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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형성된 후암동 골목에 서양식으로 보이는 주택이 이채롭다. 대개 일본인들이 마을을 만들었지만 그들 중에는 서양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아 서양식 집이 많이 들어선 것 같다. 자동차도 들어갈 수 없는 골목 안에 이제는 많이 낡았지만 멀리 남산과 더불어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김란기 제공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이토 히로부미의 별장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왔다. 일본 제국주의의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은, 조선 침탈의 앞잡이인지라 남산 자락의 후암동에 별장이 있었다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후암동은 일제가 용산에 조선주차군사령부(일본군 주둔지)를 만들면서 형성된 마을이니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제껏 본 적이 없으니 찾아보고 말리라.
주춧돌에 일본식 지번 표시 여전
‘후암동’이란 이름은 둥글고 두터운 큰 바위를 뜻하는 ‘두텁바위’에서 유래했다. 남산 남쪽 자락은 가파른 언덕이다. 게다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품은 골짜기도 있었으니 마을을 만들고 집을 짓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마을이 만들어지고 지금의 후암로(옛 삼판로)는 1910년 직후에 만들어졌다. 서울의 중심부 총독관저에서 현재 용산미군기지인 조선주차군사령부로 가는 지름길로 만든 길이다.
이전부터 작은 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길이 넓어지면서 후암로 양편으로는 일본식 상가주택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갔다. 옛 지도를 보며 따져 보니 길이 열린 뒤 골목이 생기고 마을은 점점 넓어졌다. 북쪽으로는 남산을 향해 북상하면서 동네가 형성되었고 남쪽으로는 남영동, 갈월동, 동자동 쪽 언덕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골목길은 어느 길 하나 곧지 않고 폭도 좁아 마을이 생긴 뒤에도 자동차는 드나들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길은 조금씩 펴지고 넓어져 지금은 꽤 많은 골목에 차가 들어가고는 있지만 아직도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골목도 숱하다.
그런 후암동에 한국은행 직원합숙소(생활관)란 곳이 있다. 현 후암동 주민센터 인근이다. 왜 뜬금없이 한국은행 합숙소가 있을까? 대한제국 말기에 새로운 근대식 금융기관으로 설립돼 내려온 것이 지금의 한국은행이 아닌가! 일본계 금융기관이 경제를 지배하던 대한제국 말기에 국책은행 기능(국고 수납, 은행권 발행)을 하던 은행으로, 1912년 개업한 조선은행은 후암동에 직원 사택지를 만들었다.
이 조선은행이 남대문로에 처음 건축 공사를 시작할 때는 ‘일본제일은행 경성총지점’(1907년 11월)이었으나, 2년 뒤 한국 정부의 중앙은행으로 ‘한국은행’의 설립이 고시되었고(1909년 7월26일), 한일병탄 뒤에는 식민지 ‘조선은행’이 된 것이다(1912년 1월20일). 그 과정에 지은 이 사택들은 해방 뒤에는 상당 부분이 일반에게 팔려버렸고 나머지 땅에 들어선 게 한국은행 생활관이다. 팔려버린 사택지의 주택들은 이미 빌라 등 현대식 집합주택으로 변신했는데, 여전히 건재한 한국은행 생활관은 주변에 비해 제법 호사스럽게 보인다.
빌라 주택지 후면, 남산 쪽과 후암로 길 건너 남쪽 마을 골목들에도 일본식 주택들이 빼꼼빼꼼 여전히 서 있다. 삼광초등학교(옛 공립 삼판소학교) 주변, 옛 수도여자고등학교(옛 공립 경성제2고등여학교) 뒤편이다. 삼광초등학교 교정에는 아직도 옛 수영장 흔적이 남아 있고 정문 앞에는 일본식 주택들이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지금은 이전한 옛 수도여고 건물들 중 가장 오래된 교사는 지난해 감쪽같이 헐려버렸다. 나머지 건물들은 서울시교육위원회가 사용하고 있다.
일본식 주택이 남아 있는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서양식 주택 모양의 뾰족집도 보이는데 그 집 앞 어느 아주머니가 나오시더니 “우리 집에는 이런 것도 있어요” 하신다. ‘京城府 三坂通(경성부 삼판통) 140-13 NO2’. 이건 뭘까? 주춧돌에 새긴 표시판이다. 그 옛날 일본인이 처음 이 집을 지을 때 자자손손 살고 싶어서 동판으로 만들었나? “아주머니, 그런데 떼었다 붙인 흔적이 보이네요?” 했더니 “그거 그전에는 별로 안 좋아했잖아요!” 하신다. 시대는 변하고 주인은 바뀌었어도 이 표시판은 과거를 증명하고 있다.
재개발 바람에도 마을은 그대로가 풍경 그런 골목길에 나이 많은 노인들도 많지만 아이들과 젊은 주부들도 제법 보인다. 삼광초등학교가 별탈없이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후암동에는 세대가 골고루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등학교 앞 문방구는 70~80년대 모습으로 간신히 유지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노후 직장으로 남아 있지만, 예전처럼 문방구 유리창 앞에 달라붙어 ‘뿅뿅’게임을 하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으리라.
이토 히로부미 별장 이야기는 한 일본인이 자기 홈페이지에 올린 사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네들은 살그머니 한국을 방문해서 더러 회고하며 그런 것까지 찾아보나 보다. 동네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 묻고 물어 찾아보니 집 한 채를 가리켜 주었으나 역시 확신할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땅에 들어온 것은 1907년이고 안중근에게 사살당한 것은 1909년이니, 그가 이곳에 별장을 지었을 가능성은 사실 희박하다. 후암동도 이제는 대략 서민주택지가 되어 근래에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지만, 현실화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그거요? 나도 재개발 추진위원이지만 앞으로 10년도 넘게 걸릴 거예요”(김아무개 씨·60·여)(계속)
김란기 '살맛나는 골목세상' 탐사단 운영, 문화유산연대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