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야, 놀자

땅따먹기 한 판에 재미는 두 배, 소통 능력은 세 배

등록 : 2016-09-22 15:25 수정 : 2016-09-22 15:26

크게 작게

시원한 바람 부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이 땅따먹기 놀이에 흠뻑 빠져 있다. 박찬희 제공

‘오늘이 벌써 며칠째야.’

아이들은 요즘 놀이터에 오면 으레 땅따먹기(동네 아이들은 ‘사방치기’를 ‘땅따먹기’라고 한다)를 한다. 놀이터 한쪽 큰 느티나무 아래 평평한 땅이 땅따먹기 명당이다. 땅바닥이 그림이 잘 그려지는 흙인데다가 느티나무가 그늘까지 드리워 주니 명당으로 손색이 없다. 어른들 눈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이 땅의 가치를 알아본 눈 밝은 사람들은 아이들이다. 전에는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끔 하더니 요즘은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놀이터에 오면 빠지지 않고 이 놀이를 한다. 어디서 무슨 바람이 불어왔을까?

딸아이가 처음 이 놀이를 시작한 건 지난해 가을이다. 공원에서 놀던 아이가 갑자기 땅바닥에 놀이판을 그리고는 “아빠, 땅따먹기 하자”며 제안했다. 그런데 이 놀이는 나나 아내가 딸아이 나이쯤에도 있었던 놀이다. 그러나 딸아이에게 이 놀이를 알려 준 기억이 없다.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알려 줬어!”

아하, 그렇구나. 옛날에는 동네 오빠나 언니에게 배웠는데, 이제는 동네 놀이 선생님인 언니들과 오빠들이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동네에서 늘 하고 놀던 놀이에 ‘추억’이나 ‘전래’라는 이름이 붙었고, 부모의 기억 속에 있거나 누군가 애써서 알려 주지 않으면 모르는 놀이가 되었다.

“판은 너희들이 그려야지! 그래도 아저씨가 잘 그리기는 해. 숫자는 너희들이 써.”

아이들의 요구에 못 이기는 척하며 땅바닥에 골이 깊게 파이도록 놀이판을 그렸다. ‘어릴 때는 땅바닥에 금을 그으며 자주 놀았는데.’ 수십 년 전 놀이의 느낌이 땅에서 손으로, 다시 가슴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 느낌은 몸 어딘가에 수십 년간 잠들었다 깨어난 것이다.


“나 일 번, 나는 이 번, 나는 삼 번.”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놀이 순서를 정했다. 한 아이가 금을 밟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뛰었다. 애써 반환점을 돌아오다 그만 금을 밟자 아이들이 일제히 “금 밟았어!”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 아이는 “안 밟았어!”하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승강이를 벌이던 아이들은 사건 현장에 남은, 금 위에 찍힌 신발 자국을 가리켰다. 이런 승강이가 아이들에게는 인간이 달나라에 간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인 듯했다.

다시 놀이가 시작되었다. 가로등이 환해져도 아이들은 멈출 기색이 없다. 이 놀이가 밤늦도록 아이들을 붙잡고, 또 세대를 거쳐 이어진 힘은 뭘까? 자기 힘으로 이룬 성과가 눈에 보이기 때문일까, 친구를 이겼다는 쾌감 때문일까, 혹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배우기 때문일까.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학자라도 되는 것처럼 이유를 헤아려 보기 바쁘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지는 건 어른이고, 당사자인 아이들은 다르다.

“재미있잖아요!”

맞다, 재미있으니까. 뭐가 더 필요할까!

글 사진 박찬희 자유기고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