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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맑아진 성북천에 초록이 우거지자 새들이 날아들었다. 개발로 망가진 환경이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초록이 짙어진 성북천에 왜가리가 날아든다. 낯설다. 왜 낯설까? 그동안 서울은 인공적인 개발로 새 한 마리 보기 힘들다고 했는데 자연환경이 복구되면서 새들이 찾아왔다. 돈암동·보문동 한옥 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조금 더 행복해졌다.
1930년대 말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한옥이 빼곡하게 찬 돈암동·보문동에 친가를 둔 사회활동가 김명신씨가 이모 정정옥(86)씨를 모시고 왔다. 이 동네 삶과 역사를 연륜의 차이만큼 더 많이 알기 때문이다. 김씨의 친가는 비교적 규모가 큰 한옥이다. 이모 정씨는 김씨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자랄 때에도 함께 살았다. 이모 정씨는 최근 시선 집중을 받는 서울의 또다른 한옥마을 종로구 익선동에서 태어나 12살 때인 1941년 보문동으로 이사왔다. 그때 처음 전차를 탔고 신설동역에서 내려 걸어왔다고 했다. 돈암동에 전차 종점이 생기기(1941년 7월21일) 전의 일이다.
“이사 오니까 초가집이 많았어. 우리 집도 초가집이었어. 그때 아부지가 형편이 안 좋았거든. 이사 오는데 전차에서 엄마가 자꾸 우시더라구.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엄마 엄마, 저 나무가 가’ 그랬어.”
이 이야기는 일제가 경성부(서울시) 확장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하는 중에도 이 지역은 삼선평으로, 농촌 지역이었고 초가 마을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보문동에 큰 한옥을 친가로 둔 김명신(오른쪽)씨와 이모 정정옥(왼쪽)씨가 오랜만에 만나 돈암동과 보문동에 한옥이 들어서던 옛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모 정씨는 보문동에서 해방을 맞았고 6.25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10년 만에 다시 보문동으로 돌아왔다.
“피난살이 10년 만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새 집을 짓고 있었어. 그게 이 집이야.”
이모 정씨의 말은 김씨 친가인 근대 한옥이 지어진 해가 1960년이라는 증언이기도 하다. 근 60년이 된 집이지만 아직 깨끗한데, 당시만 해도 자재가 좋고 목수 솜씨도 좋았던 탓이다.
집이 지어질 즈음 김씨는 대여섯살이어서 엄마 손에 이끌려 다니던 보문시장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보문시장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노릇일까?
옛 보문시장 들머리에서 30년째 열쇳집을 지키는 김영주씨가 주문 받은 열쇠를 만들고 있다. 보문시장이 한창일 때는 가게 앞 골목에 시장 가는 사람들로 꽉 찼다고 회고한다.
옛 보문시장통 들머리에서 열쇳집을 하는 김영주(77)씨는 “이 자리에서 30년 했어. 저 주상복합 자리가 본래 보문시장이야. 그런데 5~6년 전에 저 건물 짓고는 망했어. 사람들이 안 들어가. 비싸서 안 들어간대.” 옛 보문시장 들머리에 녹슨 간판만 걸려 있는 까닭이다. 근대한옥마을의 중심에 자리 잡아 잘나가던 시장이 한순간에 사라진 건 개발 광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오후 4,5시가 되면 골목에 사람들이 꽉 찼어. 그 시간이 되면 열쇠 출장도 못 가. 찾아오는 손님 받아야지!” 과거가 돼 버린 전성기를 회고하는 김씨의 말에서 흥분이 묻어났다. 보문시장 상인 조합장이 시장연합회 이사도 했을만큼 번창했던 보문시장은 사라졌고, 지금은 돈암시장이 명맥을 잇고 있다. 돈암동 골목시장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1940년대에 집단으로 지어진 한옥골목에 햇살이 비추고 이집 저집에서 기척이 있지만 재개발 예정에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다. 곱게 단 함석 빗물받이를 매단 처마는 옛 모습이지만, 담벼락은 세월을 지나며 여러 모습으로 바뀌 었다.
그나저나 흔히 전통시장이라 하는 시장들 대부분은 골목에 있을까? 일제가 1919년 일정한 터에 공설시장이란 것을 만들어 이전까지 있었던 전통시장을 폐지한 탓이다.
골목은 사람들을 만나게 한다. 골목을 오가며 만나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도 나누고공동체를 만들어간다. 사람이 몰리니 점포가 생기고 주점도 생긴다. 어떤 골목에서는 다듬이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재봉틀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것들이 상품이 되면서 자연스레 시장이 됐을 터였다.
창호문 밖으로 새어나오는 다듬이소리는 정갈한 한국 여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재봉틀 소리는 성실한 골목 사람들을 상상하게 한다. 게다가 아이들은 골목 안에서 자란다. 아이들은 골목에서 놀며 다투기도 하고 편짜기도 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율과 규칙을 만들기도 한다. 실핏줄처럼 가느다란 골목이 살아 있는 돈암동 보문동 한옥마을에서 사람들은 더 행복할 수 있다.
글·사진 김란기 '살맛나는 골목세상'탐사단 운영, 문화유산연대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