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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제가 건설한 실크로드 주요 거점
서역행 승려들 의해 많은 고문서 모여
하지만 근대 서구의 도굴로 상처받고
최근 말라가는 오아시스 ‘관광용’ 유지
둔황 문서 통해 기원전 한자 발음 추정 고대 우리말과 유사성 주장 나와 눈길 당시 ‘백제’의 실제 발음 무엇일까 궁금
둔황 문서 통해 기원전 한자 발음 추정 고대 우리말과 유사성 주장 나와 눈길 당시 ‘백제’의 실제 발음 무엇일까 궁금
둔황의 남쪽에 있는 모래언덕인 명사산 일몰. 모래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울림 소리처럼 들린다고 명사산(鳴沙山)이라 부른다. 오른쪽에 오아시스 월아천이 보인다.
2017년 중국 간쑤성 둔황을 다녀왔지만 정작 귀중한 문서가 처음 대량 발굴된 막고굴의 내부 사진은 제대로 된 게 없다. 석굴 안 아름다운 색의 그림들을 볼 수는 있어도 사진 찍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서다.
기원전 117년 한 무제가 건설한 둔황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다. 몇 세기동안 서역으로 불교 경전을 구하는 불교 승려들이나 많은 순례자가 이곳을 지나갔다. 수천의 불상으로 이루어진 막고굴은 그 과정에 탄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세계문화유산 둔황 유적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유물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사전에 조사해야 한다. 심지어 공개 가능한 석굴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고, 내가 오늘 볼 수 있는 석굴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 보면 오늘 공개되는 막고굴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것도 복불복이다. 인원수대로 끊어서 인원이 다차면 그다음 사람부터는 다음 굴에 들어가는 방식이다. 세계문화유산을 중국식으로 관리하고 소개한다. 이런 상황에 비해 입장료는 상당히 비싸다. 불편한 둔황 석굴 관람이다.
둔황 막고굴 전경.
둔황 석굴에서 신라 고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단 얘기는 참고자료로 조사해서 알면 그만이다. 막고굴에서 발견된 고서적들도 아우렐 스타인과 폴 펠리오가 도굴해 영국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600년대 중국 음운서 <절운>(切韻) 관련 도서들이다. 그들은 그 책들의 내용이 무엇인 줄은 알고 가져갔을까? 나중에 중국의 학자들은 유럽에 가서 간신히 카메라로 찍어서 만든 책을 지금도 보고 있다. <절운>이라는 책은 없고 그 책에 대한 참고용 도서나 <절운>의 내용을 추측할 수 있는 발췌문이 있지만 중국어 음운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5세기에서 7~8세기에 한자를 아시아에서 어떻게 읽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음운서이다. <훈민정음>이나 <동국정운>에서 15세기 한자 발음을 알 수 있듯 말이다.
막고굴 벽화에 나오는 비천.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이 선녀의 동상은 둔황 시내 곳곳에 있는 둔황의 상징이다. 사진은 막고굴 경내에 서 있는 비천 동상.
연세대 중문과 최영애 교수에 따르면, 이 책을 통해 상고시대의 한자 발음(상고한음, 주나라에서 길게는 한나라까지.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후 200년)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최소 2000년 전에서 3000년 전의 한자 발음이다. 갑골문이나 청동 금문 그리고 <시경>에 나오는 한자의 발음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이런 단어들은 이후에 쓰인 한자를 지금의 한국어로 발음하는 것일 뿐이다. 그 당시 발음은 무엇일까?
상고시대의 한자 발음은 지금 한국어의 고유어와 비슷하다는 주장을 중국 음운학자나 최 교수가 한다. 예를 들어 바람 풍(風) 자의 뜻은 바람이고 발음은 풍이다. 현대 베이징어 발음은 펑(feng)이다. 그런데 상고시대 풍(風)자 발음은 ‘ㅍ렴’이라는 주장이다. 황하라고 할 때 물 하(河) 자도 ‘가람’이라는 발음이라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파니니’(기원전 520년~기원전 460년)라는 고대 인도 사람이 있다. 아마도 세계 최초의 언어학자일 것이다. 기원전 6세기에 그가 쓴 산스크리트어 문법서(언어형태론 관련한 책)가 발견되면서 이미 사어(死語)가 된 산스크리트어를 해독할 수 있었다. 산스크리트어는 기원 2세기에 불교와 함께 중국에 전파되면서 중국인에게 충격을 줬다.
19세기에는 영국이 인도를 식민화하면서,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가 서구인에게 충격을 줬다. 기원 2세기의 충격은 중국으로 하여금 ‘반절법’이라는 한자발음법(절운이 이 방법으로 되어 있음)을 만들게 했고, 19세기의 충격은 유럽으로 하여금 인도유럽어군이라는 분류를 기초로 하는 언어학을 만들게 했다.
유럽인들은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의 벽화와 둔황의 석굴 안에 있던 도서들을 ‘몰래’ 허가받지 않고 자신들의 고향으로 가져갔다. 베제클리크 벽화 일부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서구와 함께 제국주의 약탈의 길을 함께했던 일본이 가져다 놓았다. 이제라도 한국 정부가 나서서 신장위구르 지역에 되돌려주고 문화유산은 어느 특정 집단의 소유물일 수 없음을 말하는 게 어떨까?
수나라 시기 만들어진 막고굴 420호 천장의 그림. 대승불교의 법화경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둔황을 둘러본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벽화 관련 도서와 화보를 사서 보았다. 화보를 보며 둔황 석굴의 아름다운 색감에 놀라며 차를 마시며 여독을 풀고 있는데, 갑자기 ‘쾅-쾅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나와 일행은 여유롭게 지내던 노천카페에서 일어서서 자리를 피하려했다. 순간 공포를 느꼈다. 뭔 일이 난 듯했다. 신장 우루무치에서 겪었던 공포가 이곳 둔황까지 이어지려나. 대포 소리처럼 크게 들린 것으로 보아 인근에서 나는 소리였다. 최루탄 소리나 건물 무너지는 소리 같았다. 중국인들도 거리에서 어리둥절해했다. 상점 주인도 거리로 나왔다.
한국 사람 같으면 경찰에 신고하고 서로 모여 소리의 진원을 파악하려고 동분서주할 것 같은 일인데, 중국인들은 한 15초 정도 “뭔 소리지?”라고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것도 나에겐 공포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 않나? 지금도 그 소리의 연원은 오리무중이다.
다음날에는 사막으로 향했다. 둔황에 오면 으레 가야 하는 곳이다. 월아천(月牙泉)이라는 이름의 오아시스는 많은 다큐멘터리에서 다루고 사진으로 봤던 유명한 곳이지만, 정작 주홍색 장화를 신고 다니는 중국인들을 보는 것이 사막에서 사막을 보기보다 더 쉬웠다. 모래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모두가 동일한 색의 장화를 신는다. 난 차라리 모래에 빠지려고 신지 않았다.
명사산에서 낙타를 타는 관광객.
석양에 물든 하늘과 월아천, 그리고 사막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또 하나의 놀라운 장면은 급수차였다. 기후변화 때문에 월아천은 더 이상 물이 끝없이 샘 솟는 오아시스가 아니라 계속 물을 넣어주어야 하는 관광지일 뿐이었다.
둔황에서 본 놀라움은 두 가지 질서의 병존이다. 하나는 관람자를 통제하려는 획일적 질서였다. 관람자의 선택이 무시되는 세계문화유산을 ‘나름’의 방식으로 관리하는 그 질서 말이다.
또 하나는 공포를 자극하는 소리에 둔감한 둔황의 중국인들 속에 존재하는 질서였다. 그들을 보며, 루쉰의 소설 <아큐(Q)정전>에 등장하는 중국의 인물들이 떠올랐다.
네덜란드에 사는 한 친구가 말한다. “왜 그렇게 먼 오지만 찾아다니며 힘들게 고생하세요? 암스테르담에 오면 <하멜 표류기>의 저자가 살던 곳도 있는데….”
미국 뉴욕이나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를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것도 하나의 여행이다. 이곳의 오아시스에 있던 둔황도 한때는 뉴욕 버금가는 곳이었을지 모른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시간의 차이와 함께 오아시스에 닥친 기후변화는 인간의 삶을 내리누르고 있다.
글·사진 장운 자발적 우리 흔적 답사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