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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변방 포르투로 훌쩍 떠났다
익명의 도시 부엌서 만난 사람들
함께 요리하며 서로의 사연 나누다
인생의 반전 꿈꾸는 조앤 롤링을 보다
여행이란 낯선 침대와 만나는 행위다. 낯선 것은 침대만은 아니어서 음식이 다르고 거리의 풍경도 다르고 언어와 풍습,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같은 것을 찾기가 오히려 힘들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 하는 이유다. 그러한데도 우리는 왜 먼 길을 떠나려는 걸까? 뒤집어보면 바로 그 다름과 낯섦이 여행자를 설레게 한다. 먼 곳으로 이끄는 동력이다.
그런 생각에 도달할 즈음 포르투갈 북부의 ‘포르투’라는 낯선 도시가 나를 유혹했다. 비시즌이라 매우 저렴한 항공권이 물론 매력적이었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다. 익명이 끄는 유혹이었다.
“아는 사람 단 한 명 없고, 말도 모르는 곳에서 완벽한 이방인으로 지내보면 어떨까?”
혼자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가급적 발바닥으로 그 도시를 만날 것, 검소하게 지낼 것, 현지에서 생활 체험을 많이 할 것, 이런 3원칙이었다. 호텔이 아니라 현지인의 집에서 방 한 칸을 빌리기로 했다. 관광 중심지에서 살짝 비켜 있던 그 집은 포르투의 은퇴자 부부가 방 여러 개를 세놓아 생활하는 곳으로, 투숙객들은 대부분 장기 체류자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건축학 석사 과정의 남녀 커플 유학생, 디자인 일을 한다는 헝가리 여성 직장인, 온라인 마케팅 일을 하는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30대 남자, 러시아에서 온 여행업 종사자 등 글로벌 하숙집 분위기였다. 처음엔 몰랐지만 그 집에는 작은 규칙이 있었다. 저녁 7시가 되면 부엌에 모여 저마다 준비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눴다. 개인의 영역과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되 식사 때만큼은 모여 함께 만들고 나누는 공간, 진정한 의미의 공유부엌이었다. 부엌은 흡사 세계 음식 경연대회가 열린 것 같았다. 한국의 전골 비슷한 포르투갈의 프란세지냐, 헝가리의 굴라시(매운 수프), 프랑스의 양파 수프, 오스트리아의 슈니첼(송아지 고기로 만든 커틀릿) 같은 것들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 대부분 아직 주머니에 여유가 없는 까닭도 있겠지만, 절약 정신이 배어 있었다. “한국 음식은 어떤 거야? 한번 만들어봐!” 그들은 나에게 요리 동참을 권유했다. 멀고도 먼 극동에서 온 중년 아저씨를 글로벌 식탁에 끼워준 것은 물론 고마웠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다른 음식 재료 준비 없이 왔던데다, 솔직히 말하면 요리를 할 줄 몰랐던 까닭이다. 국경을 벗어나 혼자가 되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내가 진짜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생활해왔는지 깨닫는다. 삶의 가장 기초인 식사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있는, 초라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갑자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심은 심정이었다. 초면에 아무것도 안 하고 얻어먹기도 무엇해서 나는 설거지를 자청했지만, 그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돌자 헝가리에서 온 여성이 어디선가 술 한 병 들고 왔다. 슬로바키아 산악 지대에서 생산되는 ‘타트라트’(Tatrat)라는 이름의 75도 독주였다. ‘불탄다’라는 어원을 가졌다는 것만 보아도 얼마큼 독한 술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정말 목구멍이 불탔다. 함께 요리하고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사람들은 더 가까워진다. 식탁에 있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굳이 대륙의 끝에 있는 이 도시까지 온 이유는 뭐냐?” “포르투는 날씨가 좋고, 무엇보다 물가가 무척 싸. 우리는 여기서 살고 싶어. 부모님이 도와준다고 했지만 우리 힘으로 살 거야. 일단 우리 전공인 건축 분야에서 인턴 자리는 나왔으니 여기서부터 뭔가 천천히 만들어보려고 해!” 독일 옆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온 남녀 커플의 답변이다. 그러자 프랑스에서 온 남자가 끼어들었다. 보르도 출신답게 와인에 일가견이 있고 요리 솜씨까지 뛰어났다. 외국 여러 곳을 이동하며 일하고 있는 덕분에 영어가 매우 유창했다.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얼마 전까지 함께했던 회사가 파산했어. 몇 달 일한 건 무용지물이 된 셈이지. 그래도 나는 돈과 자유의 균형을 잃고 싶지 않아. 여기서 힘을 길러 다른 도시로 옮길 생각이야.” 그는 디지털 노마드였다. 정보통신이 발달하면서 유목민처럼 도시와 국가를 이동하는 삶이라는 단어 뜻 그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유란 얼마나 힘들 게 얻어지는 것인지 그의 얼굴에서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헝가리 여성에게 물었다. “지금 너는 뭐가 가장 간절하냐?” “나는 포르투에서 자리잡고 싶어. 유럽연합에 통합되어서 이곳까지 건너올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좋은 일자리는 구하기 힘들어. 헝가리는 한때 유럽의 변방 취급받았거든. 이제는 중심으로 나갈 차례야.” 서울에 있을 때는 나만 외롭고, 나만 힘들고, 나만 괴로운 줄 안다. 당연하지만 이들에게도 저마다 다른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도 희망이 큰 만큼 더 불안한 미래와 싸우고 있었다. 포르투라는 도시는 대륙의 한쪽 끝에 있어 변방이라 할 수 있다. 식탁에 함께한 이들의 사회적 지위도 아직은 변방, 주변부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조앤 롤링을 꿈꾸고 있었다. 포르투갈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가 이혼한 영국 여인, 자존감이 땅에 떨어질 때면 카페에서 냅킨에 뭔가 메모하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했다는 그 여자 말이다. 허접해 보일 수 있던 그 메모는 어느 날 <해리포터> 시리즈가 되어 황금을 낳는 연금술사 구실을 했다. 그처럼 인생의 반전을 이뤄낸 곳이 바로 포르투란 도시였다. 그렇다. 힘들수록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 변방은 어느 날 갑자기 중심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l 저서『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혼자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가급적 발바닥으로 그 도시를 만날 것, 검소하게 지낼 것, 현지에서 생활 체험을 많이 할 것, 이런 3원칙이었다. 호텔이 아니라 현지인의 집에서 방 한 칸을 빌리기로 했다. 관광 중심지에서 살짝 비켜 있던 그 집은 포르투의 은퇴자 부부가 방 여러 개를 세놓아 생활하는 곳으로, 투숙객들은 대부분 장기 체류자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건축학 석사 과정의 남녀 커플 유학생, 디자인 일을 한다는 헝가리 여성 직장인, 온라인 마케팅 일을 하는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30대 남자, 러시아에서 온 여행업 종사자 등 글로벌 하숙집 분위기였다. 처음엔 몰랐지만 그 집에는 작은 규칙이 있었다. 저녁 7시가 되면 부엌에 모여 저마다 준비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눴다. 개인의 영역과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되 식사 때만큼은 모여 함께 만들고 나누는 공간, 진정한 의미의 공유부엌이었다. 부엌은 흡사 세계 음식 경연대회가 열린 것 같았다. 한국의 전골 비슷한 포르투갈의 프란세지냐, 헝가리의 굴라시(매운 수프), 프랑스의 양파 수프, 오스트리아의 슈니첼(송아지 고기로 만든 커틀릿) 같은 것들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 대부분 아직 주머니에 여유가 없는 까닭도 있겠지만, 절약 정신이 배어 있었다. “한국 음식은 어떤 거야? 한번 만들어봐!” 그들은 나에게 요리 동참을 권유했다. 멀고도 먼 극동에서 온 중년 아저씨를 글로벌 식탁에 끼워준 것은 물론 고마웠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다른 음식 재료 준비 없이 왔던데다, 솔직히 말하면 요리를 할 줄 몰랐던 까닭이다. 국경을 벗어나 혼자가 되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내가 진짜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생활해왔는지 깨닫는다. 삶의 가장 기초인 식사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있는, 초라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갑자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심은 심정이었다. 초면에 아무것도 안 하고 얻어먹기도 무엇해서 나는 설거지를 자청했지만, 그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돌자 헝가리에서 온 여성이 어디선가 술 한 병 들고 왔다. 슬로바키아 산악 지대에서 생산되는 ‘타트라트’(Tatrat)라는 이름의 75도 독주였다. ‘불탄다’라는 어원을 가졌다는 것만 보아도 얼마큼 독한 술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정말 목구멍이 불탔다. 함께 요리하고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사람들은 더 가까워진다. 식탁에 있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굳이 대륙의 끝에 있는 이 도시까지 온 이유는 뭐냐?” “포르투는 날씨가 좋고, 무엇보다 물가가 무척 싸. 우리는 여기서 살고 싶어. 부모님이 도와준다고 했지만 우리 힘으로 살 거야. 일단 우리 전공인 건축 분야에서 인턴 자리는 나왔으니 여기서부터 뭔가 천천히 만들어보려고 해!” 독일 옆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온 남녀 커플의 답변이다. 그러자 프랑스에서 온 남자가 끼어들었다. 보르도 출신답게 와인에 일가견이 있고 요리 솜씨까지 뛰어났다. 외국 여러 곳을 이동하며 일하고 있는 덕분에 영어가 매우 유창했다.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얼마 전까지 함께했던 회사가 파산했어. 몇 달 일한 건 무용지물이 된 셈이지. 그래도 나는 돈과 자유의 균형을 잃고 싶지 않아. 여기서 힘을 길러 다른 도시로 옮길 생각이야.” 그는 디지털 노마드였다. 정보통신이 발달하면서 유목민처럼 도시와 국가를 이동하는 삶이라는 단어 뜻 그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유란 얼마나 힘들 게 얻어지는 것인지 그의 얼굴에서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헝가리 여성에게 물었다. “지금 너는 뭐가 가장 간절하냐?” “나는 포르투에서 자리잡고 싶어. 유럽연합에 통합되어서 이곳까지 건너올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좋은 일자리는 구하기 힘들어. 헝가리는 한때 유럽의 변방 취급받았거든. 이제는 중심으로 나갈 차례야.” 서울에 있을 때는 나만 외롭고, 나만 힘들고, 나만 괴로운 줄 안다. 당연하지만 이들에게도 저마다 다른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도 희망이 큰 만큼 더 불안한 미래와 싸우고 있었다. 포르투라는 도시는 대륙의 한쪽 끝에 있어 변방이라 할 수 있다. 식탁에 함께한 이들의 사회적 지위도 아직은 변방, 주변부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조앤 롤링을 꿈꾸고 있었다. 포르투갈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가 이혼한 영국 여인, 자존감이 땅에 떨어질 때면 카페에서 냅킨에 뭔가 메모하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했다는 그 여자 말이다. 허접해 보일 수 있던 그 메모는 어느 날 <해리포터> 시리즈가 되어 황금을 낳는 연금술사 구실을 했다. 그처럼 인생의 반전을 이뤄낸 곳이 바로 포르투란 도시였다. 그렇다. 힘들수록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 변방은 어느 날 갑자기 중심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l 저서『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