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공유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Q. 40대 직장인입니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요즘 들어 부쩍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석사학위 과정에 등록하거나 자격증 준비 등 자기개발에 한창인 동료들이 많습니다. 저는 제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일절 곁눈질하지 않고 직장에만 충성했는데 그러는 사이 조금씩 뒤처진다는 느낌입니다. 특히 최근 있었던 인사 결과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자꾸 드네요. 어떤 돌파구를 마련하고 싶은데, 막상 엄두가 안 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극단적으로 말해 직장인은 ‘A4용지 인생’입니다. 인사발령 결과에 너무나 취약한 존재입니다. 물론 직업마다, 직장마다 특성이 달라서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선민의식과 피해의식의 한가운데 서성거리는 존재가 직장인이 아닌가 합니다. 한없이 우쭐해지다가 또 정반대로 너무도 깊은 상처의 심연 속에 빠지기도 하지요.
저는 과분하게도 시이오(CEO)라는 직위까지 올라갔지만, 그것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저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난 동료들이 기회를 얻지 못해 아쉽게 퇴장해야 했던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제 인생이 항상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던 듯싶습니다. 소위 ‘물먹는’ 자리로 발령나거나 승진에서 누락했을 때, 혹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깊어질 때면, 열패감에 술에 흠뻑 젖어 귀가했습니다.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밤새 뒤척거리며 한숨도 못 이룬 적도 있었지요. 그럼에도 다음날 아침 출근을 서둘러야 하는 자신이 너무도 무기력하고,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눈에 뜨인 것이 있었습니다. 나만의 노트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업무용 수첩과는 별도로, 완전히 사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메모하기도 하였고 영화의 멋진 대사, 혹은 스스로 습작한 엉터리 시를 써보기도 하였습니다. 상처투성이의 언어들로 가득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나의 약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울분이라는 이름의, 마음속의 독 기운이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노트는 절묘한 해독제였습니다. 그곳은 나만의 독립 국가였습니다. 비록 직장에서는 보잘 것없는 존재일지 몰라도 이곳에서만큼은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지요. 어느 날 그 노트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 나는 내 인생의 당당한 주어(主語)다.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다!” 당연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고백을 쉽게 할 수 없는 것이 이 땅의 직장인들의 현실 아니던가요. 노트는 단순히 치유의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점차 나만의 무형자산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노트에 기록해두지 않았다면 아이디어는 새벽의 이슬처럼 어디론가 흔적 없이 증발되어 버렸을 겁니다. 내 경험을 나만의 언어로 적어두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 권의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노트 덕분이었습니다. 노트와 수첩들은 제2의 인생을 사는 데도 기적처럼 힘이 되었습니다. 스토리텔링을 강의하는 데도 보물이었습니다. 단지 외국 서적을 요약한 강연에는 어딘가 생소하고 청중들에게 공감을 얻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나의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경쟁력이 있습니다. 퇴직 이후 잠시 홍대 부근의 한 출판사 주최 스토리텔링 강의를 할 때의 일입니다. 매주 1회 저녁 시간에 직장인들 대상의 강의였는데, 판교와 잠실, 인천 같은 먼 곳에서 찾아올 정도로 그들은 열성적이었습니다. 계획했던 코스가 끝날 무렵, 우리는 근처의 카페에서 음료를 나누며 가벼운 뒤풀이를 하였지요. 저는 함께했던 수강생들에게 소지한 가방 속에서 ‘나만의 소중한 것’ 하나씩 꺼내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 명이 동시에 노트를 꺼냈던 것입니다. 그 안에는 제각각 그림을 그리고 있거나 혹은 뭔가를 메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노트는 단순한 종이묶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나에게 오지 않은 꿈’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노트를 말할 때 그들의 얼굴은 행복에 들떠 있었습니다. 요즘 물론 ‘에버노트’ 같은 디지털 방식의 노트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날로그 방식의 재래식 노트도 여전히 소중합니다. 뭔지 모를 불안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손으로 직접 만져지는 촉감은 중요합니다. 수첩과 노트는 좋은 친구이자 멋진 장난감입니다. 비용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작가와 예술가들의 수첩이라는 몰스킨(Moleskine)이 디지털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연간 1000만권이나 팔려나간다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보다 그 이상의 것을 사려고 합니다. ‘이것은 글자가 아직 쓰이지 않은 책(unwritten book)이다’라는 몰스킨의 브랜드는 그것을 노린 콘셉트입니다. 개인의 정체성과 철학이 담긴 뭔가를 간절히 원하는 시대인 것이죠. 저의 눈에 세상은 노트를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렇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이름 없는 공책과 수첩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얼마 전, 새롭게 인생 도전을 하게 된 40대 커리어우먼과 함께 자리를 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녀는 저에게 양해를 구한 뒤 가방 속에서 붉은색 노트를 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제가 부족한 게 많습니다. 가르쳐주시면 큰 도움 되겠습니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저보다 훨씬 배운 것도 많고 경력도 화려합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심리란 것이 묘해서 자기에게 묻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열기 마련입니다. 그녀가 가진 남모를 경쟁력, 그녀만의 콘텐츠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붉은색 허름한 노트였습니다. ‘왜 나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는가?’라는 푸념을 종종 직장인들로부터 듣습니다. 일리 있습니다. 원천적으로 기회조차 봉쇄된 사람들이 많은 것 또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기회는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불쑥 출근하는 내 문 앞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기회는 허공으로 날아갑니다. 허망한 무지개처럼 말이지요. 직장인들의 운명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인생만큼은 내가 당당히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노트만 있다면 말이지요. 때로는 노트가 기적처럼 새로운 인생도 가져다준답니다. 답답한가요? 그렇다면 오늘부터 노트를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글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전 imbc 대표이사·전 MBC 기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그러자 신기하게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울분이라는 이름의, 마음속의 독 기운이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노트는 절묘한 해독제였습니다. 그곳은 나만의 독립 국가였습니다. 비록 직장에서는 보잘 것없는 존재일지 몰라도 이곳에서만큼은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지요. 어느 날 그 노트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 나는 내 인생의 당당한 주어(主語)다.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다!” 당연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고백을 쉽게 할 수 없는 것이 이 땅의 직장인들의 현실 아니던가요. 노트는 단순히 치유의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점차 나만의 무형자산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노트에 기록해두지 않았다면 아이디어는 새벽의 이슬처럼 어디론가 흔적 없이 증발되어 버렸을 겁니다. 내 경험을 나만의 언어로 적어두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 권의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노트 덕분이었습니다. 노트와 수첩들은 제2의 인생을 사는 데도 기적처럼 힘이 되었습니다. 스토리텔링을 강의하는 데도 보물이었습니다. 단지 외국 서적을 요약한 강연에는 어딘가 생소하고 청중들에게 공감을 얻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나의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경쟁력이 있습니다. 퇴직 이후 잠시 홍대 부근의 한 출판사 주최 스토리텔링 강의를 할 때의 일입니다. 매주 1회 저녁 시간에 직장인들 대상의 강의였는데, 판교와 잠실, 인천 같은 먼 곳에서 찾아올 정도로 그들은 열성적이었습니다. 계획했던 코스가 끝날 무렵, 우리는 근처의 카페에서 음료를 나누며 가벼운 뒤풀이를 하였지요. 저는 함께했던 수강생들에게 소지한 가방 속에서 ‘나만의 소중한 것’ 하나씩 꺼내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 명이 동시에 노트를 꺼냈던 것입니다. 그 안에는 제각각 그림을 그리고 있거나 혹은 뭔가를 메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노트는 단순한 종이묶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나에게 오지 않은 꿈’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노트를 말할 때 그들의 얼굴은 행복에 들떠 있었습니다. 요즘 물론 ‘에버노트’ 같은 디지털 방식의 노트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날로그 방식의 재래식 노트도 여전히 소중합니다. 뭔지 모를 불안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손으로 직접 만져지는 촉감은 중요합니다. 수첩과 노트는 좋은 친구이자 멋진 장난감입니다. 비용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작가와 예술가들의 수첩이라는 몰스킨(Moleskine)이 디지털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연간 1000만권이나 팔려나간다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보다 그 이상의 것을 사려고 합니다. ‘이것은 글자가 아직 쓰이지 않은 책(unwritten book)이다’라는 몰스킨의 브랜드는 그것을 노린 콘셉트입니다. 개인의 정체성과 철학이 담긴 뭔가를 간절히 원하는 시대인 것이죠. 저의 눈에 세상은 노트를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렇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이름 없는 공책과 수첩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얼마 전, 새롭게 인생 도전을 하게 된 40대 커리어우먼과 함께 자리를 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녀는 저에게 양해를 구한 뒤 가방 속에서 붉은색 노트를 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제가 부족한 게 많습니다. 가르쳐주시면 큰 도움 되겠습니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저보다 훨씬 배운 것도 많고 경력도 화려합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심리란 것이 묘해서 자기에게 묻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열기 마련입니다. 그녀가 가진 남모를 경쟁력, 그녀만의 콘텐츠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붉은색 허름한 노트였습니다. ‘왜 나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는가?’라는 푸념을 종종 직장인들로부터 듣습니다. 일리 있습니다. 원천적으로 기회조차 봉쇄된 사람들이 많은 것 또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기회는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불쑥 출근하는 내 문 앞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기회는 허공으로 날아갑니다. 허망한 무지개처럼 말이지요. 직장인들의 운명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인생만큼은 내가 당당히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노트만 있다면 말이지요. 때로는 노트가 기적처럼 새로운 인생도 가져다준답니다. 답답한가요? 그렇다면 오늘부터 노트를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글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전 imbc 대표이사·전 MBC 기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