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숲길 걷기

무시됐던 ‘사이 강변’, 생태계의 보고로 돌아오다

④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등록 : 2024-07-0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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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뜸하자 자연 스스로 공동체 형성

서울 최고 냇가식물 생태계 ‘감탄 절로’

버드나무·산뽕나무·참느릅나무 ‘멋 자랑’

몇십 종의 텃새·철새들도 활력 높여줘

샛강 좌우의 버드나무숲
윤기 나는 산뽕나무
참느릅나무잎

숲길 걷기를 잘하는 비결이 있을까? 한 가지가 있다. 마주치는 나무와 풀, 동물을 모두 생명체이자 예술작품으로 생각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게 그것이다. 그렇게만 해도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이름을 잘 모를 경우 별명을 만들어 부르면 된다.) 식물은 항상 다른 모습과 건강한 에너지, 자신만의 향기로 응답한다. 처음 만나는 식물은 신선해서 반갑고, 자주 보는 나무는 오랜 친구 같아서 더 좋다. 심호흡하면 더욱 가까워진다.

이번 코스는 지하철 9호선 샛강역에서 출발하는 여의도 샛강생태공원이다. 3번 출구로 나와 찻길을 건너면 오른쪽에서 바로 공원으로 내려간다. 샛강은 큰강에서 갈려나온 ‘사이 강’으로, 큰 강이 주목받는 동안 무시된 작은 강이다. 얼마 전까지 이곳도 그랬다.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사람이 건드리지 않으니 스스로 훌륭한 공동체를 만들었다. 냇가식물(수변림) 생태계로는 서울에서 가장 낫다. 천천히 음미하다보면 감탄이 나온다.

이곳에는 크게 여섯 종류의 나무가 중심을 잡고 있다. 버드나무, 산뽕나무, 팽나무, 참느릅나무, 양버즘나무, 이태리포플러가 그들이다. 다른 나무와 풀도 훌륭하다. 금상첨화로 몇십 종의 텃새와 철새가 활력을 높인다. 온몸의 감각을 열고 걷는다. 물가에선 역시 버드나무 종류가 힘을 쓴다. 언제 봐도 신기한 나무다. 봄이 오는가 하면 어느새 꽃가루를 날리고 가지를 뻗는다. 모래땅에 자라면서 땅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굵지 않은 가지는 유연하면서도 강인하다. 질긴 수피는 생명력의 표현이다. 샛강 좌우로 죽 이어지며 자란다. 버드나무가 많고 갯버들과 수양버들도 흔하다. 키가 10m 이상 되는 아름드리 나무부터 처음으로 가지를 내는 어린나무까지 온갖 모습을 보여준다. 가지마다 마음을 하나씩 담는다면 서울시민의 마음이 다 모일 만하다.


샛강 물길을 왼쪽에 두고 오솔길을 죽 따라간다. 1990년대 말에 생태공원으로 조성한 뒤 원시림 같은 식생이 만들어졌다. 물과 그늘 길이 있으니 여름에도 선선하다. 좌우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여의교와 샛강다리(문화다리) 아래를 지나, 영등포와 여의도를 연결하는 서울교의 교각 너머까지 길이 이어진다.

산뽕나무는 비교적 흔한 나무지만 품격이 있다. 부드러움과 힘이 함께한다. 언제 어디서나 은은하게 기운을 내뿜고 환경이 어려워도 꿋꿋하게 자란다. 이 나무와 주파수를 잘 맞추면 멀리서도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 계속 다른 모습의 산뽕나무와 마주친다. 줄기가 두 아름은 될 큰 나무는 넓게 가지를 뻗어 작은 공원이라고 할 만큼 자신의 공간을 만든다. 허락받고 들어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숙하다. 몇십 그루가 군집을 이룬 곳도 여럿이다. 그 속에 슬쩍 발을 디뎌보니 고향 마을을 찾은 듯 푸근하다.

(산)뽕나무는 어디서나 뿌리를 잘 내린다. 모래땅도 예외가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어느새 자라나 줄기와 잎이 윤기를 내보인다. 뽕나무는 재배식물이고, 사람 사는 곳에서 떨어져 자생하는 것은 거의 산뽕나무다. 신화에서 태양은 동쪽 먼바다에 있는 뽕나무에 머물다가 떠올라 세상을 비춘다. 그 세계에서 뽕나무가 없다면 사람의 생활도 없다. 누에가 먹고 비단 실을 만들어내는 잎과 어느 동물이나 좋아하는 열매는 신령함의 표현이다. 서울에서 제일가는 산뽕나무 군락이 아닐까 싶다.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더 좋다. 나를 위한 숲인 것처럼 행복한데, 요즘 맨발걷기 하는 사람이 꾸준히 늘고 있다.

참느릅나무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은 채 곳곳에 있다. 하천변과 암석지대, 숲가장자리에서 잘 자란다. 같은 느릅나무과의 느티나무나 느릅나무보다 키가 작고 잎도 왜소하다. 잎 가장자리가 홑톱니로 돼 있어 겹톱니인 두 나무와 구분이 된다. 차분해 보여서 참스럽다. 어떤 환경에서나 흥분하지 않고 내실을 꾀하는 굳은 심지를 갖고 있다. 서울 안팎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른 나무와 섞여 있는 곳은 보지 못했다.

팽나무 줄기
꾸지나무
개망초

여기저기 서 있는 팽나무는 매끈한 수피가 멀리서 봐도 아름답다. 아래로 부드럽게 골이 지는 뽕나무의 수피가 호수의 잔물결을 연상시킨다면, 팽나무 줄기는 오래된 한옥의 기둥처럼 듬직하다. 팽나무는 남쪽 지역에서 마을나무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만큼 굳세고 멋있다. 그런데 샛강에서 이렇게 번성하니 웬일일까. 자연 식생이라기보다 언젠가 심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시간이 지나 터를 잡고 보니 원래 주인인 듯 듬직하다.

있을 나무는 다 있다. 어디서나 잘 자라는 물푸레나무는 여기서도 양념처럼 맛을 낸다. 흰 반점이 있는 줄기와 큼직하고 풍부한 잎이 존재를 과시한다. 네군도단풍이 갑자기 나타나 반가우면서도 애처롭다. 오솔길 위로 쓰러졌는데, 굵기로 봐서는 노쇠해서 넘어진 듯하다. 그래도 출입문처럼 아래로 지나갈 수 있어 운치가 있다. 물가의 큰 중국굴피나무는 이미 귀걸이 같은 열매를 많이 달고 있다. 여의교 교각 아래 좀 다른 나무를 심어 놓았다. 꾸지나무다. 같은 뽕나무과인 꾸지뽕나무는 큰 가시가 있지만 이 나무는 그렇지 않고 털이 많다. 열매가 익으면 뽕나무 열매인 오디보다 더 맛있다.

풀들도 자연스럽게 잔치를 벌인다.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 더 마음을 두드린다. 무심하게 자라는 개망초와 깜찍한 꽃이 하나씩 하늘을 바라보는 쇠별꽃은 기본이다. 물가에는 고마리와 괭이사초가 꽃을 피우고 갈대도 무성하다. 양지쪽에는 칡이 열심히 줄기를 뻗는다. 그 속에서 잎 모양이 무잎과 비슷하다는 큰뱀무와 산형과의 전호가 예쁜 꽃을 자랑한다. 전호 역시 물가에서 잘 자란다. 개소시랑개비, 김의털, 송장풀, 털별꽃아재비의 꽃도 한창이다. 털별꽃아재비는 별꽃과 닮았지만 각각 국화과와 석죽과로 집안이 전혀 다르다. 풀들이 서로 엉켜 어울리는 모습은 자연 식생의 아름다움이 뭔지 보여준다. 생태계 교란식물로 지정된 단풍잎돼지풀과 환삼덩굴도 한 식구처럼 조화롭다.

여의교 교각까지 오니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났다. 여기서 돌아가는 길이 여럿 있다. 온 방향의 옆길로 샛강다리까지 가, 왼쪽 도로로 올라 여의도역으로 가면 40분쯤 걸린다.

샛강역까지 원점 회귀하면 대략 한 시간 거리다. 샛강을 건너 물을 왼쪽에 두고 샛강역까지 가거나, 중간에 왼쪽으로 다리를 건너 여의도역 쪽으로 빠져도 된다.

샛강 건너편 길로 간다. 이 길에는 양버즘나무와 이태리포플러가 존재를 과시한다. 양버즘나무는 어디서나 잘 자라는 '가로수의 왕'이었다. 키가 커서 그늘이 많고 웅장한 자태가 멋있다. 시가지에서는 그게 문제가 된다. 존재감이 너무 강해서 사람의 활동을 가리고 잎이 커서 낙엽도 많기 때문이다. 나무의 잘못은 아니지만 도시 가로수로 환영받지 못할 이유는 됨 직하다. 그런 제약이 없는 이곳에서는 가지가 매끈하고 힘이 넘친다.

샛강다리 아래에 여러 그루의 이태리포플러가 우뚝 서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키가 크다. 나무 끝을 올려다보니 아득하다. 뿜어내는 에너지가 만만찮다. 그러면서도 다른 나무와 잘 어울린다. 어떤 장소에 어떤 나무가 있는 게 아니라 나무가 바로 장소의 이름이 되는 곳이 있다. 이곳의 이태리포플러가 그렇다. 거목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여의도역 쪽으로 샛강을 건넌다. 가운데에 데크 쉼터가 있다. 호수 속 별장 같은 분위기다. 물 주위의 모든 식물이 생기를 과시한다. 서늘하면서도 따듯한 분위기에서, 물과 나무는 경계를 침범하지 않은 채 함께 하나의 세상을 만든다. 자연의 멋, 생명체의 힘이다.

송장풀
양버즘나무
이태리포플러 줄기

글·사진 김지석 나무의사·언론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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