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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고급 주택지에 개관
국제적 건축가들 여럿 참여
애초 거대한 문화단지로 기획
과시 행위로만 깎아내릴 수 없어
리움 입구
한남동 언덕의 볕 좋은 발치에는 2004년에 문을 연 리움 삼성미술관이 있다. 이태원으로 이어지는 가로변의 다문화적 상업지역과 언덕 위에서 세상을 내려보는 고급 주거지역 사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똬리를 틀었다.
리움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립미술관으로서 공적 역할을 담당하는 동시에 세계적인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해온 지도 벌써 10년을 훌쩍 넘겼다.
리움 입구
유례없는 사립미술관 리움
정부나 국가단체가 아닌 사기업이 견실한 미술관이나 음악당을 마련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고 문화계에서 큰 몫을 하는 일은, 날마다 일어나는 일도 아니지만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또한 문화 사업을 담는 그릇인 건축물도 그 사업의 일부이기에,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의 손에 설계를 맡겨 건축 명품으로 만들고자 적지 않은 공을 들인다.
일본 후쿠오카의 넥서스 월드(여러 나라 출신의 건축가 7명이 설계에 참여한 아파트단지)와 같이 공동주거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유명 건축가들이 협업을 한 경우가 가끔 있었다. 이런 종류의 건축군은 서로 다른 개념과 취향의 건물들과 전체를 이어주는 외부 공간 구성을 경험하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하지만 리움 미술관처럼 문화시설, 더구나 사립미술관이 이런 볼거리 넘치는 건축의 향연을 베푼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독일의 비트라 가구 캠퍼스와 같이 다양한 건축가들의 협업이 이루어진 문화시설이 드물게 있기는 하다. 하지만 시차를 두고 한 채 한 채 필요에 따라 마련되거나 각각의 독립된 건물 작품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통이다. 리움 미술관에서 보듯 함께 모으기도 힘든 국제적인 건축가 여럿을 한자리에 불러, 공간적으로 융합된 하나의 건축군을 형성한 사립미술관의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지 않나 싶다.
리움 측면
외국 건축가 선호…국내파에 자괴감을 안겨
용인의 호암 미술관으로 문화예술계의 일익을 담당해온 삼성은 복잡한 업무지구 중심에 있는 본사 건물에 지금은 폐관된 로댕 미술관(플라토 미술관)을 마련하여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로댕 미술관과 비슷한 시기에 한남동 일대를 문화촌으로 개발하려는 큰 그림을 그리며 시작된 한남동 프로젝트는 현재 리움 미술관의 범위를 한참 넘어선 엄청난 규모의 청사진을 준비했다. 개념적으로는 3단계까지 생각했던 개발 계획 중 첫 단계의 일부가 실현된 것이 지금의 리움 미술관이다. 1단계의 원안도 지금의 결과보다 많은 내용을 담은 상당한 규모의 복합문화사업이었다.
1990년대 전후로 거의 붐을 이루다시피 국내에 상륙한 많은 외국 건축가들은 한국 건축계에 신선한 자극도 주었지만, 동시에 한국 건축가들에게 기회에 대한 상실감과 외국 건축가 선호로 인한 자괴감을 안겨주었고 그런 분위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리움 후면
여러 차례 축소돼 미술관 기능 충실
1단계 계획의 원안에는 포함되었던 영국 건축가 테리 패럴의 의료·보건시설 건축안이 제외되었고, 어린이 박물관과 뮤지엄 숍 용도의 건물도 빠졌다. 테리 패럴의 논리적이고 질서정연하며 현명한 공간적 여행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경제위기로 얼어붙은 나라를 금붙이 모아가며 살려보겠다고 국민들까지 발 벗고 나섰던, 혹독하게 추웠던 시절이었다는 점에서 사업이 축소된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애초에 사회복지시설로 계획되었던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의 건물은 한 동만 남겨 아동 교육문화라는 기능이 얹혔고, 장 누벨(프랑스)이 디자인한 건물 2개 중 제일 높은 곳에 있던 국제회의장도 지워지고 현대미술관 용도의 건물만 남았다.
전체 구성은 여러 동이 취소되고 축소되었지만 남은 건물들의 형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들 중 기능이나 프로그램이 처음과 변함없이 유지된 것은 도자기 박물관으로 알려졌던 마리오 보타(스위스)의 고미술관이 유일해 보인다. 뮤지엄 숍(리움샵)도 미술관 내부의 일부 기능으로 삽입되었다. 미술관이라는 기능에 집중한 더욱 충실한 용도로 정리되었다.
애초에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어떤 뚜렷한 지향점을 지닌 공간적 프로그램이나 목표가 있었다기보다는 일반 수준과 차별화한 높은 품질의 건축물을 기반으로 문화단지를 조성해 문화적 역량을 과시하려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다. 따라서 힘든 시기에 갖가지 사정을 겪으며 발생한 크고 작은 계획상의 변화는 차라리 당연한 과정이었고, 여러 차례 수정과 보완을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정착되었다.
이처럼 수준 높은 건축물을 통한 국가, 도시 혹은 기업의 자아 확인 욕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경제의 상승 무드를 타고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범세계적 현상이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과 같은 수많은 문화시설이 그러했고, 부르즈 할리파와 함께 높이를 다투며 하루가 멀다 치솟는 마천루들도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다. 리움미술관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롯데타워와 함께 우리 곁에서 현시된, 경제적 능력에 바탕을 둔 국제적 자아 확인, 또는 과시 현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파리 개조 사업도 출발은 과시
하지만 쉽지 않은 시간을 견디고 피땀 흘린 노력으로 만들어낸 건축 사업들을 한낱 유치한 과시 행위로 평가절하하기에는 나름의 늠름한 결과들이 아쉽고 억울하다. 이런 야박한 평가에 반론이 될 만한 근거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거의 반세기나 지속됐던 파리 개조 사업에서 찾을 수 있다. 천문학적 예산과 지난한 공사의 불편으로 시민들의 비판과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 사업이 실패했다면 이브 몽탕이 주연했던 프랑스 영화 <공포의 보수>(1953)와 같은 결말이 났겠지만, 다행히도 그 대가로 아름답고 성숙한 현재의 파리를 얻었다. 1980년대에 이들은 또 한번 ‘그랑 프로제’(대형 프로젝트)라는 엄청난 건설판을 벌인다. 오르세 역을 미술관으로 개축하고, 국립도서관을 신축하는 등 대단한 건축적 사건들이 줄지어 벌어졌다. 이 역시 국가의 영광을 되살리고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시쳇말로 ‘국뽕’ 냄새 나는 사업이었으나 후세에 물려줄 엄청난 건축유산이 집중력 있게 도시를 업그레이드시켰다. 그 결과로 마련된 건축물들은 세계인에게는 필수적인 방문지가 되었고, 프랑스 국민에게는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다.
세간의 주목을 견딜 시간이 필요
서울의 품새를 만들고 다듬는 공공성을 띤 건설 사업들도 오늘의 파리를 있게 한 건축물들처럼 나름 신중했을 것이니, 세간의 주목을 견디며 정착할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옛 물줄기를 살리겠다던 청계천 사업은, 내세우던 친환경성 대신 펌프로 물 흘리고 물고기 잡아다 풀어놓는 인공성 환경이라 한동안 욕을 먹다 이제는 제법 시민의 안식처로 자리 잡았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주변을 무시한다는 비난 속에서도 심 봉사 눈도 뜨게 할 매끈한 자태로 흥행몰이에 여념 없다. 새 시청사는 오늘도 시내 한복판에서 지나는 사람들의 스트레스 유발자로 덕수궁의 말림도 뿌리치며 여전한 행패 중이다. 국립 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시민의 사랑 속에 착한 도시의 문화적 쉼터로 안착했고, 수목원 코스프레에 열중하고 있는 서울역 고가도로는 좋은 의도로 막 시작했으니 좀 더 지켜보며 용기를 북돋워줘야 할 듯싶다.
리움 미술관은 앞서 꼽은 공적 자산의 예들과는 달리 시민의 세금을 쓰지 않고 마련된 사립 문화시설이다. 파리 개조 사업처럼 도시 전체를 고려한 계획의 일부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거창한 공립 시설들 못지않게 서울이라는 도시의 퍼즐을 맞추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하고 커다란 조각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때로는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외형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내세운 순수한 문화적 목표 뒤에 자신을 내세우려는 욕심이 비친다 한들 어떤가? 우리 곁에 질 높은 건축의 숲을 만들어 그늘을 향유하게 하고, 결코 쉽게 만나기 힘든 최고의 예술품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니, 리움 미술관의 존재는 우리에게도 이 도시에도 다행일 수밖에 없다.
글·사진 안준석 공학박사·건축가(AIA),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