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을 걷다

임금의 사냥터 걷고, 한강 위 초승달 마중가고…

성동구 ‘서울숲 남산길’ 중 서울숲~응봉산 4㎞

등록 : 2019-02-14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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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들이 매 풀어 꿩 사냥하던 곳

잔디광장 한가운데 피아노를 쳐보니

이 세상과 상관없는 소리로 들려

인근 응봉산에서 한강 달을 마중

사진 장태동

언제부터인지 사람들 사이에서 ‘꽃샘’이란 말보다 ‘한파’라는 말이 익숙해지는 것 같다. 2월 중순 넘어 드는 한파는 꽃샘이다.

양지바른 곳 나무는 벌써 움을 틔웠다. 새싹과 꽃을 시샘하는 꽃샘이 있어야 새봄이다. 꽃샘추위, 꽃샘바람, 꽃샘잎샘….


나비가 날고 사슴이 노는 서울숲에서 한강 위에 뜬 달을 볼 수 있는 응봉산까지 이름도 예쁜 꽃샘을 마중하러 길을 나섰다.

서울숲을 거닐다

서울숲은 잘 짜인 쉼터다. 쉬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공간이다. 옛날에도 그곳은 그랬다. 서울숲과 응봉산 일대가 조선 시대에는 임금과 왕실 사람들의 매 사냥터였다. 매를 날려 꿩을 잡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 태조부터 성종 때까지 임금들이 매 사냥을 하러 150여 차례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한강이 개발되기 전까지 이곳은 광나루 일대, 가래여울 마을 일대와 함께 한강 동쪽 3대 유원지였다. 백사장이 펼쳐진 한강의 풍경을 즐기며 노는 것은 물론이고, 강에 배를 띄우고 노니는 풍류도 즐겼다. 왕실의 놀이터에서 시민들의 놀이터로, 그리고 지금은 한갓진 풍경 속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쉼터가 됐다.

서울숲 출입구는 여러 개다. 그중 9번 출입구에서 출발했다. 9번 출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은행나무숲이 있다. 은행나무들이 촘촘하게 들어섰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치솟았다. 은행나무숲으로 꽃샘바람이 불어간다. 숲속 벤치에 앉은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린다. 김 나는 잔을 두 손으로 쥐고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가을에 떨어진 은행잎이 숲 바닥에 깔려 바스러졌다. 그 위로 나무 그림자가 촘촘하게 드리운다. 사람 한 명 지날 수 있는, 줄지어 선 나무 사이로 걷는다.

잔디광장 무대에 피아노가 놓였다. 피아노를 보고 있으면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람들은 피아노 앞을 그냥 지나친다. 피아노로 다가간다. 왠지 긴장된다.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서툰 손가락 놀림에도 피아노는 제소리를 낸다. 무대를 울리고 잔디광장으로 퍼지는 피아노 소리가 이 세상과 아무런 상관없는 소리 같았다.

그 소리가 닿았을 것 같은 잔디광장 맨 끝까지 걸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줄지어 선 길을 걸어 조각정원을 지나 군마상 앞에 도착했다.

거인의 나라 숲속 놀이터를 지나 나비가 노니는 곤충식물원으로

거인의 나라 거인상. 사진 장태동

숲속 놀이터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한 건 햇볕 받은 억새였다. 따뜻한 봄이 오면 아이들 웃음소리가 한가득 담길 작은 놀이터의 울타리를 지난가을 피어난 억새가 지키고 있었다.

놀이터 옆 거인의 나라에는 나무보다 더 높고 커다란 사람 모습의 조형물이 있다.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거인상의 가슴에 바람개비가 달렸다. 박동하는 심장 같았다. 바람개비는 바람이 불면 끝없이 돌 것 같았다. 봄을 닮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 바람개비를 돌리는 끝없는 바람이 아닐까?

거인의 나라를 뒤로하고 도착한 곳은 갤러리정원이다. 옛 정수장 시설을 다 허물지 않고 남겨놓은 곳에 마른 담쟁이넝쿨이 그림처럼 남았다. 넝쿨이 만든 선이 추상화처럼 보인다. 아이가 엄마 손을 애써 끌며 그 정원 안으로 가자고 보챈다. 엄마는 꽃과 나비를 보러 가자며 아이를 달래는데 아이의 마음은 벌써 갤러리정원 안에 있었다. 푸른 식물과 꽃과 나비가 있는 곤충식물원으로 가는 길, 재잘대는 아이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곤충식물원의 훈훈하고 습한 공기에 꽃샘추위를 잠시 잊는다. 이곳에는 벌써 꽃이 피었고, 초록빛 무성한 여름도 있었다. 꿈틀거리며 자라난 아가베의 모습에서 태양의 나라 멕시코의 열기가 느껴진다. 마다가스카르가 원산지인 꽃기린은 노란 꽃을 피웠다. 열대의 초록 숲을 거니는 기분으로 도착한 곳은 유리온실 식물원 안에 있는 또 다른 작은 온실이다.

카메라 렌즈에 뿌옇게 습기가 찬다. 땀이 난다. 그 속에서 꽃이 피었고 나비들이 이꽃 저꽃으로 날아다닌다. 더러는 공중에서 짝을 지어 나부끼듯 난다. 날아다니는 나비들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나비를 보는 마음은 그저 정답기만 하다. 그곳에서는 아이들도 어른들도 나비만 바라본다.

한강 위에 뜬 초승달을 본다

나비의 온실을 나와 계단으로 내려서면 극락조화가 사람들을 반긴다. 꽃 모양이 새를 닮았다. 화려한 꽃에 취해 그 앞을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곤충식물원을 나서는 발길을 꽃샘바람이 맞이한다. 해가 기울면서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슴들이 노는 사슴 방사장에 도착했다. 철망을 사이에 두고 사슴과 눈을 마주친다. 바람의 언덕으로 올라가 사슴 방사장을 굽어볼 수 있는 보행 가교로 접어든다.

보행가교 중간에 서서 앞으로 가야 할 응봉산을 한눈에 넣는다. 수양버들 가지가 꽃샘바람에 움을 숨긴 듯 능청맞게 흔들거린다. 그 아래 웅덩이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겨울이 얼음으로 남았다. 그 풍경을 마음에 담고, 왔던 길을 되짚어 바람의 언덕으로 돌아간다. 바람의 언덕을 지나서 11번 출입구로 나간다. 응봉산으로 가는 길이다.

바람의 언덕. 사진 장태동

응봉산으로 가는 길, 용비교를 건넌다. 바람보다 빨리 달리는 차들의 소음만 없다면 다리를 건너면서 보는 중랑천과 응봉산의 풍경도 그럴듯하다. 응봉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접어든다. 계단을 다 올라서서 응봉산 정상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른다. 봄이면 개나리꽃길일 텐데, 개나리꽃으로 뒤덮인 응봉산은 서울 봄의 상징 중 하나다.

빈 가지 무성한 길을 지나 정상에 오른다. 넓은 마당 가장자리가 다 전망 좋은 곳이다. 압구정동 아파트 단지 앞을 굽이쳐 흐르는 한강의 물줄기, 강에 놓인 다리들, 멀리 관악산까지 한눈에 보인다. 압구정동 아파트 단지 맞은편 강 건너 산비탈 마을에 늦은 오후의 햇볕이 내려앉는다. 자리를 옮기면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산 아래 경의중앙선 철길로 전철이 오간다.

바쁠 것 없는 산 위의 시간으로 바라보는 산 아래 풍경이 어두워진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도로와 건물이 인공의 불빛에 장악되는 사이, 어느새 한강 위로 초승달이 떴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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