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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자치주 츠펑시의 훙산(紅山). ‘붉은 산’이란 뜻의 몽골어 ‘우란하다’가 원이름이다. 츠펑 북쪽으로 올라가면 옛 고구려성이 남아 있다고 한다.
랴오닝 뉴허량과 내몽골 츠펑의 유적
4대 문명보다 앞선 6000년 전 문명
중국은 ‘중화문명 우수성’ 자랑하지만
‘고조선 낳게 한 문명’이라는 시각 존재
발견된 곰상과 양반다리 여신상들은
‘우리와의 관련성’ 증거일 수 있음 보여줘
중국 쪽 문헌 기록들 ‘자기중심’인 탓에
훙산 유적에 대한 접근 중요성 높아져
훙산 유적에 대한 접근 중요성 높아져
츠펑에 올라가면 만나는 라마불교 영향을 받은 사원.
중국 랴오닝성의 성도인 선양에서 북서쪽으로 가다보면 차오양과 랴오양을 거쳐 내몽골의 츠펑(赤峰)시까지 들어간다. 랴오허(遼河·요하)를 건너기도 하고 다링허(大陵河·대릉하)를 거쳐 산맥을 타고 넘기도 하고 그렇게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내몽골로 들어간다.
츠펑시까지 가는 고속도로 주변에서 옆으로 살짝 빠지면 랴오허 문명이라는 거대한 유적지들을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규모가 워낙 크지만 안내판이나 도로 사정 등 유적지들을 찾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뉴허량’(牛河粱·우하량)이라 쓰인 표지판을 만나서 그대로 계속 따라갔다. 목적지인 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에 위치한 뉴허량 유적에서는 제단과 여신상 그리고 곰상이 나왔다는 유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여신묘와 적석총, 제단이 발견된 랴오닝성 뉴허량 유적. 사진은 제단 모습이다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걸어서 다닐 수는 없고 차량으로 이곳저곳을 다녀야 했다. 그래도 돔으로 천장을 마감한 제사단이 있는 곳이 가장 볼만했다. 관람객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함께한 조선족 박 선생은 선양에서 태어나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했는데,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했다. 박 선생은 표까지 끊고 함께 갔다.
중국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문명’이라며 큰 글씨로 알리고 있었다. 중화 문명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고 세계 1등 문명이라고 선전하고 있었다. 한국의 고고학계는 인정하지 않았고, 민족사학계에서는 고조선과 연관 짓거나 고조선 이전의 문명으로 고조선을 낳게 한 것으로 여기는 지역이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백제 초기 적석총이나 지린성 지안시의 고구려 적석총을 본 뒤에 바로 뉴허량의 적석총을 보면 시간적 거리감은 있어도 뭔가 연결되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랴오허 문명은 기원전 4000년 정도이니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이다. 세계 4대 문명이라는 나일강, 메소포타미아, 황허, 인더스 문명이 모두 강 주변이고 기원전 3000년 정도이니, 랴오허를 중심으로 한 강과 구릉지에 있는 랴오허 문명은 이보다 앞선 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국가체계와 문자 발명 등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오래된 ‘문명’이 아니라 신석기 문화로 격하시키기도 한다는 점이다.
뉴허량 제2지점에서 발견된 여신상의 얼굴. 복원된 여신상은 반가부좌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곰과 여인의 신상 같은 것이 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하나, 뉴허량 유적지에서는 볼 수 없었고 사진들만 전시돼 있었다. 제사 지내는 커다란 제단과 토기들만 현장에서 볼 수 있다. ‘곰과 여인’의 상을 마주하면 한국인들은 대번에 삼국유사의 단군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인골도 출토됐는데 많은 옥 장신구가 나왔다. 곡옥의 형태로 보이는 옥들은 신라 금관에 걸린 옥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용인지 돼지인지 동물을 상징하는 옥은 훙산(紅山) 문명의 상징처럼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다. 옥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전문 장인집단이 존재함을 보여주기에 직업의 분화와 어느 정도 계급사회가 형성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젠핑(건평)박물관의 훙산 문화 유물. 사진은 밭쥐를 형상화한 석상이다.
우리 일행은 다시 츠펑으로 향하며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일행은 모두 이곳저곳을 들르고 싶었으나 이미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내몽골로 들어가는 고속도로에 진입한 뒤에는 금방 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아뿔싸! 고속도로에서 ‘신호등’을 만나게 될 줄이야. 신호등만이 아니라 고속도로가 끊겨 갑자기 길이 없어지고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주변에 차량은 한 대도 없었다. 밤길을 한참 헤맨 뒤 츠펑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츠펑시 입구는 차량과 사람, 그리고 소가 끄는 마차들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19세기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역시 츠펑시에서도 숙소 찾기가 어려웠다. 츠펑시에 들어서기 전, 얼마 안 되는 거리지만 밤길에 포장도 안 되고 정확히 길도 나 있지 않은 길을 이동해야 했기에 피로도가 심했다. 잠시 쉴 겸 어느 마을에 차를 세웠다. 차의 모든 불을 끄고 하늘을 바라보았더니 별이 초롱초롱 많이도 보였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경험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츠펑의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츠펑시 박물관도 휴관이라 훙산에 올랐다. 산 전체가 붉은 기운이 도는 훙산에서 라마불교 사원이나 신석기 움집들을 구경하고 한적한 마을들을 구경한 뒤 어쩔 수 없이 선양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일행도 많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짧은 여행길에 고구려 유적지와 훙산 문화, 그리고 곰 발등과 여신상의 조각들을 볼 수 있었다. 선양에서는 여진족이나 거란족 관련 볼거리도 많았다. 여독을 풀기 위해 박 선생의 따님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방 한쪽 구석에는 대중목욕탕에 많이 있는, 쭈그리고 앉을 수 있는 플라스틱 의자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왜 저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많은 중국 한족 손님이 한국식당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바로 그 작은 의자를 하나씩 가지고 들어서며 쭈그리고 앉아 식사한다. 우리 한국인 일행만이 온돌방에 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밥을 먹었다.
바로 이거네! 뉴허량에서 발굴된 여신상은 온전한 모양이 아니다. 손이나 발, 다리, 몸통들이 일부분씩 발견됐다. 그걸 다 맞춰본 중국 조사단이 여신상을 만들어서 전시하곤 했다. 그 여신상은 바로 한국인들처럼 양반다리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학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은 아날학파 역사학자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유럽인이 자신들의 뿌리를 알고 싶어도 기록이 없어서 고고학 중심으로 역사학을 재구성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중국 쪽 기록만 있고 우리의 기록이 많지 않은 상태이니 아날학파처럼 고고학 유적과 유물, 과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브로델은 ‘지중해의 기억’에서 역시 이탈리아의 선주민인 ‘에트루리아인’에 대해 언급한다. 에트루리아는 사실 로마 문화의 기원이나 다름없는 집단이다. 유럽인들은 이 에트루리아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에트루리아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지금의 터키인 아나톨리아에서 이주해 왔다. 프랑스는 그 에트루리아를 자신들의 기원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프랑스인에게 에트루리아 문화는 중국 한족에게 랴오허 문명인 것 같다. <끝>
글·사진 장운 자발적 ‘우리 흔적’ 답사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