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쏙 과학

“고난 전에 준비하라…여름에 겨울눈 맺는 나무처럼”

㉑ 서울특별시교육청과학전시관에서 배우는 식물들의 겨울나기 지혜

등록 : 2021-11-18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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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나무 겨울눈. 이 나무의 낙엽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난다.

나무들, 겨울 오기 전 잎사귀 떨구고

겨울눈과 씨앗, 뿌리에 에너지 집중

그 겨울눈도 여름철에 이미 싹 틔워

다가올 추위에 대비하며 미래 넣어둬

단풍은 천적 벌레 막으려는 식물 지혜

빨간 낙엽에는 ‘해충의 알’ 현저히 적고

단풍 쌓인 땅, 다른 식물 쉽게 싹 못 터


가을부터 붉은 잎 땅에 덮어 ‘사전 단속’

식물의 지혜, 수십억년 생존·진화 결과

이해하려면 끊임없는 관찰·실험 필요

모란은 나무라서 겨울눈이 있다. 풀인 작약은 모란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겨울눈이 없다.

“겨울이 오면 왜 잎사귀들이 떨어질까요?”

“단풍잎은 왜 빨갛게 물들까요?”

울긋불긋 물든 서울시교육청과학전시관의 나무들 앞에 서서 안은주 국립수목원연구원이 물었다. 그는 토요가족생태환경교실(이하 환경교실) 강사이기도 하다. 열두명의 참가자 중 어린이 두엇이 자기 생각을 내놨다.

“추워서요.”

“햇빛을 많이 받아서요.”

안 연구원은 “겨울은 식물에도 고난의 시기”라며 “겨울을 준비하느라 식물들은 잎을 떨구고 겨울눈과 씨앗, 뿌리에 에너지를 집중한다”고 말했다. 그 준비는 여름부터 시작된다. 그가 전하는 식물들의 겨울나기 지혜를 더 들어보자.

첫째, 식물은 고난 앞에서 겸손해진다. 자기 몸집을 줄여 생존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 이들에게 목소리가 있다면 시인 기형도처럼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안은주 국립수목원연구원이 과학전시관 토요생태환경교실 참가자들에게 확대경으로 민들레 씨앗을 관찰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식물은 겨울이 오기 전에 이파리들을 떨군다. 잎의 엽록소가 광합성을 할 땐 물이 필요하다. 잎 뒷면의 기공이 증산작용 즉 체내의 물을 수증기로 내보내는 일을 하면서 뿌리로부터 물을 끌어올린다. 그런데 겨울엔 땅속 물이 언다. 뿌리가 물을 올릴 수 없다. 그래서 잎이 큰 활엽수는 물을 적게 먹는 몸을 만들려 잎을 죽인다.

잎이 좁은 침엽수는 증산작용이 적게 일어나 겨울에도 푸른 잎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잣나무, 소나무 역시 가을이 되면 이파리를 떨군다. 겨울에 이파리 위에 눈이 쌓이면 그 무게로 가지가 부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해 틔운 잎은 버리고 올해 난 새잎으로만 겨울을 난다.

둘째, 적들이 오지 못하게 미리 막는다. 학자들은 단풍이 왜 빨갛게 물드는지 연구했다. 안 연구원은 최근까지 밝혀진 연구 결과를 전했다. 거기엔 두 가지 효과가 있었다. 천적 방지 그리고 경쟁 예방. 단풍 진 잎에는 해충이 낳은 알이 현저히 적었다. 단풍의 빨간 잎이 쌓인 땅에선 다른 식물의 씨앗이 쉽게 싹 트지 않았다.

봄에 경쟁 식물이 곁에서 자라 햇빛을 빼앗아가지 않도록, 자기를 괴롭히는 곤충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단풍나무는 가을부터 붉은 이파리로 땅을 덮어 사전에 단속하려했던 것일까. 안 연구원은 그 이유에 대해선 아직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의 두 가지 질문인 ‘어떻게’와 ‘왜’ 중‘왜’가 더 밝히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식물이 ‘어떻게’ 이렇게 하느냐는 전자현미경 등 과학기술 발전 덕에 많이 밝혀졌어요. 그러나 식물이 ‘왜’ 이렇게 하는지에 대해선 모르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그건 기술로 밝힐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오랜 진화과정 속에 생겨난 기제들이기 때문이에요. 그걸 이해하려면 끊임없는 관찰과 실험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잠깐! 안 연구원이 낸 퀴즈를 풀어보자. 나무와 풀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환경교실 참가자들은 이렇게 답했다.

우엉의 열매에는 작은 갈고리가 달려서 동물의 털에 잘 달라붙는다. 토요생태환경교실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저마다 만지려 손을 내밀고 있다.

“나무는 가지에서 나뭇잎이 나와요.”

“풀엔 겨울눈이 없어요.”

안 연구원은 꽃과 잎이 비슷하게 생긴 모란과 작약으로 그 차이를 설명했다. 모란은 나무다. 가을에 잎을 떨궈도 겨울에 줄기가 남는다. 줄기엔 겨울눈이 있어 내년에 잎을 틔울 준비가 되어 있다. 작약은 풀이다. 땅 위의 모든 조직이 사라진다. 뿌리만 남아 봄에 잎과 꽃을 올린다.

나무와 풀이 겨울을 나기 위해 에너지, 즉 양분을 모으는 곳도 다르다. 작약은 잎이다 죽기 전에 영양분을 뿌리에 모은다. 인삼, 더덕, 고구마, 도라지같이 우리가 뿌리를 먹는 여러해살이풀이 다 그러하다. 이런 작물의 뿌리는 그래서 늦가을, 잎이 다 시들어떨어졌을 무렵 가장 영양분이 많다.

모란은 겨울눈에 에너지를 모은다. 겨울 눈이 맺히는 시기는 이름과는 다르다. 겨울 눈은 여름에 맺힌다. 그 안엔 미래를 넣어둔다. 안 연구원이 손끝으로 쪼갠 겨울눈 속에는 미니어처처럼 작은 잎들이 차곡차곡 겹쳐 있었다. 겨울의 고난이 지나면 싹 틔울 모란의 미래였다. ‘한창 좋을 때 고난의 시기를 준비한다.’ 이날 식물에서 배운 셋째 지혜다.

겨울눈엔 나무마다 다른 생존 전략이 숨어 있다. 회양목은 햇빛이 잘 드는 남쪽으로는 둥근 꽃눈을, 그 외의 방향에는 뾰족한 잎눈을 달아둔다. 곤충이 잘 찾아오도록 밝은 데 꽃을 피우려는 전략이다. 칠엽수는 겨울눈에 끈적끈적한 진액을 바른다. 안 연구원은 겨울에 겨울눈이 얼지 않게, 해충이 파고들지 못하게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참가자들의 열광을 이끌어낸 건 따로 있었다. 우엉 열매였다. 이 열매엔 작은 갈고리 모양을 한 가시가 잔뜩 달렸다. 참가자들은 우엉 꽃 아래에서 영글어가는 푸른 열매를 서로 만지려 앞다퉈 손을 내밀었다. 어떤 아이는 자기 옷에 열매를 붙여보기도 했다.

나팔꽃씨 등 씨앗 껍질은 단단하다. 겨울 추위를 겪어야 껍질이 갈라지면서 싹이 튼다.

안 연구원은 우엉 열매가 짐승 털에 한 번 엉겨 붙으면 가위로 잘라내야 할 정도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추위에 자기는 죽더라도 자기 자손은 더 멀리 퍼뜨리려는 우엉의 책략이리라. 스위스의 한 발명가는 산책할 적마다 강아지 털에 성가시게 달라붙는 우엉 열매에서 영감을 얻어 벨크로, 일명 ‘찍찍이’를 고안하기도 했다. 인간이 우엉에서 배운 지혜다.

광합성 식물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온 건 4억2500만년 전, 고생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식물은 빙하기 등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면서 그때 얻은 지혜를 유전자에 새겼을 것이다. 마찬가지 과정으로 지구상 많은 생명체에는 저마다의 지혜가 생겼다. <자연에서 배우는 공학 이야기>의 공저자이기도 한 안 연구원은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지구상의 생물들은 38억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갖가지 시행착오를 극복해 살아남은 존재들이다. 수많은 생물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자연의 가르침은 무료다. 서울시교육청과학전시관의 환경교실도 무료다. 다만 겨울에는 쉰다. 이 프로그램은 내년 봄에 다시 시작될 예정이다.

글·사진 이경숙 과학스토리텔러

자문: 안은주 국립수목원 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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