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윤동주 서거 79주기 “전쟁 없는 평화 세상 위한 시인의 꿈” 이뤄지길

㊱ 3·1절 기념 3개의 ‘윤동주 시비’ 앞에서
기억·화해의 시 ‘새로운 길’처럼 한·일 우호와 친선 계기 되길 기원

등록 : 2024-02-29 15:10 수정 : 2024-02-2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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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얘기하던 동포 3세 청년에 ‘깊은 감동과 아픔’ 느껴

도시샤대 교정 “코리아 민족 시인” 시비

교토예술대 하숙집터 ‘윤동주 유혼비’

우지강변에는 ‘기억과 화해 비’ 세워져

2023년 봄 어느 날 교토 도시샤대학 교정의 윤동주 시비. 많은 사람이 꽃과 술, 담배 등을 바치고 갔다. 왼편에는 비에 젖지 않도록 케이스에 넣은 방명록이 두 권 놓여 있었다. 이 시비는 도시샤대학 유학생 출신의 종교사학자 서정민 교수, 재일동포 기업인 한석희씨 등의 노력으로 세워질 수 있었다.

# 1 객원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교토를 떠날 때 독락(獨樂)의 역사문화 여행을 허락해준 이 고도(古都)에 어떻게 작별 인사를 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 시간이 왔을 때 나는 도시샤(同志社)대학 교정의 ‘윤동주 시비’ 앞에 문득 서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교토에 살면서 윤동주기념비를 찾아보는 일은 일종의 ‘의무’에 해당했다. 교토 여행기를 쓰게 됐을 때도 빼놓지 말자고 다짐했다. 특히 윤동주의 모교인 도시샤대학의 시비는 이미 ‘명소’로도 이름나 있으니….

윤동주기념비는 교토 시내에 2개, 인접한 우지(宇治)시에 한 개가 있다. 1995년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 윤동주가 다녔던 도시샤대학의 ‘윤동주시비’이다. 도시샤대학 교우회 ‘코리아클럽’이 발의하고, 교정에 개인 기념물을 만들지 않는 원칙을 고수했던 대학 쪽도 특별히 예외를 허락했다. 두 번째는 교토예술대학 다카하라(高原)캠퍼스 앞에 2006년 세워진 ‘윤동주 유혼(留魂)의 비’이다. 윤동주의 하숙집이 있던 자리이다. 세 번째로 세워진 것은 교토시 남쪽 우지가와 강변의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이다. 교토 시민 주도로 2017년 건립됐다. 우지가와 강변은 윤동주가 체포되기 몇 달 전, 학우들과 송별 소풍을 가서 ‘아리랑’을 불렀던 곳이다. 한 시인의, 그것도 외국인의 기념비가 인접한 곳에 20여 년에 걸쳐 몇 개나 생긴 일은 흔하지 않을 듯하다. 그만큼 윤동주가 교토 사람들에게 친숙한(?) 시인이 되어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출간, 1976년 중판)에 실린 윤동주 초상(연희전문학교 졸업 무렵).

시인 윤동주는 1945년 2월16일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7살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윤동주는 1942년 10월부터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1943년 7월14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체포될 때까지 9개월여 교토에서 살았다. “일본 군국주의의 전쟁 동원을 피해” 여름방학 중에 고향 용정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끝내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 누구도 그의 죽음에 책임을 말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일본어로 ‘서시’(序詩)를 읽게 된 일본인의 마음에, 맑은 영혼의 울림 같은 시에 공명하면 할수록 군국주의 일본에 ‘타살’당한 시인에 대한 애틋함과 미안함도 커졌으리라 생각한다.

우지강 소풍 기념사진. <생명의 시인 윤동주>의 저자 다고 기치로 작가가 발굴해 세상에 알려졌다. 생전의 윤동주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사진이다.

# 2 막상 돌아갈 때가 임박해 교토 생활을 정리하려고 보니, 기념비를 방문했을 때의 일들이 새삼 의미 있는 에피소드로 되살아났다.

2022년 봄, 교토에 처음 도착한 날 찾아간 곳이 도시샤대학이었다. 나의 교토 생활을 안내해줄 청년과 만나는 장소였다. 자이니치 3세로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오 선생은 반가운 첫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내게 물었다.

“윤동주 시비는 다녀오셨나요?”

빨리 숙소로 가서 짐을 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못 갔다고 둘러대자 그는 곧장 교정의 시비 앞으로 나를 이끌고 갔다. 그렇게 해서 전혀 뜻밖에 윤동주 시비와 그 옆의 정지용 시비 앞에 맨 먼저 교토 안착의 인사를 드리게 됐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눈빛 맑고 잘생긴 청년이 남북한 어느 쪽 국적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제야 그의 마음속에 윤동주라는 “코리아의 민족시인”(시비 뒷면의 글)이 어떤 의미와 자부심으로 새겨져 있는지가 가슴 찡하게 전해져왔다.

“비 오는 날에 우리들의 방명록은 젖었지만 이곳에 온 마음만큼은 젖지 않기를. 이어나가기를.” 2023년 4월19일 윤동주시비를 방문한 참배객이 남기고 간 글이다.

교토예술대학이 세운 ‘윤동주 유혼의 비’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비는 주택가 속의 캠퍼스 입구 옆에 있었다. 캠퍼스 자리가 윤동주가 하숙했던 ‘다케다아파트’(2층 목조주택)의 터임에 착안한 이 비는 동주의 ‘서시’와 함께 “윤동주의 시혼은 그가 작품활동을 하던 이곳에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추모의 글을 새겨놓고 있다. 나중에 들으니, 이 유혼비 건립에 앞장선 분은 조선통신사 연구의 권위자로 자이니치 인권운동에 헌신했던 고 나카오 히로시 교수(연재 8회 조선통신사 편 참조)였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가 기념비를 둘러보던 중 한 여성이 비석 앞에 흰 백합화를 정성스레 놓아두는 것이었다. 사연을 물어보니, 근처 기독교 교회 신도들이 돌아가며 추모의 꽃을 바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말씨에는 “같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순수한 동질감이 숨김없이 묻어나고 있었다.

우지가와 강변의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를 처음 갔을 때는 기념비를 찾지 못해 소풍 왔던 동주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었던 아마가세 현수교 주변만 한참 동안 헤매고 말았다. 낙담해 돌아오는 길에 문득 우지가와 강변을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왔던 서너 명의 여성이 초행길이 아닌 듯 자연스럽게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갔던 것이 생각났다. 서둘러 되돌아가보니 기념비로 가지 않을 거면 굳이 갈 이유가 없는 길이었다. 역시 그분들도 기념비로 가는 중이었다. 어쩌면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교토의 모임’ 회원일 수도 있었다. 이 기념비 건립을 이끈 분이 그들 중에 있었을지 모른다는 데까지 상상이 미치자, 감사 인사를 전할 기회를 놓친 것 같아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까지 들었다.

도시샤대학 교정의 창영관. 1884년 건물로 현재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벽돌건축물이다.

우지강의 ‘기억과 화해의 비’는 시인 윤동주와 그의 시를 사랑한 곤타니 노부코라는 ‘평범한 주부’의 발의로 건립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어 안자이 이쿠로 리쓰메이칸대학 명예교수, 미즈노 나오키 교토대학 교수 등 뜻을 같이하는 교토의 지식인, 예술인, 인권운동가 등이 참여해 2005년 건립추진위가 구성됐다. 그러나 혐한 기류에 휘말려 난항을 겪다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7년, 추진위 구성 뒤 12년 만에 어렵게 기념비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 2004년, 유엔이 5월8~9일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생명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추도와 화해의 시간’으로 결의했다. 우리는 이 결의를 존중하고, 자기실현의 길을 차단당한 시인 윤동주가 살았던 증거를 미래에 전하기 위해, 시 ‘새로운 길’을 새긴 비를 이곳에 세운다.”

맹지처럼 외진 강변의 기념비 위치에서, 비 건립을 방해했던 보이지 않는 손들의 ‘꼼수’가 역력히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비에 새겨진 동주의 시가 더욱 뜻깊게 부각되는 것 같았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돌이켜보면, 교토의 윤동주기념비는 저마다의 ‘현실’이 바라는 동주의 얼굴을 하고 있다. ‘민족시인’ ‘크리스천’ ‘빼앗긴 생명과 인권’…. 여전히 그런 표상들이 절실한 지금의 ‘현실’ 때문이겠지만, 과연 동주가 바란 자신의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우지강의 아마가세 현수교. 1943년 초여름 윤동주가 학우들이 마련한 송별 소풍을 나와 이 다리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다리는 당시 막 건설된 명소였다고 한다.

# 3 <생명의 시인 윤동주>(다고 기치로 지음, 한울 펴냄)라는 책이 있다. 윤동주 연구의 기념비적인 기록으로, 그 내용을 자세히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1년에 한두번, 정해놓기라도 한 듯이, 교토의 낡은 민가에서 반세기 넘도록 잠들어 있는 윤동주의 시고가 발견되는 꿈을 꾼다”는 지은이의 말에 그만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일만큼은 여기에 남겨두고 싶다.

이 책은 윤동주를 ‘생명의 시인’이라 부르며 ‘모든 죽어가는 것이 시가 되기까지’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다. 나는 윤동주가 ‘생명의 시인’이며, 윤동주의 삶이 ‘모든 생명이 시가 되는 과정’이었다는 지은이의 결론에 백번 공감한다. 동주의 ‘시’가 없었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동주의 ‘삶’을 추념하고, 이 세상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확신컨대 동주가 바란 것은 문학이었을 것이다. 시로서 생명과 인간과 자연을,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잔혹한 국가주의 폭력에 의해 살아서 다 부르지 못한 노래가 되고 말았을 뿐이다.

교토부 우지시 우지강변의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혐한’ 기류 속에 12년 만에 완공될 수 있었다.

윤동주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때, 친구들에게 맡기고 간 시집으로 정지용, 백석, 서정주 등과 함께 일본 시인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 1900~1964)의 시집이 있었다. 남긴 시집 수도 가장 많았으니, 동주가 특별히 사랑한 시인이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생명의 시인 윤동주>를 읽고 알게 된 뒤 <미요시 다쓰지 시선집>(오석윤 옮김, 소화 펴냄, 2006)을 구해서 읽게 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 벗이여 시가 번창하지 않는 나라에 있으면서/ 우리 오랫동안 가난한 시를 줄곧 써왔다/ 고독이며 실의며 가난이며 나날이 사라지는 공상이며/ 아아 오랫동안 우리 20년이나 그것을 노래했다/ 우리는 참을성이 강했다/ 그리고 우리도 나이를 먹었다/ 우리 뒤에 지금은 무엇이 남아 있는가/ 묻지 마라 지금은 아직 뒤를 돌아볼 때가 아니다/ (…)”

동주가 젊어서 죽지 않고 이 시를 쓸 무렵의 미요시 나이가 되었을 때, 한국에서, 또는 그 어디에선가 이런 비슷한 시를 쓰게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도 해봤다.

아무튼 동주를 읽는 일본인이 많아졌다니, 동주가 사숙한 일본 시인의 시를 읽는 한국인도 얼마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교토예술대학 다카하라캠퍼스 입구 도로변에 있는 ‘윤동주 유혼(留魂)의 비’. 이 자리는 윤동주의 하숙집이 있던 자리이다. 비 앞에 놓인 백합화는 근처 교회 신도들이 돌아가며 바치는 생화이다.

# 4 이제 이 두서없는 교토 기행을 마무리 지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왜 교토를 떠나는 즈음에 미리 짜놓은 알리바이처럼 새삼 윤동주를 호명하며, 시비 앞에 서서 귀향 신고를 하는가?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게 교토는 여름의 습기만 빼고 다 좋았으므로.

그래서 생각해보는 것이지만, 동주는 교토에 다시 돌아가(오)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1943년 7월 여름 동주는 교토역에 나타나지 않았다. 고향집에 미리 귀향 전보까지 치고 학우와 함께 기차를 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그러나 동주는 그 기차를 타지 못했다. 아마도 그날은 동주가 체포된 7월14일이거나 그다음 날이었을 것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으련만, 동주가 그날의 기차를 탔다면, 고향 언덕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패망과 조국 해방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1946년 봄이나 가을, 히라누마 도주가 아니라 윤동주의 이름으로 다시 교토에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교토에서 영문학 공부를 마치고, 프랑시스 잠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나라로 가거나, 용정으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를 썼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바라고 싶다. 그것이 전쟁 없는, 진정 평화로운 세상의 모습이 아니던가? 부질없다 해도, 다고 기치로 선생의 꿈처럼 1년에 한두 번만이라도, “동주가 교토에 돌아왔(갔)다”는 꿈을 꾸고 싶다. <끝>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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