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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아키히토(오른쪽) 일왕과 나루히토 왕세자가 함께 걷고 있다. 도쿄/AP 연합뉴스
과거 일본 언론에는 세 가지 터부가 있었다. 일왕, 부락민, 조선인에 대한 비판 기사다. 일본인들은 일왕을 하늘에 있는 황제와 같은 존재라 생각하여 ‘덴노’(천황라고 칭하며, 혹여 팩트에 근거한 기사라도 비판은 무조건 금지하고 있다.
‘부락민’은 메이지 시대(1868∼1912) 때부터 일본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차별당하는 마을의 사람들을 일컫는다. 당시 소나 돼지를 잡는 백정들이 집단을 이루며 살았는데 일본인들은 이들을 가리켜 ‘부락민’(부라쿠민)이라고 했다. 이들 대부분은 1945년 일본 패망 후에도 ‘호적’을 발급받지 못해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다. 방송에서는 부락민이라는 호칭은 차별적 용어라 해서 일체 금지되고 있다.
세 번째가 ‘조선인’(조센징)이다. 해방(일본에서는 종전이라고 한다) 이후 일본에 남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워낙 극심했기 때문에, 조선인을 비판하는 기사가 일시적으로 금기 사항으로 분류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왕과 부락민에 대한 금기는 여전한 반면, 조선인에 대해서는 이런 금기 사항이 없어지고 오히려 혐한 기사가 급증했다. 무조건 한국을 때리는 책이면 기본 부수 10만 부는 거뜬히 팔렸다. 시사 주간지는 한국 비판 기사가 실리면 5만~10만 부가 더 팔리는 기현상을 낳기도 했다. 그 하일라이트가 바로 수년 전부터 극성을 부렸던 혐한 시위다.
그런데 이 혐한 시위자들 대부분이 다름 아닌 그들이 말하는 ‘천황’ 신봉자들이라는 것이다.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똘똘 뭉쳐야 하며 때에 따라서는 그 ‘천황’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국>이란 소설을 쓴 일본의 우익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자위대의 쿠데타를 촉구하면서 할복자살을 할 때 맨 마지막에 남긴 말도 “천황 폐하 만세”였다.
지난 13일, 아키히토 일왕이 생전에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공영방송 <엔에이치케이>(NHK) 뉴스가 보도했다. 가장 충격을 받은 이들은 바로 이 우익들이다. 이들은 아키히토 현 일왕이 사망할 때까지 왕위를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루히토 왕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으면, 하버드 대학과 도쿄 대학을 나온 합리적 역사관의 소유자 마사코 왕세자비와 함께 제 목소리를 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키히토 왕과 나루히토 왕세자는 일본의 전쟁 참가를 용인하지 않는 일본 헌법 제9조를 지키려 하는 평화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때문에 아베 정부는 물론 우익 성향의 정치인이나 교육자, 문화인들은 현 아키히토 왕보다는 국수주의자였던 그의 아버지인 고 히로히토 전 왕을 더욱더 그리워한다.
반면, 일반 국민들은 곧 나루히토 왕세자가 왕위를 물려받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 일왕이 84세로 고령인데다 전립선암, 심장병 수술 등 그동안 잦은 병치레를 해왔기 때문이다. 아베 정부와 일본 우익들이 걱정하는 것은 아키히토 현 왕의 공무로 인한 건강 문제가 아니라 나루히토 왕세자가 왕위에 올랐을 때의 급변 상황이다. 지금까지 일왕이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다. 일본 왕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아키히토 왕이 몇 번 한국을 방문하고자 일본 정부 쪽에 의사를 타진했으나 그때마다 거부당했다고 한다. 우익 세력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의견은 “한국의 극우들로부터 테러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안전상의 문제로 아직 방한은 무리”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한다.
아키히토 현 일왕은 2001년 12월23일 자신의 생일을 맞아 연 기자회견에서, “50대 칸무천황의 생모는 도래인으로 한국과 인연이 깊다”라고 사실상 일본 왕실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과 혈연관계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해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놓은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56살인 나루히토 왕세자가 즉위 기념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주장한다면, 일본 우익들이 막을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가 일본 언론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글·사진 유재순 일본 전문 온라인매체 <제이피뉴스>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글·사진 유재순 일본 전문 온라인매체 <제이피뉴스>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