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석의 좋은 건축 나쁜 건축 이상한 건축

좋은 자리에 잘 만든 건물, 가볍게 쓰인 손바닥 이미지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록 : 2018-03-1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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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을 올라야 할 또 하나의 이유

언덕을 오르면 유리상자 건물

흰 도포 입은 듯 단정한 자세

로비 아트리움과 안중근 의사 좌상

얼마 전 삼일절 기념식을 텔레비전 생중계로 보았다. 사실 손꼽아 기다려 본 것은 아니었고, 모든 지상파 방송이 같은 화면을 전송해대니, 케이블방송 없는 나 같은 사람은 특별한 대안도 없었다. 기대 없이 보았지만 흔히 알던 기념식 같지 않게 여기저기 공연이나 볼거리도 있고 쉬운 방법으로 뜻을 전달하니 좋았다. 허나 고통을 감내하며 민족을 위해 큰 짐을 지셨던 분들과 날을 기리는 자리였으니 조금의 무게가 더 얹혔어도 좋았겠다.

한강이 그렇듯, 남산은 서울의 상징이라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서울 사는 사람들 바람 쐬러 남산 오르는 일 참 드물다. 그래도 이른 시일 안에 짬을 내어 남산에 한번 가보시라. 한눈에 보이는 서울 시내도 좋지만, 옛 생각도 소물소물 나고, 아이들에게 저 건물 예전엔 무엇이었네, 이 길엔 봄에 개나리가 지천이었지 하는 아재 노릇도 재미나다. 여기서 남산을 올라야 할 한 가지 이유를 더 한다면, 그것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기 때문이다.

높이 제한으로 땅 아래로 파고든 건물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정면

남산 도서관 앞에서 그리 심하게 가파르지는 않은 언덕을 천천히 오르면, 하얀 유리상자로 선 건물이 귀퉁이부터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고운 카펫을 펼친 듯한 바닥의 낮은 조경 위에 흰 도포 입은 듯 꼿꼿하고 단정한 자세로 먼 곳에 시선을 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앉아 있다.

공식적으로 제한된 건물의 높이나 르네상스 계획이니 하는 큰 틀 속에서 함께 발을 맞추어 걷는다는 것이 건축가에게는 제약일 수도 있겠으나, 어떨 때는 도움을 주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흔히 걸작으로 평가받는 대단한 건축가들의 기발한 작품 중에도 괴상한 땅 모양이나 어처구니없는 제약을 피하다 나온 것들이 부지기수니 말이다.

누구나 찾기 쉬워야 하는 공공 전시관치고는 입구 찾기가 동네 애들 숨바꼭질 같다. 초행길 방문자들 헤매지 않게 좀 더 친절했으면 싶다. 기껏 언덕을 올라왔는데 입구로 가려면 다시 내려가라니 싶겠지만, 이 건물은 높이 제한 때문에 땅 아래로 파고들었다. 높이 제한을 받는 도심의 복잡한 동네에 넉넉한 층고가 필요한 시설을 만드는 데 흔히 쓰이는 방법이고, 깊은 마음의 공간으로 들어서기 전에 세상의 먼지를 털어내는 긴 진입 공간을 만들기 위한 장치로도 안성맞춤이다. 한켠에 줄지어 있는 안 의사의 휘호가 새겨진 검은 석판들이 경사로를 따라 함께 내려오며 손님을 맞아준다. 입구는 내려선 바닥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유리상자의 한 모퉁이를 파낸 구멍으로 되어 있고, 그리 특별한 인상은 없이 낯을 가린다.

안중근 의사 휘호가 새겨진 돌벽

12의사를 상징한 12개 유리상자

전체 건물은 유리로 만든 12개의 각진 상자들이, 가로 4칸×세로 3칸으로 기둥처럼 서 있는 형상이다. 안 의사와 함께 손마디를 잘라 뜻을 세웠던 12의사를 상징했다고 한다. 남서쪽 모퉁이 유리상자의 다소 어두운 입구를 통해 로비에 들어서면 가운데 유리상자 두 칸을 차지하고 천장까지 높게 비워낸 아트리움 안으로 쓰다듬듯 빛이 내려온다. 그 빛의 한가운데 안중근 의사의 좌상이 놓여 있다. 좌상 뒤편으로는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는 안 의사의 글과 태극기가 커다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추모시설을 한가운데 두고 전시시설의 기능이 감싸고 있어서, 내부의 전시 동선을 따라 돌다보면 여기저기 모퉁이마다 중심의 아트리움을 통해 보이는 추모 공간을 계속 스치며 만나게 된다.

전시 관람을 위한 여행은 로비에서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올라가면서 시작된다. 에스컬레이터와 추모 공간을 갈라놓은 높다란 벽에는 이동하는 관람자의 눈높이를 따라 사선으로 길게 잘라낸 틈을 두었다. 하지만 올라가며 눈으로 좇으려 애쓰던 안 의사 좌상은 자꾸 눈 밖으로 벗어난다. 키 작은 어린이에게도 키 큰 어른에게도 그 높이는 애매하고 벽은 두터워, 세심하고 정확하게 배려되지 않은 기능은 기발함의 흔적만 남았다. 그런데 그 틈을 통해 다른 높이와 각도로 펼쳐지는 아트리움을 보는 것도 꽤 재미나다.

건축가의 세심한 디자인 어휘 곳곳에 숨어

내부의 전시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주 대상으로 한 듯하다. 애들과 함께하니 어른들은 즐겁고 교육도 해주니 보람된 시간이겠으나, 혼자 온 어른은 어린이들에 둘러싸여 만화영화 보는 것처럼 머쓱하다. 프랑스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에서 동시라는 것이 따로 없이 어려울 법한 시를 그냥 경험하게 한다 들었다. 같은 시를 시간을 두고 반복해 읽으며 나이에 맞는 이해를 키우고, 살아가는 세월의 깊이도 더한다고. 이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도 그랬으면 싶다. 북쪽 상자들은 넉넉한 강당을 품고 있고, 그중 북동쪽 상자에는, 아랫부분을 밖으로 열어 안과 밖을 하나로 묶으며 넓은 외부 계단으로 이어져 올라가는 소통의 공간이 자리한다.

전시 관람을 마치면 다다르게 되는 남동쪽 모퉁이의 유리상자는 12개 상자 중 유일하게 맑은 유리로 되어 있어 주변이 훤히 보인다. 건축가의 세심한 디자인 어휘들은 지나는 곳곳에 숨어 있어 방문자를 즐겁게 하지만, 이 맑고 투명한 유리상자 속에선 특히 더 그렇다. 계단을 둘러 내려오며 펼쳐지는 환경을 구성하는 갖가지 요소들이 기능 외의 풍부한 경험을 제공한다. 색종이 접기를 한 듯 얇은 철판으로 접은 경쾌한 디딤판과 날렵한 핸드레일의 만남. 높은 천장에서 내려온 가는 철봉에 매달리고, 강철판 한 장으로 떠받힌 듯 보이는 계단. 빛이 가득하니 바람도 함께 따라 들어올 것만 같은 유리방을 자유롭게 둘러선 나무숲. 안중근 의사와 다른 열사들을 뵙고 돌아가는 손님들을 멀리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려는 마무리에 마음 씀이 느껴진다.

건축가 초대받지 못한 개관식

좋은 자리에 잘 만든 근사한 건물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들도 남는다.

선명하게 주장도 못 하고 불투명한 유리 뒤에 숨은 희미한 ‘안중근’ 세 글자 때문에 어그러진 정면이 안타깝고, 제주도의 어떤 건물 외벽에 써붙인 ‘세계적인 건축가 아무개의 작품’이라는 글귀가 떠오른다. 장 누벨의 리움 미술관이 그랬듯, 제한된 볼륨의 상자 속에 갇힌 전시실들의 공간적인 가능성도 우려된다. 들어가는 입구 맞은편의 북향 돌벽에 퍼렇게 자라 있는 이끼도 불편하지만, 한없이 무거워야 할 안 의사의 손바닥 이미지를 여기저기 가볍게 쓰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가볍게 쓰인 손바닥 이미지

즐거운 명절에 마음 상한다고, 이 건물은 힘든 일 다 지난 완공 후의 기념식에 건축가를 초대하지 않은 일로, 작가 없는 출판기념회 꼴이라며 건축계가 들끓었다. 건축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 시티: 홀’(정재은 감독, 2012)에도 서울시 신청사의 개관식에 초대받지 못한 건축가가 단상 앞에 마련된 수많은 의자 하나 차지하지 못하고 땅바닥 한구석의 거적 위에 초라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나온다.

뜻을 모아 쌓은, 드물게 좋은 기념관을 얻었는데, 기념관 웹사이트는 자랑스러운 자산을 손에 쥔지도 모르는지 멀뚱멀뚱 먼 산만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일에 건축가들이 조직적으로 분노를 표할 가치가 있는지도 난 잘 모르겠다. 설계 과정 중엔 내 자식 같지만, 내 손 떠나 사회에 속하면 멀리서 보며 마음은 저려도 제 갈 길 가야 할 물건인데…. 건축 문화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사회의 무심함은 안타깝지만, 건축가의 영광은 그들의 초대나 준공비에 새겨진 이름 따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이루어낸 결과에 있을 뿐이니, 그런 섭섭함쯤 지워버리고 차라리 자신을 경계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나을 듯하다.

안 의사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내 몸을 희생하여 어진 일을 이루고자 했을 뿐이다’라고.

글·사진 안준석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ㅣ건축가(AIA)·공학박사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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