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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 만난 케이팝 스타 아버지
대뜸 자기를 “형님으로 불러라”
나이 풍습은 글로벌 관습과 충돌
친구가 돈으로 보이면 관계 파탄
나이 때문에 가끔 황당한 일을 경험한다. 몇 년 전이다. 케이팝으로 한창 국제적 인기를 끌던 걸 그룹 출신 연예인과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그의 부친과 저녁 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는 딸의 매니저 역할을 겸하고 있었는데, 인사를 나누자마자 불쑥 반말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아, 그러면 나보다 한 살 아래구먼? 그러면 지금부터 나에게 형님이라고 해! 알았지? 술 한잔 따라봐!”
한 손을 내밀며 그렇게 명령했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아니고 중년의 남자들이 모인 자리, 그것도 비즈니스를 협상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형과 아우라는 호칭을 강요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눈에 무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연예인의 부친은 평생 건달 비슷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진 딸의 인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 회사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그를 만난 것이지, 그보다 나이가 한 살 적은 ‘아우’로 만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날 미팅은 별 소득 없이 끝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연예인과 그가 속했던 아이돌 그룹의 인기는 그 이후 급속히 소멸했다. 일본 언론은 한류의 일시적인 인기를 가리켜 ‘모에쓰키’ 현상이라 했다. 일본어로 ‘모에’는 ‘불이 붙음’ ‘불탐’이라는 뜻이고, ‘쓰키’는 ‘소진’이란 의미인데, 한류 스타들이 단기 수익에 집착해 에너지와 능력을 남김없이 모두 태워버려 남은 것 없는 상태를 꼬집은 표현이었다. 그 연예인 부친의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나이와 관련해 지독한 서열 문화가 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에 형이나 언니, 그리고 동생을 구분하는 법부터 가르친다. 그런 까닭에 일단 서열을 정해야 호칭과 언어가 편해진다. 동네 형, 아는 동생, 선배와 후배란 말도 한국 아니면 듣기 힘든 단어다. 그 상하 관계는 죽을 때까지 영원히 지속된다. 나이가 같으면 당장 말을 튼 뒤 친구라 부른다. 같은 학교를 졸업하면 역시 친구라 한다. 그런 문화권에서 우리는 성장했다. 반면에 나이가 다르면 친구라 하기 힘들다. 이 같은 관습은 외국인들에게는 무척 낯선 모양이다. 가끔 참석하는 모임에는 두어 명의 외국인이 있어, 어느 날 그 모임에 친구를 데려오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다. 그 외국인은 30대의 여성, 나중에 나타난 그의 친구는 50대의 외국인이었다. 그러자 다른 한국인 참석자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아니, 어떻게 친구예요? 이모 아닌가요? 최소한 큰언니라 불러야지!” 농담 섞인 인사말이었지만, 외국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친구와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의 개념은 달라도 너무도 달랐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아직도 수평 관계가 아닌 수직 관계, 그리고 서열 문화 속에 사는 것으로 비쳤다. 나이와 관련된 풍습은 글로벌 관습과 크게 충돌한다. 한국 사람이 나이 적은 직장 상사가 있으면 매우 불편해하는 상황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존대 어법도 낯설고, 연장자 앞에서는 솔직한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풍경도 그렇다. “아니, 나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에요? 능력에 따라 상하 관계가 정해지는 게 당연하지, 어떻게 먼저 태어났다고 상사가 되고 나중에 태어났다고 부하가 되나요?” 한국 사회의 특성인 ‘빨리빨리 문화’는 사람 관계에도 적용된다. 만나자마자 빨리 서열을 정하고, 흉금을 털어놓으려 한다. 본인도 그렇고 상대에게도 그것을 강요한다. 일단 친구가 되면 모든 것을 까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인간적 모습’이라는 것이다. 친구라는 이유로 불쑥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해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 과연 인간적인 모습일까? 빨리 달궈진 쇠가 빨리 식는다는 말처럼, 급하게 생긴 인간관계에서는 가끔 문제도 생긴다. 비밀을 지켜줄 것 같아서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여기저기 그 이야기를 퍼뜨려 결국 곤경에 빠뜨리 는 사람도 있다. 기쁜 일이 있어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더니, 영혼 없는 축하의 말을 하고 돌아서서는 시기심 가득한 말을 퍼뜨린다면 그는 친구가 아니다. 가끔은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해 낭패를 보기도 한다. “한 달만 빌려줘. 요즘 회사 실적이 너무 좋은데 자금 회전이 잘 안 돼서 그러니 한 달만 도와줘! 고마움 잊지 않을게!” 애절한 그의 얘기를 듣고 적지 않은 금액을 빌려줬더니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 그가 잠적했다는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었다. 이미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황이었지만 나만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년 뒤 그는 다시 나타났으나 허세로 가득했다. 결국 그가 원한 것은 또 다른 돈이었다. 변함없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인생의 축복이다. 우리는 뭔가를 잃어봐야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된다. 돈을 잃고, 직장을 잃고, 명성을 잃어보아야 진정한 친구가 보인다. 직장을 나오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저쪽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이쪽의 문제일 수도 있다. 상처를 준 사람은 늘 인식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도대체 누가 친구인가? 친구와 친구가 아닌 기준은 분명하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관계를 이용해 뭔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이다. 만약 친구나 동료마저 돈으로 보인다면 그때는 이미 끝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 『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나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 회사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그를 만난 것이지, 그보다 나이가 한 살 적은 ‘아우’로 만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날 미팅은 별 소득 없이 끝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연예인과 그가 속했던 아이돌 그룹의 인기는 그 이후 급속히 소멸했다. 일본 언론은 한류의 일시적인 인기를 가리켜 ‘모에쓰키’ 현상이라 했다. 일본어로 ‘모에’는 ‘불이 붙음’ ‘불탐’이라는 뜻이고, ‘쓰키’는 ‘소진’이란 의미인데, 한류 스타들이 단기 수익에 집착해 에너지와 능력을 남김없이 모두 태워버려 남은 것 없는 상태를 꼬집은 표현이었다. 그 연예인 부친의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나이와 관련해 지독한 서열 문화가 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에 형이나 언니, 그리고 동생을 구분하는 법부터 가르친다. 그런 까닭에 일단 서열을 정해야 호칭과 언어가 편해진다. 동네 형, 아는 동생, 선배와 후배란 말도 한국 아니면 듣기 힘든 단어다. 그 상하 관계는 죽을 때까지 영원히 지속된다. 나이가 같으면 당장 말을 튼 뒤 친구라 부른다. 같은 학교를 졸업하면 역시 친구라 한다. 그런 문화권에서 우리는 성장했다. 반면에 나이가 다르면 친구라 하기 힘들다. 이 같은 관습은 외국인들에게는 무척 낯선 모양이다. 가끔 참석하는 모임에는 두어 명의 외국인이 있어, 어느 날 그 모임에 친구를 데려오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다. 그 외국인은 30대의 여성, 나중에 나타난 그의 친구는 50대의 외국인이었다. 그러자 다른 한국인 참석자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아니, 어떻게 친구예요? 이모 아닌가요? 최소한 큰언니라 불러야지!” 농담 섞인 인사말이었지만, 외국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친구와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의 개념은 달라도 너무도 달랐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아직도 수평 관계가 아닌 수직 관계, 그리고 서열 문화 속에 사는 것으로 비쳤다. 나이와 관련된 풍습은 글로벌 관습과 크게 충돌한다. 한국 사람이 나이 적은 직장 상사가 있으면 매우 불편해하는 상황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존대 어법도 낯설고, 연장자 앞에서는 솔직한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풍경도 그렇다. “아니, 나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에요? 능력에 따라 상하 관계가 정해지는 게 당연하지, 어떻게 먼저 태어났다고 상사가 되고 나중에 태어났다고 부하가 되나요?” 한국 사회의 특성인 ‘빨리빨리 문화’는 사람 관계에도 적용된다. 만나자마자 빨리 서열을 정하고, 흉금을 털어놓으려 한다. 본인도 그렇고 상대에게도 그것을 강요한다. 일단 친구가 되면 모든 것을 까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인간적 모습’이라는 것이다. 친구라는 이유로 불쑥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해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 과연 인간적인 모습일까? 빨리 달궈진 쇠가 빨리 식는다는 말처럼, 급하게 생긴 인간관계에서는 가끔 문제도 생긴다. 비밀을 지켜줄 것 같아서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여기저기 그 이야기를 퍼뜨려 결국 곤경에 빠뜨리 는 사람도 있다. 기쁜 일이 있어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더니, 영혼 없는 축하의 말을 하고 돌아서서는 시기심 가득한 말을 퍼뜨린다면 그는 친구가 아니다. 가끔은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해 낭패를 보기도 한다. “한 달만 빌려줘. 요즘 회사 실적이 너무 좋은데 자금 회전이 잘 안 돼서 그러니 한 달만 도와줘! 고마움 잊지 않을게!” 애절한 그의 얘기를 듣고 적지 않은 금액을 빌려줬더니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 그가 잠적했다는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었다. 이미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황이었지만 나만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년 뒤 그는 다시 나타났으나 허세로 가득했다. 결국 그가 원한 것은 또 다른 돈이었다. 변함없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인생의 축복이다. 우리는 뭔가를 잃어봐야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된다. 돈을 잃고, 직장을 잃고, 명성을 잃어보아야 진정한 친구가 보인다. 직장을 나오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저쪽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이쪽의 문제일 수도 있다. 상처를 준 사람은 늘 인식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도대체 누가 친구인가? 친구와 친구가 아닌 기준은 분명하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관계를 이용해 뭔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이다. 만약 친구나 동료마저 돈으로 보인다면 그때는 이미 끝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 『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