류지가 완전히 불탔을 때 사라졌다. 현존하는 금당벽화는 7세기 말~8세기 초 호류지가 재건된 뒤 그려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이 걸작이 당시 화가들이 담징의 벽화를 재현하고자 한 노력의 소산이었다면, 우리는 그 그림 속에서 담징의 화격(畵格)을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오직 한국인만이 느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경의일 것이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