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틀에서 벗어나니 멋있는 나의 옛것

나이 듦에 대하여

등록 : 2018-11-22 14:43 수정 : 2018-11-22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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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노년 시기 구분 상대적

클럽 가기 어려운 나이, 영국선 37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은

복고가 아니라 옛것과 새것의 결합

중년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를 말하는가? 청년의 시작은 알겠는데, 그 졸업과 중년의 출발 시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35살? 마흔? 혹은 40대 중반인가? 그러면 중년은 언제 끝나고 노년이란 인생의 언제부터를 의미하는가? 아직 사회적인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듯하다. 며칠 전에 목격한 풍경도 그중 하나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할머니 세 분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 나이 들어 보이는 할머니가 가장 젊어 보이는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댁네는 몇 살이나 되었수?”

“올해 일흔하나 되었어요.”


“어이쿠, 그러면 아직 아기네, 아기!”

100세 시대의 새로운 풍경이다. 65세가 되면 지하철도 무료로 탈 수 있다 해서 ‘지공거사’라고도 하지만, 그 나이를 훨씬 넘어선 할머니가 여기서는 어린아이로 대우받고 있었다. 분명 나이에 대한 상식이 깨지고 있다. 나이라는 것이 상대적이어서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늙었다고 여겨지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젊다고 인식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만 그런 것은 아니다. 며칠 전 우연히 본 영국 신문의 헤드라인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How old is too old?”(하우 올드 이즈 투 올드?)

“도대체 몇 살이 되어야 너무 나이 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었다. 영어 단어의 운율을 맞춘 제목이었다. 사실 영국 신문의 이 기사는 거리낌 없이 클럽에 들어가 청년들과 함께 춤추며 즐길 수 있는 나이, 즉 그것이 적절한 나이의 시한에 대한 질문이었다. 조사 결과 영국인들이 가장 많이 응답한 나이는 37살이었다. 심리적 분수령이었다. 딱 거기까지라고 스스로 설정한 한계였다. 말을 바꾸면 그것은 곧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느끼는 중년의 시작일 수도 있다.

노년에 대한 관념도 크게 바뀌었다. 소비자 데이터 분석 기관에 따르면, 40대는 50대부터라 말하고, 50대는 60대부터라 생각한다. 60대 사람들은 70대부터가 노년이라 정의한다. 결국 노년이란 마음의 설정이다.

그러면 자동차는 몇 년 타고 교체하는 것이 적절할까? 시내에 나갈 경우 나는 보통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지만 그날은 하루에 연거푸 세 건의 강연이 있어서 할 수 없이 자동차로 이동해야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평소에 여유 있던 그 공공기관의 주차장은 그날따라 만원이었다. 강의 시간이 임박해 할 수 없이 이중주차를 해놓은 뒤 운전석 앞자리에 전화번호와 간단한 메모를 해놓고 담당 직원에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자동차 키를 맡겨두었다. 강연이 끝나고 나오는데 키를 돌려주면서 그 직원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정말 오래된 자동차 타시는군요! 노후화된 자동차여서 뜻밖이었습니다.”

16년 된 국산 자동차이니 사실 연식이 오래되기는 했다. 독일 특파원을 끝내고 귀국한 직후 구입한 자동차로 그동안 소모품만 교체했을 뿐, 별다른 고장이나 사고를 일으킨 적이 없기에 굳이 바꿔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 직원처럼 신기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을 만난다. 과거 대표이사를 역임했던 나의 경력을 참작해 그들은 머릿속에 나름의 그림을 그렸을지 모른다. 그것은 ‘당연함’에 대한 질문이다. 10년이 넘은 자동차는 당연히 교체해야 하고, 대표이사를 역임한 사람은 외제 차는 아니더라도 당연히 일정한 수준의 차를 몰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요즘 강연도 많이 한다면서 이제는 새로운 자동차 마련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멋진 것으로 하나 뽑으시죠!”

물론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요구가 아닌 응원가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장만해야 멋진 것일까? 정말 그럴까? 그것은 당연함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흔히 오래되어서 좋은 것들로 친구와 와인을 말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되어서 편하고 익숙하며 더 나아가 자긍심을 느끼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는 널려 있다. 돈만 주면 쉽게 사는 자동차가 더 품위 있는 걸까? 아니면 오래되었지만 정성을 다해 기름칠하고 관리를 잘해 오래도록 함께하는 자동차가 더 자랑스러운가? 어느 쪽인가?

요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이 분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영국 밴드 퀸과 전설적인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단순한 복고 열풍일까? 그것만으로는 나이 든 부모 세대뿐 아니라 젊은이들까지 열광하는 문화 코드를 읽어내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새로움에 지쳐 있다. 시간은 지났지만 변하지 않고,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바라고 또 기대한다. 반면 단순한 복고만으로는 힘들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해석이 가미되어야 한다. 이 시대에 맞게 읽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나의 옛것이 멋있는 옛것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옛것과 새것의 결합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간혹 인문학에 대해 어렵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지만 핵심은 이 질문이다. 불확실한 현재,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담아 내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나는 특파원 시절 입고 다녔던 트렌치코트를 다시 걸치고 다닌다. 비록 소매가 해어졌지만, 그 옷에는 내가 평생 사랑했던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담겨 있기에 자랑스레 입고 다닌다. 그 옷이 곧 내 인생이다. 그러니 쉽게 버릴 수 있을까? 비록 누군가의 눈에는 빈티 나 보일지 몰라도 내게는 분명 빈티지 코트다. 오래되었다고 함부로 대할 일은 아니다.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 너무 오래된 것이란 없다. 스스로 설정한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이라는 프레임을 깨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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